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잠 못 이루는 밤 (4)
궁가장을 압박하던 육합귀문진이 급격히 힘을 잃어갔다.
애초에 육합이 축을 이루어야 하는데 셋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진의 주인인 잔백마군마저 패퇴하니 빠르게 쇠락했다.
“크윽. 안 돼-!”
진법을 조율했던 망산귀가 고통에 신음하며 눈코입귀 칠공(七孔)으로 피를 흘려댔다.
귀기가 폭발한 순간, 육합귀문진의 진세를 조율하던 그에게 힘이 역류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 몸을 돌보기보다 잔백마군을 먼저 떠올렸다.
‘마군께서 큰 화를 입으셨다! 그렇다면!’
진세 안에서 다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에게 중요한 건 잔백마군이 도망갈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육합귀문진으로 진우선을 막아낼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자신도 몸을 내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귀폭멸(萬鬼爆滅)을 명하노라.
망산귀가 육합귀문진에 남긴 잔백마군의 뜻을 확고하게 수행했다.
퍼펑-! 퍼펑-! 퍼퍼펑-!
곳곳에 흩어져 있던 귀기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궁가장 내원에 키워냈던 거대한 귀기의 덩어리, 귀기옥괴(鬼氣玉塊)도 대폭발했다.
콰콰콰콰쾅-!
귀기옥괴에 어려 있던 수만의 귀화(鬼火)가 귀곡성을 뿌리며 마구 쪼개지고 터져나갔다.
끼이익-!
끼에에에엑-!
그 소리에 장내의 무인들은 심령이 오싹하여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더불어 귀기가 폭발하니 사방에 예측할 수 없는 기운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세차게 몰아치는 힘이 연쇄적으로 주변을 터뜨리고 부쉈다.
“컥!”
“크윽-!”
무인들이 마구 신음을 흘렸다.
귀기의 폭발이 육신과 심혼을 동시에 때려오니 정신을 둘 데가 없었다. 감각이 어지러워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폭발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끄에엑-!”
“키킥-!”
귀영들이 괴이한 소리를 흘리더니, 갑자기 몸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피와 살점들이 마구 튀었다.
괴기스러운 광경이었다.
“모두 적들에게서 떨어지시오! 당장!”
남궁경이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전황을 살펴 귀문탈백종의 귀영들을 잘 상대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건만, 창천대는 지금 귀기가 폭발하는 위기 속에 빠져 있었다.
‘안 그래도 피해가 막심한데!’
이래 가지고는 숙부인 남궁지철과 창천대가 몰살해 버릴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흘깃 보니 궁가장의 동서쌍무대 역시 처지가 비슷해 보였다. 귀무가 그들을 감싸고 있어 귀기에 잔뜩 노출되었고, 근처의 귀영들이 마구 터져나가고 있었다.
“얼른 피하라고-!”
남궁경이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하지만 너무나 급작스러운 상황에 서로 발이 꼬여 모두의 움직임이 잘 통제되지 않았다.
‘안 돼-! 전멸까지 가는 건 막아야 하는데-!’
안타까움에 소리쳤다.
“얼른 물러서! 얼른!”
바로 그때였다.
화아악-!
순백의 맑은 빛이 단박에 장내에 가득 찼다. 음영 진 곳 하나 없이 꽉꽉 들어찼다.
광명천하(光明天下).
이화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진우선의 검광이었다.
그 힘이 귀기를 살라먹고, 귀무를 그대로 증발시켰다.
모든 귀기가 소멸하고 있었다.
“와-!”
남궁경은 느닷없이 내려온 포근한 빛의 기운에 감탄만 나왔다.
빛에 의해 귀기와 귀화가 사라진 건 물론이요, 사방에서 폭발하고 있던 귀영들조차 그대로 사멸하고 있었다.
남궁경이 고개를 들었다.
빛이 내려와 갑자기 찾아온 고요의 순간에 상공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진우선!’
그가 쉼 없이 광륜검을 휘두르며 나아오는 중이었다.
그의 검에 만천하가 빛을 얻고 있었다. 그 광채가 참으로 신령스러웠다.
콰앙-!
흑도와 묵창이 맞붙던 곳에 새하얀 빛과 함께 막대한 기운이 내리꽂혔다.
“크아악-!”
