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잠 못 이루는 밤 (2)
귀기가 안개처럼 궁가장에 스멀스멀 들어오고 있었다.
픽-! 픽-!
외곽의 담장 아래 피워둔 등불들이 꺼졌다.
어둠이 더욱 짙게 다가왔다.
“내곽의 불들을 지켜라!”
궁목철이 시야 확보를 위해 빠르게 외쳤다. 그에 궁가장의 식솔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의 뒤에서 진우선이 제갈영에게 물었다.
“제갈 책사님, 이게 육합귀문진이 맞습니까?”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해요. 그저 칠 년 전쯤 강서성 태화보(泰和堡)가 귀문탈백종에 멸문되고 자리를 내줬다는 기록을 확인했을 뿐이에요. 그들이 처음으로 육합귀문진에 당했어요.”
진우선의 물음에 제갈영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육합귀문진이 맞네.”
그때 뒤따라 나온 냉군상이 답을 건네더니, 냉철하게 주변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미 귀기로 커다란 원을 만들어 진을 형성하여 포위한 채 다가온 모양이군.”
냉군상은 핏기 하나 없는 초췌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정신력과 초인적인 의지로써 지금의 상황에 임하고 있었다.
“냉 당주, 괜찮겠소? 쉬는 게 나을 것으로 보이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지금 수많은 목숨이 걸려 있는데, 잠시 싶다고 한들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다만 당장 제가 육합귀문진에 대응할 진법을 펼칠 힘이 부족하니, 어찌 해야 할지…….”
“다른 방도는 없소이까?”
궁목철의 물음에 냉군상이 곧장 제갈영과 백하련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갈 책사와 백 책사는 혹시 칠성둔형진(七星屯形陣)을 펼칠 줄 아는가?”
“당주님, 저는 지금 바로 펼치지 못합니다. 몇 시진은 걸릴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갈영과 백하련이 난색을 보였다.
“혹시 남궁 무사는?”
“진법에는 배움이 짧아 칠성둔형진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남궁경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혹시 아는 사람 있소?”
“…….”
장내에 적막이 흘렀다.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냉 당주. 아무래도 그냥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구려. 칠성둔형진이 없으면 많이 곤란하오?”
“칠성둔형진은 칠성의 방위를 축으로 삼아 귀기의 흐름을 늦출 수 있는데, 급속히 펼쳐낸다면 그 위력이 온전하진 못해도 저들을 상대할 만은 할 겁니다. 한데 그것도 없다면, 우리는 눈을 뜨고도 코를 베이는 꼴이 됩니다.”
“허어-! 큰일이군.”
“육합귀문진이 하늘과 땅, 그리고 사방의 여섯 곳에서 귀기의 힘을 크게 북돋아 주는 진법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신출귀몰해지는 것은 물론이며, 우리의 시야마저 가려버리게 되지요. 그럼 우리는 진세에 눌려 적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고 당하는 상황을 맞을 것입니다.”
“그 정도라면, 실로 단단히 각오해야겠구려.”
궁목철이 단호한 눈빛을 보이며, 단박에 흑우신마도를 뽑았다.
“가주님께서도 싸우실 생각이시군요.”
“내 아들 표를 살해한 적들을 눈앞에 두고 어찌 칼을 뽑지 않을 수 있겠소? 비록 상황이 여의치 않고 내 실력도 천하에 이름을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오는 적들마저 피할 생각은 없소.”
냉군상이 궁목철의 의지를 존중하여 고개를 끄덕인 뒤, 정무맹의 무인들에게 재빨리 명했다.
“남궁 무사는 세가에서 온 남궁 대주님과 창천대를 살펴주게. 귀문탈백종을 상대할 우리의 주력이라네.”
“알겠습니다. 대주님을 잘 보필하겠습니다.”
창천대주 남궁지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궁목철도 궁가장의 동서쌍무대를 불러 창천대와 함께 배치했다.
그다음으로 냉군상이 관무평에게 말했다.
“관 원주. 자네가 가주님을 도와서 적들을 상대하게. 육합귀문진을 펼쳐서 우리의 정신을 빼놓는 사이, 흑우신마의 후손은 도를 찾으러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체는 초무량이리라 예상되네. 주의하게.”
“그였군요. 반드시 이길 겁니다.”
냉군상의 나지막한 말에 관무평이 의지를 불태우며 대답했다.
