소설리스트

환영검전-153화 (153/225)

153.

#염성방 (3)

흑백의 태극 문양이 수놓아진 윤건(綸巾)을 쓴 중년인, 악범승이 눈살을 찌푸렸다.

“냉군상과 진우선이 이리로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학사풍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냉군상 혼자서는 이렇게까지 할 수 없었을 텐데, 진우선이 크게도 왔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우리 계획에는 별 지장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맞습니다. 저희의 계획은 완벽했습니다. 진우선과 냉군상만 제외하고는 말이지요.”

칠 일 전에 염성방주 차재강의 아들 차청문이 살해됐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화동일검 교중학이 궁가장에 자초지종을 물으러 간 것까지는 완벽했다.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염성방을 상대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천마교가 끼어들었지만, 사자검문주 서도광이 자연스럽게 궁가장을 압박할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사실 애초에 서도광은 궁가장을 옥죄는 패였다.

하지만 진우선과 냉군상이 나타나며 모든 계획이 헝클어졌다.

“완벽이란 말은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그들이 있었어도 무조건 성사되는 것만이 완벽한 것이니까.”

“죄송합니다. 군사님.”

악범승이 서릿발 같은 불호령에 학사풍의 사내가 바닥에 부복했다.

“근데 염성방이 왜 정무맹에 도움을 요청했을까?”

“아무리 많은 재화를 가지고 있다 한들, 빼앗기면 끝이니 그랬겠지요. 게다가 진우선과 냉군상이 가까이 있으니 확실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을 겁니다. 가진 게 다 없어지느니, 차라리 크게 기부하여 맹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사자검문과 궁가장 사이에서 그간 많은 수익을 올렸겠지만, 바다를 통해 무역하며 얻는 수익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지켜야 할 게 이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학사풍의 사내들이 타당한 이야기들을 꺼냈다. 환사문의 제자인 그들은 환술에 능할 뿐 아니라, 지략에도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악범승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침중한 안색을 펴지 못했다.

그때,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푸른 옷의 청년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군사님.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염성방의 방주가 바뀐 것 같습니다.”

“설마?”

“방주가?”

학사풍 사내들이 청의청년의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순우 부군사. 더 말해보게.”

부군사라 불린 청의청년 순우굉립이 설명을 덧붙였다.

“차재강 방주는 자수성가했으며 독립적인 성격입니다. 스스로 강해지고자 하는 마음밖에 없어 화동일검, 만유노사 같은 귀인들까지 빈객으로 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지요.”

염성방은 염성현에서 큰 부를 이룬 가문 다섯 곳이 연합하여 만든 집단이었다. 단체행동을 하여 더 큰 이득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여태껏 다섯 중 하나인 서회상단의 상단주 차재강이 염성방을 이끌고 있었다.

“염성방이 정무맹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에 더해 천지무로절 행진이 펼쳐지기 직전에 축일공이 밖으로 나온 걸 생각해보면, 축가장의 축대원이 염성방의 방주가 된 것 같습니다. 축가장은 지켜야 할 게 많은 까닭입니다.”

“그렇지! 잘 보았구나!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축가가 수장이 된 게 틀림없어.”

악범승이 의자의 손걸이를 탁 내리쳤다.

하지만 열 명 정도의 학사풍 사내 중에 그 뜻을 이해한 이는 서넛 정도인 듯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설마 그랬겠습니까? 차재강 방주가 아들을 잃어 대노한 게 고작 이레 전입니다. 머리끝까지 성이 난 그가 쉽게 방주직을 내놓았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염성방의 모든 걸 결정할 수는 없지 않겠나? 오히려 흥분하여 방의 대소사를 그르친다면 어찌하려고.”

학사풍 사내들이 갑론을박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결국 악범승과 순우굉립의 생각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때, 심사숙고하던 악범승이 입을 열었다.

“천문환상미로대진(千門幻像迷路大陣)을 펼쳐야겠다.”

“천문환상미로대진요?”

“군사님! 그게 무엇입니까?”

악범승의 말에 학사풍 사내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물었다.

“다들 처음 듣겠군. 우리는 지금 환영팔문진(幻影入門陣)을 여러 곳에 펼쳐 대라환영진(大羅幻影陣)을 이루어 염성방을 감싼 형국이지.”

염성방이 천지무로절행진을 풀고 나와도 외부와 쉽게 소통할 수 없도록 환사문이 에워싸서 봉쇄한 상황이었다.

강소성의 일로 염성방의 창고가 그간에 동이 났을 터라, 시간을 끌어 굶겨 죽일 작정이었다.

또한, 뚫을 수 없는 천지무로절 행진을 상대하는 건 그 수밖에 없었다.

