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47화 (147/225)

147.

#잠 못 이루는 밤 (1)

“나는 얼른 비고에 다녀와야겠소. 다들 고생 많으셨을 텐데 좀 쉬시오. 장원을 정리하느라 번잡할 수도 있는데, 그건 양해해주길 부탁드리오.”

“알겠습니다.”

궁목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이지만 궁가장의 식솔들이 쉴 새 없이 바쁘게 장원 곳곳을 정리하고 보수하기 시작했다.

정무맹과 남궁세가 일행도 접객당으로 돌아와 각자의 처소로 들어갔다.

그런데 잠시 후, 만상각이 머무는 전각에 냉군상이 찾아왔다.

“다들 아직 안 자고 여기 모여 있었군.”

“내당주님, 오셨습니까?”

방 안의 만상각 인원 중에서 그나마 꽤 마주친 적 있는 백하련이 대표로 냉군상을 맞이했다.

“전할 말들이 있어서 왔소.”

“무엇입니까?”

“일단 진 무사, 조금 전에 귀문탈 백종의 암수를 파훼해줘서 고맙소. 궁 가주님도 꼭 감사를 전해달라더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포구에서도 그렇고, 진 무사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귀문탈백종의 술수에 완전히 놀아났을 거요. 내가 아무리 그들의 짓이라 말해도, 상대가 내 말을 믿지 않으면 끝이니 말이오.”

“이 일에는 진 무사님의 공이 정말 큽니다. 현장에서 붙잡은 까닭에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백하련이 냉군상의 말에 살을 붙이며, 진우선의 공을 추켜세웠다.

하지만 냉군상은 그 말을 더 잇지 않은 채, 빠르게 다음 화제를 꺼냈다.

“백 책사, 물어볼 게 있네. 최근에 초무량의 행적이 어찌 되나?”

“한동안 맹이 사도련과의 일전에 집중했을 때, 그가 천마교와의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습니다만…… 설마?”

백하련은 냉군상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듣는 걸 보다가, 섬뜩한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맞네. 궁가장에서 발견된 인장이 그의 것이었네.”

“헛! 어찌 그럴 수가!”

한효기마저 기겁하여 놀랐다.

“나도 인장을 확인하다가 놀랐네. 귀문탈백종의 기운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초무량의 모습까지 얼핏 보였으니까. 오늘 낮에 말이야.”

“그가 이 근처에 와 있다는 말이군요.”

“아마도 우리가 사자검문을 맞으러 포구로 갔을 때, 궁가장 쪽으로 향한 모양이더군.”

냉군상과 백하련이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서로 한마디만 해도 속뜻마저 척척 알아차리고 있었다.

냉군상이 진우선에게 물었다.

“진 무사, 이번에 첩자를 색출할 때 그도 확인했었소?”

“아닙니다. 서로 임무가 겹친 까닭인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마공을 익혔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방도가 없다는 뜻이군.”

냉군상이 중얼거리며 다시 백하련을 보았다.

백하련이 말했다.

“숨기고 있었나 봅니다.”

“첩자라면 원래 그렇지. 아니면 맹 노사처럼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익히고 있었다거나.”

“하긴, 첩자로 들어와 있었다면, 귀문탈백종이기보다는 흑암무영종일 확률이 훨씬 높으니까요.”

“동감이네. 그에게서 귀기가 느껴졌으면 인장을 살펴볼 때, 간과했을지도 모르지.”

냉군상과 백하련의 대화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백하련이 곧장 대책을 꺼냈다.

“진 무사님, 초무량은 백무원에서 무원주님 다음가는 고수예요. 만약 그가 나타난다면 진 무사님께서 맡아주세요. 그리고 그는 도를 써요. 어쩌면 흑우신마도는 그가 가장 원하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알겠습니다.”

“잠깐만.”

냉군상이 고개를 저으며 반대의 뜻을 드러냈다.

“이 사태가 만상각에서 비롯되었는데, 만상각에서 나온 첩자마저 만상각에 맡기는 건 좀 그렇군.”

“진 무사님은 그를 만난 적이 없으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를 제압할 사람은 진 무사님밖에 없습니다.”

백하련이 어느새 초무량을 ‘그’라 칭하며 물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만, 이 일은 우리가 맡도록 하지. 관 원주에게 맡기는 게 좋겠어.”

“관 원주님은 그와 실력이 비등한 정도 아닙니까? 혹시 최근에 무위가 더 높아졌나요?”

“아니, 만상각에 대한 혐의를 완전히 벗겨낼 수 없기 때문일세. 만상각에 또 다른 첩자가 있을지 지금은 알 수가 없지. 또한, 직전까지 같은 소속이었다는 데서 오는 유대감 같은 게 허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진 무사님이 그럴 리 없어요!”

“진 무사는 나도 믿네. 하지만 백 책사와 한 무사는 초무량과 함께 보낸 시간이 있으니…… 어쨌든 만전을 기할 수밖에. 만약 그가 백 책사를 인질로 삼는 등의 일이 벌어지면 어쩔 셈인가?”

“…….”

백하련이 선뜻 답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상황이 어찌 흘러갈지 쉽사리 예측하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물론 극경에 오른 진우선이라면 어떻게든 상황을 풀어낼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한 점의 허술함도 용납지 않겠다는 신기수사 냉군상의 뜻이 강하게 담겨 있었다.

‘이에 더불어 만상각도 견제하려는 거겠지!’

백하련은 차마 밖으로 말할 수 없으나, 이 이유가 훨씬 클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냉군상이 자신의 결정에 쐐기를 박듯이 질문을 더 던졌다.