그런데 비명을 지르는 건 흑도의 주인, 초무량뿐이었다.
묵창의 주인, 만총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뒤로 물러섰을 뿐이었다.
이는 빛의 기운이 철저히 마공만을 상대한 까닭이었다.
“네, 네놈은!”
초무량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눈앞에 나타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챈 까닭이리라.
“초무량. 당신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진우선! 이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네놈이 내 심정을 아느냐-!”
초무량이 악을 질렀다.
하지만 진우선은 초무량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뒤를 보고 있었다.
“총아, 수고했어.”
“하아-! 아직 한 끗이 모자라더라.”
만총이 씨익 웃었다. 군데군데 상처를 입은 채 온몸을 잘게 떨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네가 없었으면, 우리 사람들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을 거야.”
“고맙다.”
만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진우선의 등 뒤에서 초무량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감히 내 앞에서 등을 보이는 것이냐?”
진우선이 고개를 돌려 초무량을 노려보았다. 그가 섬전처럼 쇄도해오고 있었다.
이미 궁가장 내의 일은 모두 진압된 상태로, 망산귀마저도 귀무와 함께 산화했기에 남은 건 초무량뿐이었다.
하지만 초무량은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후웅-!
초무량이 흑도를 힘껏 치켜들었다.
그의 눈이 검게 변하며 흉흉한 흑광(黑光)이 뿜어져 나왔다.
이는 흑우신마의 진신절기인 흑혈마공(黑血魔功)을 십이 성까지 모두 끌어올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흑도여도 잠시는 버틸 것이다!’
천하의 명도인 흑우신마도만이 흑혈마공을 온전히 담아내고, 그 힘을 타고 더욱 강맹한 위력을 뿌릴 수 있었다.
흑도는 그에 비하면 다소 부족했다. 하지만 이 역시 귀한 흑철을 섞어 만들었기에 흑혈마공의 강렬한 공격을 얼마 정도는 감당해낼 터였다.
초무량은 그리 계산하며 흑혈마공의 절초로 진우선을 덮쳐갔다.
콰앙-!
진우선이 단박에 흑도를 쳐냈다.
광륜검에서 흑혈마공의 흑광과 확연히 대비되는 순백의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광륜의 오행진기가 검초에 실리고 있었다.
쾅- 쾅- 콰앙-!
순식간에 네다섯 초식을 나누었다.
그때였다.
힘껏 내리그은 광륜검에서 커다란 물레방아 같은 원형의 강기(罡氣)가 쏟아져 나왔다.
그 강기는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광(光)에 영(影)이 꼬리를 물고, 또 영에 광이 꼬리를 물어, 태극의 문양처럼 광영의 힘의 휘휘 돌았다.
일월광륜(日月光輪)의 초식이 만들어낸 강기의 고리, 강환(罡環)이었다.
쏴아악-!
진우선이 쏘아낸 일월광륜의 검초가 허공을 삭둑 자르며 초무량을 덮쳤다.
초무량이 흑혈마공을 잔뜩 끌어 올려 흑도를 마구 쳐냈다.
흑도에서 흑빛 마기가 줄기줄기 쏟아져 나와 일월광륜의 강환을 막아섰다.
스으읏-
회전하는 일월광륜이 흑혈마공의 마기를 가르며 파고들었다. 흑도도 단박에 두 동강 났다. 그리고 초무량의 가슴팍을 톱니처럼 마구 갈고 들어갔다.
“커헉-!”
초무량이 피를 토하며 뒤로 확 튕겨 나갔다. 일월광륜이 그를 십 장 밖으로 내동댕이친 것이다.
초무량은 궁가장 내곽의 담벼락에 철퍽 부딪히더니, 담장을 뒤로 왕창 무너뜨리며 그 자리에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곧장 몸을 날린 진우선이 초무량 앞에 내려섰다.
“크윽……!”
초무량이 신음을 흘리며 온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그러더니 한마디 흘렸다.
“내 도만 있었어도…….”
“당신의 도는 내가 잘랐습니다.”
“아니…… 내 도가 아니어서…….”
초무량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흑우신마도에 대해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심히 떨리는 눈동자로 진우선에게 원망을 쏟았다.
“너, 너는 정말…… 너 때문에…….”
그 말을 하던 중 초무량의 숨이 멎었다.