“대라환영진을 세 겹으로 겹치고, 거기에 천변(天變)의 술을 더하고, 인술(人術)을 가미해야겠다. 그럼 팔문이 천문(千門)이 되고, 적들은 환상에 빠져 미로를 헤매다 목을 내놓겠지.”

“헛!”

“군사님! 안 됩니다! 군사님께 가는 압력이 너무 심합니다!”

“저희야 여럿이서 온힘을 다해 대라환영진을 운용한다지만, 군사님은 홀로 큰 축을 전담하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다. 그 수밖에 없으니까.”

악범승이 단호하게 말했다.

기문진법에 두루 능통한 냉군상과 극경의 무인 진우선을 상대하려면 천문환상미로대진을 꺼내 들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천문환상미로 대진은 악범승이 친인 몇 명과 함께 수년간 깊이 연구해온 기문진법이었다.

대술법가는 적으나 제자들은 많은 환사문의 특성을 고려하여, 많은 술사의 진법을 병렬로 연결하고, 자신이 중심축을 맡아 펼치는 방식으로 고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악범승의 친인이자 수제자로 함께 연구했던 순우굉립이 심히 난색을 보였다.

“군사님. 연구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아직 한 번도 펼쳐보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다른 수가 있느냐? 나는 그들을 천문환상미로 대진에 가두고, 두 분이 힘을 써주시는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 그건…… 맞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 혼자만이 아니라 너도 있으니 할 만하리라 생각한다.”

악범승이 순우굉립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사천에서 함께 온 십대빈객의 두 명이 있었다.

“천문환상미로대진을 구축한 후에 두 분께 대진 안에서 움직이는 법을 알려드리겠소. 잘 부탁드리리오.”

“악 군사,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도 그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있소. 화동일검이면 나와 숙 형이 힘을 합쳐 상대할 수 있으나, 진우선이라면 쉽지 않은 게 당연하오. 한데 그 대진이 진우선을 가둘 수 있겠소?”

차분한 인상의 백의인, 단옥철각(斷玉鐵脚) 이문박이 가장 핵심적인 바를 물었다.

“저 천지무로절행진처럼 그를 숨지게 하긴 어려우나, 연구했던 바로는 극경의 고수도 진 안에 열흘 정도 묶어둘 수 있었소. 이 정도면 어떻겠소?”

“그럼 괜찮소. 그만한 고수를 묶어두는 게 어디겠소? 그가 제대로 못 알아차리는 동안, 우리가 그를 얼른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겠구려.”

“그렇소. 정확하오.”

이문박이 바로 옆에 앉은 핏빛 장포의 사내, 혈풍곤(血風棍) 숙일위에게 말했다.

“숙 형. 우리가 차륜전을 해야겠습니다.”

“네 말은 잘 알겠다. 하지만 내가 먼저 상대해보마. 극경의 고수가 진이 빠지기 전에, 제대로 한 수 배워야겠다.”

숙일위의 눈이 번들거렸다. 넙데 데한 돼지상의 얼굴에 윤기도 좌르르 흐르는 게, 정말로 욕심이 많아 보였다.

그는 화동일검 교중학과 일전을 치르며 한 수 뒤처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 고수와의 일전을 갈망하고 있었다.

“원래 숙 형께 선공을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진법에서 상대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도 극히 낮을 테니, 훨씬 좋을 겁니다.”

“흥! 진법이 아니어도 내 목숨을 챙기는 건 문제 없다!”

“알겠습니다.”

“기대되는군. 흐흐흐.”

***

오후였다.

염성방의 무인 셋이 냉군상과 정무맹 무인들을 이끌고 꼬박 하루를 달려 염성현에 도착했다.

염성현에서 동쪽으로 백 리쯤 가면 바다가 보였는데, 염성방은 현과 바다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염성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평원에 커다란 장원과 전각들이 세워져 있을 텐데, 희뿌연 운무만이 사방에 가득했다.

“진 대협. 염성방은 지금 보이는 운무 속에 있습니다.”

“내당주님. 동쪽에 임시로 세운 진영이 있다고 합니다. 기별을 넣었으니 곧 마중 나올 겁니다.”

염성방의 무인들은 진우선과 냉군상을 각별히 신경 쓰면서 설명 했다.

그때, 염성방 무인의 말대로 한 무리의 인마가 다가왔다.

화동일검 교중학이 가장 먼저 다가와 진우선에게 말을 걸었다.

“반갑소, 진 대협. 나흘 만인데, 그간에 많은 일을 헤쳐 나오셨다. 들었소. 그 소식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더군.”

“과찬이십니다.”

진우선이 멋쩍은 표정으로 짧게 대답하고는 그를 바로 냉군상에게로 안내했다.

