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염성방 (2)
잠시 후, 냉군상이 몇 사람과 함께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 외의 진양각 무인들은 궁가장의 접객당에 짐을 풀기 위해 이동했다.
“냉 대주, 소 대주! 이쪽은 근래에 맹에서 이름이 높은 진 무사라네. 한 번씩 들어는 봤을 텐데, 서로 인사들 하게.”
“진우선입니다. 냉 대협과 소 대협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진 대협. 오랜만이오. 전에 배에서 천 대협을 구했을 때, 호심당으로 가는 길이라 하지 않았소?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름이 자자한 대협이 되었구려! 축하하오.”
“과찬이십니다. 그때 뵙고 처음 뵙는데,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냉하상이 미소 지으며 진우선과의 기억을 떠올렸다.
소무강도 비슷했다.
“진 대협, 나도 반갑소. 남가철방에서 만난 이후로 오랜만인 것 같군. 그간 잘 지냈소?”
“네. 그때 소 대협을 만나 무공이 진일보하며 늘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왔습니다. 나중에 뵙기로 했는데, 그간 연락도 드리지 못했군요.”
“괜찮소.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나야말로 진 대협에게 고맙다고 늘 생각해 왔소.”
“감사합니다.”
둘은 남가철방에서 비무를 벌이다 우연찮게 건천이화대화로를 발견한 때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진우선은 이화를 얻었다. 소무강은 한령신공의 단초를 깨달았고, 이제는 화후가 깊어진 상황이었다.
“진 무사와 각자 인연이 있었군.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냉군상이 다시 자신에게로 시선을 주목시키더니, 말을 이었다.
“어제 지원을 요청했을 때는 사자검문과 수룡방이 공격해오고 있었네. 그리고 새벽에는 귀문탈백종의 거센 습격이 있었지. 우리와 궁가장에 피해가 좀 있으나, 진 무사가 주축이 되어 어찌어찌 물리쳤지. 하지만 아직 강소성의 일대풍운은 끝나지 않았다네.”
냉하상과 소무강은 냉군상의 말이 간단하지만 얼마나 수고했을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강소성의 풍운은 원래 사자검문이 염성방에 어깃장을 놓으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염성방에 만년삼왕이 있었더군. 그래서 지금 사도련이 나서서 염성방을 압박하고 있다네. 아무래도 이 사태까지 진화해야 강소삼정을 중재하게 될 거 같네.”
“허-! 만년삼왕이란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강소성이 돌아가는 사정은 얼핏 들었었는데, 이리 얽혀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냉하상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흘렸다.
냉군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낮에 염성방 남경지소에서 사람이 다녀갔는데, 우리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더군. 염성방은 지금 만유노사 동곽 선생이 천지무로절행진을 펼쳤고, 해제하기 전까지는 안에서든 밖에서든 출입이 불가하다고 하네.”
“천지무로절행진이라니! 설마 그게 천하에 존재했었다니요!”
제갈영이 진법이 무엇인지 듣고는 기겁을 했다.
천지무로절행진(天地無路切行陣)은 천지를 뒤흔들어 생문이 하나도 없게 만든 희대의 절진(絶陣)으로, 고금의 천재이며 기인이었던 절대천뇌(絶代天惱)의 작품이었다.
절대천뇌는 천하에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에 극히 노하여 천지무로절행진을 선보였다.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긴 까닭인지 진법은 가공할 위력을 선보였는데, 물경 천을 헤아리는 고수들이 그 안에서 떼죽음을 당할 정도였다.
하지만 백 년 전에 딱 한 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는 나타난 적이 없었다. 진법을 펼치는 데 사람의 힘만 드는 게 아니라, 천지조화를 살펴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절대천뇌가 아니면 아무도 펼칠 수 없을 거라고도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방법마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천지무로절행진이라니.
염성방은 지금 만년삼왕에 이어 또 한 번 천하를 발칵 뒤집어놓고 있었다.
그때, 백하련이 냉정한 눈빛을 보이며 질문했다.
“내당주님. 그럼 염성방은 진법이 다시 열릴 때까지 우리가 바깥에서 환사문을 빨리 물리쳐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화동일검 교 대협은 어제 출발하여 이미 환사문과 대치하고 있다더군.”