진우선이 물끄러미 초무량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저편에서 지켜보던 백하련과 제갈영, 냉군상을 비롯한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끝났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
밤이 지나가고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불과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짙은 암운에 숨을 죽인 채 가슴을 졸이고 있었는데, 천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아오고 있었다.
“참 긴 하루였어요. 진 무사님.”
백하련이 지난 하루를 기록으로 남기다가 주변을 둘러보고 온 진우선을 마주했다.
“책사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숨도 못 주무셨군요.”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는 침상에 누워봤자 제대로 잠들지도 못해요.”
“하긴, 그렇습니다.”
“감사해요. 진 무사님 덕분에 꼬박 하루 동안 벌어진 상황들 속에서 잘 헤쳐 나올 수 있었어요.”
백하련이 진우선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사자검문의 급보였던 서도광의 이남 서륜의 죽음, 그들이 쳐들어와 포구에서 맞상대한 일, 궁표가 죽고, 귀문탈백종이 궁가장을 습격한 일까지, 모든 게 꼬박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와중에 온힘을 다해준 진우선이 아니었다면, 상황을 명쾌히 해결하지 못했으리라.
백하련은 보고서를 쓰며 그 사실을 재차 확인한 상태였다.
“그나마 이 정도 피해로 그쳐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정무맹의 누구라도 저처럼 했을 겁니다.”
진우선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하련은 그런 진우선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 무사님. 그런데 만 소협의 무위가 원래 이 정도였나요? 관 원주님보다 대단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감탄했습니다. 총이와는 비무를 종종 했었는데, 몇 달 전과 며칠 전의 모습이 확 달랐었지요.”
“그렇군요. 저도 각주님께서 눈 여겨보시는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어요. 하지만 이번에 내당 사람들도 그의 진면목을 보았으니, 만상각으로 데려오기가 쉽지 않으실 거 같네요.”
백하련은 이미 머릿속에 공야청의 모습이 그려지는 모양이었다.
진우선이 다른 한 사람의 이름도 꺼냈다.
“한 무사님도 대단하셨습니다. 얼핏 보니 눈물을 흘리며 도를 쓰셨더군요.”
“예전에 친분이 꽤 깊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한 무사님은 이제 마음에 뜻을 세우셨지요.”
그래서 도강도 피워낼 수 있었으리라.
백하련은 정체되어 있던 한효기의 실력이 확 상승한 걸 목격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지난 하루를 되새기며 긴장을 풀고 있을 때였다.
남궁경이 그들을 찾아왔다.
“당주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연주지부에서 급보를 전해왔습니다. 염성방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아! 염성방! 뭔가 놓친 게 있다 싶더라니…….”
백하련이 탄식하더니, 곧장 대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우선과 백하련이 대전에 도착하자, 지친 얼굴의 냉군상이 소식을 전했다.
“연주지부에서 방금 온 소식에 의하면, 사도련에서 많은 전력을 이끌고 와 염성방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고 하네.”
“어느 정도입니까?”
백하련은 내당주가 잠시도 쉬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맞는 것에 상당히 심각함을 느끼고서 물었다.
“염성방이 방을 지키기 위해 절진을 발동시켰네. 동곽 선생이 염성방에 있었다더군.”
“만유노사 동작소 선생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만유노사(萬儒老士) 동곽소는 천하의 지자(智者)로 이름이 높았는데, 특히 진법과 병법 등에서 천하에 내로라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방랑벽이 있어 한곳에 잘 정착하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염성방에서 절진을 발동시켰다니.
놀랄만한 사실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백하련은 가장 중요한 바를 곧장 물었다.
“왜 절진을 발동시켰다고 합니까?”
“우리는 염성방이 천년설삼을 가진 줄 알았는데, 사도련이 노리는 것은 사실 만년삼왕인가 보더군.”
“만년삼왕!”
백하련이 너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만년삼왕(萬年蔘王)은 천년설삼 몇을 가져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삼의 왕이었다.
“전설이 아니었습니까?”
“아니니까 환사문이 대거 나선 거겠지.”
“그럼 사자검문의 서 문주가 거짓 정보를 흘린 거였군요.”
백하련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
냉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좀 더 명확한 정보가 필요하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임의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더군.”
냉군상이 그 말과 함께 눈길을 옆으로 주었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진우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