그러자 교중학도 한 청년을 얼른 데려왔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염성방 소방주 축일공이라고 합니다.”

“아! 축 소방주이셨구려. 이 소식은 미처 듣지 못한지라, 바로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오.”

“아닙니다. 사흘 전에 결정되었고, 본 방도 경황이 없어 아직 알리지 못했으니 당연합니다. 오히려 적들이 우려되어 진즉에 알려 드리지 못한 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소. 그럼 방주께서도 바뀌신 것이오? 축가장으로?”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방주에 오르셨습니다.”

축가장주 축대원이 축일공의 아버지였다.

“축 대인이 방주가 되셨구려. 피치 못할 상황이라 축하는 다음에 드리리다. 지금 정황은 어떻소? 저기 드리워진 운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인데, 귀 방이 펼친 절진만은 아닌 것 같소.”

“정확히 보셨습니다. 동곽 선생님의 진법은 염성방의 담장을 따라 십 장의 폭으로 펼쳐져 있습니다만, 환사문에서 그 밖에다가 술수를 부렸습니다.”

“그렇군. 내가 잠시 살펴보겠소.”

냉군상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자신의 시야에 사람들을 담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더니 눈에서 신광을 흘리며 운무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냉군상이 한숨을 내쉬며 무리에게로 돌아왔다.

“후우-! 저들이 대라환영진을 중첩하여 일종의 연환대진을 펼친 것 같소. 거기에 상당한 술수를 더 했구려.”

“어쩐지…… 오늘 아침부터 운무가 더 심해졌다 싶었는데 그래서였나 봅니다.”

축일공의 음성에서 걱정이 잔뜩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방주도 알고 있겠지만, 정말 쉽지 않을 것 같소. 저 진법을 해체하는 건 꽤 걸릴 거요. 환사문이 저 안에서 직접 운용하고 있으니 말이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시간이 중요하오? 혹시 내부에 식량이 넉넉지 않은 거요?”

“그렇습니다. 아마 닷새 정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축일공은 그게 치부가 될 만한 사실임에도 숨기지 않았다.

“허어! 알겠소. 어떻게 해서든 방도를 찾아보겠소.”

“감사합니다.”

“대신 문이 열린다면 우리가 정말 애썼음을 살펴주시오.”

“그건 당연합니다. 지금 약조해 드리겠습니다.”

축일공이 진중히 대답하더니, 냉군상을 데리고 임시 진영으로 돌아갔다.

한편, 염성방은 커다란 땅에 완전히 갇혀버린 상황이었다.

그들이 펼친 진법으로 통행을 막았는데, 환사문이 펼친 진법으로 인해 시야마저 막힌 까닭이었다.

그런 까닭에 내부에서는 우려가 날로 커져가고 있었다.

“방주, 큰일이오. 식량이 사흘 치밖에 남지 않았소.”

“그렇구려.”

“그리 간단히 답할 일이 아니오. 굶어 죽게 생겼소이다.”

염성방의 다섯 가문 중 하나인 홍가장의 장주 홍천보가 급박한 마음을 쏟아냈다.

“동곽 선생이 말하길, 저들이 펼친 연환대진은 극경의 고수도 쉽지 않을 거라고 했소.”

“홍 장주, 진짜 극경의 고수를 본 적이 있소?”

염성방주 축대원이 뜬금없이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없소만…… 그게 상관있소?”

“나는 본 적 있소. 일전에 산동에 상행을 다녀오다가 귀인을 만났었지. 하룻밤 인연이었으나, 나는 그 분이 천하의 이치를 꿰고 계신 걸 엿볼 수 있었소.”

“그랬구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오? 설마 진우선에게 그걸 기대한다는 말이오? 방주는 냉군상을 염두에 두고서 정무맹과 손잡으려 한 거 아니었소? 나는 그런 줄 알고 방주로 밀어줬는데.”

냉군상과 축대원의 인연.

홍천보는 그 점을 고려해 축대원을 염성방주로 추대했었다.

하지만 인제 보니 축대원의 생각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차 단주의 뜻이 틀린 게 아니오. 우리가 재물을 써서 극경의 고수를 탄생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하지만 그건 생각처럼 되지 않았지. 또, 정무맹이 돈이 없어서 그런 고수가 여태껏 없었겠소?”

“그럼 진우선은 이 일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거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그는 열일곱의 나이에 극사를 넘어섰다던 사도련주와 맞수를 이뤘소. 얼마나 상상도 못 한 능력을 갖췄겠소? 악범승 역시 환사문에서 세 손가락에 꼽힌다는데, 그럼 오히려 신기수사보다 진우선에게 답이 있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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