관무평에게 초무량은 호적수였다. 각기 내당과 만상각에 속하여 소속은 달랐으나, 실적과 경력, 명성 등은 비슷했다. 그래서 때론 비교하여 질시하고, 때론 동질감도 느꼈었다.
‘이참에 반드시 그를 꺾는다!’
궁목철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초무량이었군. 만상각에 있었다던 첩자가. 그리 강한 자였을 줄이야.”
“맹의 정보가 부족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사과는 되었소. 오히려 냉 당주의 충격이 더 컸겠지.”
그렇게 궁목철과 냉군상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백하련도 한효기와 만총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있었다.
“한 무사님이 저를 비롯해 후위에 있을 사람들의 호위를 총괄해 주세요. 만 소협이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다들 결연한 기세로 전투에 임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냉군상의 눈앞에 갑자기 진우선의 신형이 나타났다.
“당주님. 잠시만요.”
“진 무사, 왜 그러는가? 할 말 있는가?”
“잠시 궁가장을 한 번 돌아보고 왔는데, 어쩌면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벌써? 그리고 어떻게?”
냉군상이 놀란 눈으로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궁목철과 대화하느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가 움직인 모양이었다.
“제가 돌아보니, 아까 말씀해주신 것처럼 귀기의 여섯 축이 어렴풋이 느껴졌습니다. 일단 한 축을 흐트러뜨리고 왔는데, 저들이 당도하기 전에 한두 곳은 더 다녀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그럼 그렇게 해 주시오. 근데 저들이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천마교의 커다란 기운 셋이 반 각(약 7~8분) 후면 당도할 것입니다.”
“허-!”
“이럴 수가!”
냉군상의 물음에 진우선이 답하니, 좌중이 술렁거렸다.
진우선이 육합귀문진의 힘을 살피는 것만이 아니라 약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는데, 그에 더해 천마교의 고수를 알아채고 그들이 올 시각까지 정확히 말한 까닭이었다.
그 덕분에 여태껏 걱정했던 것 중 상당수가 단숨에 해결되었다.
“진 대협! 고맙소. 실로 어마어마 한 능력이구려. 대협이 우리와 함께 해서 천만다행이오.”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육합귀문진의 힘이 절대 가볍지 않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진우선에게 고마움을 드러낸 궁목철이 그의 말대로 무인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진우선은 일행에게 그 말을 남기고서 다시 전각 뒤로 휙 날아갔다.
***
세 사람이 귀기가 서린 궁가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궁가장의 구조도 귀문진을 펼치기에 나쁘지 않았군. 염성방만 탐났었는데 말이야.”
“그렇습니까? 어쩐지 귀기가 빨리 감돈다 했습니다.”
“하지만 벌써 육방 중 두 축이 무너졌어. 저들이 육합귀문진에 이리 빠르게 대처했을 리는 없을 텐데.”
백의백발백안(白衣白髮白眼)의 사내가 귀화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역시 진우선의 짓이겠군. 대단하구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육합귀문진으로는 그의 눈을 가릴 수 없었어.”
“마군. 즐거운 모양이십니다.”
“내가 그랬나? 육합귀문진을 어떻게 보완하면 좋을지 생각했으니,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군.”
육합귀문진은 칠 년 전에 만들어 낸 절진으로, 귀영들의 힘을 한층 더 배가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극경에 이른 고수의 이목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쉽군. 귀영이 오륙십 정도만 더 있었으면 그걸 펼쳐볼 수 있었을 텐데.”
“또 생각해두신 게 있었군요.”
“늘 더 발전시킬 생각을 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 우도, 자네는 그렇지 않나?”
“저도 그렇습니다. 도를 되찾을 생각을 하니, 벌써 흥분됩니다.”
마군과 우도가 궁가장으로 빠르게 접근하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한 노인이 말없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니 마군께서 진우선을 잘 맡아주십시오.”
“일 각이면 어떻겠나?”
“충분합니다.”
“자네의 기세가 좋군.”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우도가 궁가장 내부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한 노인이 곧장 뒤따랐다.
마군은 그와 반대로 멈춰서더니, 궁가장의 상공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귀화를 흘리는 그의 백안이 점점 더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화르르-!
맹렬히 타올랐다.
귀린마염공(鬼燐魔焰功)이었다.
그와 함께 마군의 입이 열리며 심혼을 찢는 듯한 귀부의 소리가 울렸다.