“급하겠군요.”
“이번 일을 잘 넘기게 되면 맹에 크게 기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뜻을 전해왔네.”
백하련과 냉군상의 대화를 듣던 남궁경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화동일검이 염성방을 대표하여 궁가장에 와서 우리에게 으름장을 놓은 게 불과 사흘 전이었는데, 일이 또 이렇게 흐를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냉군상도 그렇고, 제갈영을 비롯해 이야기를 듣던 다른 이들도 어이가 없었다.
백하련이 냉군상에게 가장 중요한 바를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신지요?”
“내가 직접 다녀올 참이네.”
“당주님!”
“직접이요?”
제갈영과 남궁경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하지만 냉군상은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 원주는 지금 부상이 심하니, 진 무사가 함께해줬으면 좋겠군. 이번 일에 성공한다면 맹의 큰 이득이기도 하지만, 사도련이 만년삼왕과 천년설삼을 얻어 더욱 강해지는 걸 막을 수 있지. 게다가 염성방에 뭐가 더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관무평은 내상, 외상이 심해 이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일단 저들을 저지해야 하는데, 진 무사가 도와주게나. 이는 강호삼정을 중재하는 자네 임무의 일환이기도 하다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냉하상이 빠르게 자신의 계획을 추진해나갔다.
“그럼 염성방에 갈 인원을 정해야겠군. 우선 만상각의 한 무사와 호심당의 이결제자 만총, 그리고 경이가 창천대와 함께 이곳에 남아서 궁가장을 방비하도록 하지. 사자검문과 수룡방은 정오 무렵에 배를 타고 각자 돌아갔으며, 당분간 움직이지 않을 걸세.”
“알겠습니다. 근데 정말로 그들이 다시 오지 않을까요?”
“이는 진 무사가 사자검문의 서 문주를 통해서 확인한 바이니, 틀릴 리 없을 거다.”
남궁경이 묻자, 냉군상이 진우선을 언급하여 이해시켰다.
“그 외의 인원들은 두 시진 후에 출발할 예정이니 준비해주게.”
진우선이 회의를 마치고 대전을 나왔을 때였다.
심오한 표정의 검노야가 진우선에게 말을 건넸다.
[허허. 천지무로절행진이라니, 쉽지 않겠구나.]
‘스승님. 그 진법을 알고 계십니까?’
[절대천뇌 동방무궁의 소문은 나도 들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그의 천지무로절행진으로 당시 정사마 가릴 것 없이 무수한 고수가 숨을 거두었으니 말이다. 그는 강호인을 증오했지.]
‘그래서 아무도 못 빠져나가게 진법을 만들었었나 봅니다.’
검노야는 천지무로절행진을 직접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 악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천지간의 이치가 어찌 흐름이 없겠느냐마는, 절대천뇌의 명성을 생각하면 그가 빈틈을 두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구나. 그러니 극에 오른 고수마저도 빠져나오지 못했을 테지.]
“아-!”
진우선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육합귀문진을 겪으며 진법에서도 기운의 흐름이 있는 걸 느꼈고, 제대로 대처해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여유 있었으면 파훼했을 터였다.
하지만 검노야의 설명을 들으면 마냥 그리 대처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검노야의 말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혹여나 잔백구유(殘魄九幽)의 귀역무간진(鬼域無間陣)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어젯밤의 육합귀문진은 그보다 많이 약해져 있어 사상자가 많지 않았지. 하지만 귀역무간진은 진에 빠져든 이들의 정기신을 뒤흔드니,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잔백구유의 귀역무간진이요?’
진우선이 너무나 놀라서 되물었다. 잔백마군이 너무나 연상되는 까닭이었다.
[나 역시 우선이 네 생각과 같다. 기억이 떠오르고 보니, 절대천뇌와 잔백구유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게 생각나는구나. 이제 와 생각이 나는 게 통탄하기 짝이 없다.]
어젯밤에 잔백마군은 간악한 수를 부려 궁가장 사람들을 몰살시키려 하며 도망쳤다.
진우선은 다시 그 상황을 맞아도 똑같이 행동할 터이나, 잔백마군을 완전히 베지 못한 게 지금 아쉬움으로 남고 있었다. 검노야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검노야와 대화를 하며 가고 있던 도중, 백하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진 무사님, 바로 임무가 이어졌습니다. 혹시 좀 쉬셨나요?”
“오전에 포구에 다녀온 뒤, 두세 시진 정도 푹 쉬었습니다. 백 책사님은 괜찮으십니까?”
“다행이네요. 저도 그쯤 쉬었어요.”
백하련이 진우선을 걱정하며 말을 이었다.
“내당주님은 아예 진 무사님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게 좀 불쾌했습니다. 사실 관 원주님의 내상이 가볍지 않은 상황이라 이해되긴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소속이 다르거든요.”
백하련은 맺고 끊음이 확실한 성격이었다.
냉군상은 소속이 다름에도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대화를 유도했다.
백하련은 상황상, 그리고 직급상 냉군상에게 대놓고 말하진 못했으나 이 일을 마음속에 담아둔 모양이었다.
“그러니 항상 지금처럼 다 승낙하실 필요는 없어요.”
“네, 잘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백하련이 조심스럽게 하나 더 물었다.
“그리고 정연서 소저와도 아는 사이인가요? 진 무사님을 보고 많이 놀란 눈치더군요.”
“호심당에서 종종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왜 그런 눈빛을 보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혹시 정 소저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할 게 있는 건가요?”
진우선은 백하련의 질문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금정대협이라 불리셨던 정인학 전전대 맹주님의 손녀입니다. 독고월 전 맹주님 바로 이전의 맹주님이셨죠.”
정무맹주의 계보는 대연신검 황우립 이후 금정대협 정인학이었고, 그 뒤가 독고월이었으며, 이제 탁신이었다.
“금정대협(金精大俠)께서는 금정천악선공(金天岳仙功)을 익히셔서 태산처럼 묵중하고 고요하신 분이셨는데, 사파의 거두에게 목숨을 잃으시며 맹주직이 독고 대협에게 이어졌습니다.”
“아! 그럴 수가!”
그렇다면 맹주직에 있던 와중에 죽은 모양이었다.
진우선은 문득 독고월의 모습이 겹쳐서 떠올랐다.
“사실 정 소저는 그분의 무공을 잇지 않았음에도 실력이 몹시 뛰어나 각주님께서도 영입을 고려하셨지요. 하지만 말수가 적고,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아 보류되었습니다. 어떤 의중인지 알기 어려운 까닭이었습니다.”
진우선은 정연서에게 다소 그런 면이 있다는 생각은 했으나, 대화마저 어렵지는 않았다.
“제게 어떤 부탁을 해올지 모른다는 말씀이시군요. 내당주님처럼 부탁할 수도 있으니까요.”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하련의 마음을 이해한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 무사님, 그럼 쉬시지요. 이따가 뵙겠습니다.”
***
두 시진이 지났다.
무인들이 출발하기 위해 대전 앞에 모여들고 있었다.
진우선도 거처를 나섰다.
그때, 정연서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진 공자, 오랜만이에요.”
“정 소저. 아까 와 계신 걸 보고 놀랐습니다.”
“진양각 십양에 속해 있거든요. 근데 저 역시 진 공자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정연서는 귀검 소무강의 부대에 속해 있었다.
“강소성에 임무를 나와 있었습니다.”
“들었어요. 진 공자의 명성과 활약을 듣지 못한 사람은 맹에 거의 없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정연서가 미소 짓자, 화사한 아름다움이 확 번져왔다.
“근데 진 공자, 그새 또 달라졌군요. 너무 놀랐어요.”
“제가 또 달라졌습니까? 이번에는 변한 게 없을 텐데요.”
호심당을 끝마쳤을 때, 정연서는 진우선이 대성을 이룬 것을 축하해주었다.
그녀는 너무나 놀랍게도 진우선의 변화를 느낌으로 알아챈 사람이었다.
“아니에요. 진 공자에게서 분명 거대한 산악의 신령한 향기가 느껴져요.”
“……!”
설마, 정연서는 진우선이 빙화곡의 만년괴암에게서 얻은 금기를 느꼈단 말인가.
“맞군요!”
정연서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 함께 그리운 한 사람이 생각나고 있었다.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