-모든 귀(鬼)는 들어라. 잔백마군(殘魄魔君)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구천의 깊은 한을 터트려……
***
궁가장에 안개와 흡사하게 귀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육합귀문진이 피워내는 귀무(鬼霧)였다.
본래라면 귀무 속에서 적들의 형체는 보이지 않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귀무 속에서 귀화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스악!
다가오는 귀화를 향해 검을 그어 내렸다.
‘없어?’
남궁경이 당혹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정확히 보고 베었는데도, 헛손질이 난 까닭이었다.
그러다 문득, 등줄기가 섬뜩했다.
‘좌측!’
생각과 동시에 왼발을 뒤로 빼며 즉각적으로 반격을 날렸다.
“컥!”
적의 가느다란 비명이 들렸다. 방금 전 다가왔던 귀화의 주인이 나가떨어지는 게 보였다.
‘이게 약화된 거라니!’
귀영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귀무 속에서 그들은 허상과 실체가 공존했다. 감각을 속이며 다가오는 까닭에 제대로 직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육합귀문진의 두 축이 무너지며 약화된 상태라는 점이었다.
‘본래대로였다면, 두 눈을 뻔히 뜨고서도 당했겠군.’
육합귀문진의 온전한 위력을 상상하자, 남궁경은 온몸이 오싹해져 왔다.
그나마 싸울만한 상황이 된 게 다행이었다.
‘진우선의 실력은 정말 어마어마 하구나! 만에 하나 그가 없었다면…….’
남궁경은 진우선에게 경외감이 들었다. 그를 좋아하지는 않으나, 순식간에 육합귀문진의 두 축을 무너뜨린 점마저 무시할 순 없었다.
문득 진우선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어디 있지? 어떤 모습으로, 누구와 싸우고 있을까?’
남궁경이 주변을 살피다가 위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허공의 귀무가 한층 걷히면서 섬전처럼 쏘아져가는 한 인영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번째 축을 허물고 왔습니다. 다들 힘내십시오!”
한편.
캉-! 카아앙-!
도와 도가 맹렬히 충돌했다. 충격파가 주위로 팍팍 터질 정도였다.
하지만 도를 든 두 사람은 그에 아랑곳할 틈이 없었다.
그러던 중 또 한 번의 강렬한 격돌과 함께 둘의 거리가 오 장가량 벌어졌을 때, 청의도객이 입을 열었다.
“무평, 실력이 많이 좋아졌군. 수련을 쉬지 않은 모양이야.”
“초무량! 주둥이 닥쳐라!”
“닥치라고? 왜?”
“몰라서 묻느냐? 네놈을 호적수라 여겼거늘, 천하의 말종인 마두였을 줄이야! 함께 이름이 불렸던 내 명예까지 썩어들고 있어!”
“크큭!”
청의도객 초무량이 슬쩍 비웃더니, 옆에 주저앉은 채 피를 게워내고 있는 궁목철을 보았다.
“그깟 명예가 뭐라고. 내 도를 찾을 수 있다면 명예 따윈 상관없어. 아니, 명예야말로 허례허식에 불과한 거지.”
“닥쳐라! 네놈이 천인공노할 흑우신마의 후손이었다니!”
관무평이 대노하여 외쳤다.
초무량이 그를 더 자극했다.
“십방도객의 도법이 이 정도였던가? 네 스승보다 못하군.”
“나를 자극하지 마라!”
“내가 왜 자극을 해? 사실인걸!”
“설마?”
“그 답은 저승에서 찾을 수 있을 거다!”
관무평의 두 눈이 심히 시뻘게졌다. 그러더니 이성을 잃은 듯이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한 인형이 잠시 그들의 사이에 내려섰다.
“관 원주님. 이성을 찾으십시오. 귀기가 깃들었습니다.”
맑은 음성과 함께 내려선 사내, 진우선이 관무평의 맥을 잡더니 약간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관무평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고맙소.”
하지만 진우선은 그 말을 들을 새도 없었다. 백하련이 진우선을 급히 찾은 까닭이었다.
진우선은 고개를 돌려 초무량을 일별한 뒤 다시 신형을 움직였다.
“진 무사님.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적들이 다 들어온 것입니까?”
“세 번째 축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아직 다 온 게 아닙니다. 그는 지금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봐야겠습니다.”
“그가 누구죠?”
“아마도 육합귀문진의 주인인 것 같습니다.”
진우선이 그 말과 함께 신형을 훌쩍 날렸다.
백하련이 심히 떨리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잔백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