“초무량 정도면 백혜원에 전담하는 사람이 있었을 텐데, 누구인가?”

“고명경 책사가 전담해왔습니다.”

“고명경? 그럼 그녀도 첩자일 확률은 없나?”

“백혜원은 모두 확인했었고, 특별히 이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르지, 정확한 것은. 백혜원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럴 리 없습니다. 오 년 가까이 알고 지내오는 동안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완벽하게 확신하나?”

“…….”

사실만 지적하며 압박해오는 냉군상의 말에 백하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만상각은 천마교에게 유독 피해가 잦았지. 이래서였는지도 모르겠군.”

“그건 정말 아닙니다!”

백하련이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냉군상을 노려보았다.

이에 냉군상도 더는 백하련을 자극하지 않았다.

“아무튼, 초무량이 온다면 우리가 상대하도록 하지. 그리고 진 무사는 귀문탈백종의 수괴를 맡아주게. 그가 귀문탈백종의 귀영들을 마구 부릴 순 없을 테니, 아마 그들이 온다면 귀문탈백종의 고수가 섞여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고맙네. 어쩌면 밤이 길어질지 모르겠군. 다들 조금이라도 쉬어 두게.”

냉군상이 그렇게 말을 마치고서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백하련이 방 문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당은 실수 하나도 안 하는 것처럼 말하네요. 그들이야말로 실수투성이인데.”

“책사님, 고생하셨습니다.”

진우선이 백하련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에요. 제가 여러분께 부끄러운 꼴을 보였네요. 게다가 만 소협께서는 만상각이 처음이실 텐데요.”

“저는 괜찮습니다. 만약 내당주가 저마저 끌어들여서 말했으면 백 책사님만 더 고생하셨을 겁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두 분 모두 고마워요.”

백하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진지한 얼굴로 지금의 형세를 전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아직 밤이 끝나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천마교가 궁가장을 노리는 이유가 드러났고, 흑의인도 사로잡았으니까요. 물건을 빼앗든 그를 구하든 하려면, 다소 어수선한 지금이 적기예요.”

***

“주군. 정무맹이 궁가장으로 돌아왔음에도, 지옥귀가 반 시진(=1시간)째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로잡힌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좀 전에 포구에서 진우선에 의해 잠복해 있던 귀영 둘이 발각 당했다고 하니까요. 궁가장에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귀기도 느끼는 걸까? 정말 능력이 신기막측해. 알면 알수록 놀라워.”

눈을 감은 채 보고를 듣던 백발의 사내가 흥미를 드러냈다.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단조로웠으나, 감정은 진짜인 듯했다.

“주군, 지옥귀를 어쩌시겠습니까?”

보고하던 학사풍 중년인의 말에 백발의 사내가 잠시 고심했다.

“흐음. 이대로 보내기는 아까워. 귀영이야 귀(鬼)를 새로 심으면 되지만, 그렇게 열정적인 아이는 키워내기 어렵겠지.”

“그럼 구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귀영이 육칠십 있으니, 궁가장에 육합귀문진(六合鬼門陣)을 펼쳐라.”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그건 망산귀 네게 맡기지.”

학사풍의 중년인, 망산귀가 눈에서 귀화를 흘리며 고개를 숙이더니, 자리를 떴다.

백발의 사내가 고개를 돌려 한쪽 편에 앉아 있는 한 도객과 한 노인을 보았다.

“우도. 이번엔 네가 직접 가야겠다.”

“들었습니다. 이번엔 직접 나설 참입니다. 오늘 밤이 아니면 회수가 더 어려울 테니까요.”

우도라 불린, 푸른 옷을 입은 도객이 묵직한 저음으로 대답했다.

“근데 흑우신마도가 네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 그곳에 있는 것까지도.”

“저도 간신히 종적을 찾아냈습니다. 침투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겁니다.”

“그렇지. 그때는 우리의 세가 약했던 때니까. 뭘 기록하지도 못했어.”

백발의 사내의 음성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청의도객 우도는 그 속마음을 알아챈 듯이 대답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마군께서 이렇게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담담해 보이는군. 우도(雨刀)라 해서 눈물이 많은 줄 알았더니.”

“저 역시 마군께서 걸으신 무정마도를 걷고 있습니다. 우도는 흑우신마도를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을 뿐입니다.”

“그랬군. 좋아.”

무정마도(無情魔道)는 감정을 배제하여 마의 극을 깨달아가는 길을 일컫는 말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무정마도에 속한 마공을 연성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공은 다 수습했나?”

“조부님보다 나을 겁니다.”

“그간 잘도 참고 살았군.”

“하지만 오늘은 펼쳐야 할 때입니다.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기대하지.”

우도가 밀실에서 빠져나갔다. 한 노인도 그를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그때, 백발의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사아악-!

시리도록 새하얀 눈동자에서 귀화가 빛살처럼 뻗쳐 나왔다.

머리카락도 허공으로 마구 치솟아 오르며 은빛으로 빛나기까지 했다.

인세의 혼백을 다 잡아먹은 유령의 모습이 이러할까.

백안백발(白眼白髮) 사내의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가 어색하게 히죽 웃으며 한마디 되뇌었다.

“진우선…… 불과 일 년 새에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군. 강호가 참으로 재밌어졌어.”

***

“이 도 때문에 표가 목숨을 잃었다니…… 허허-!”

궁목철이 새까만 칼, 흑우신마도를 들어 보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맞아. 그래서 내 실력에 도움이 되라고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셨었지. 사실 흑우신마도인 줄 알았다면 우리는 당장 내다 버렸을 거야.”

“하지만 말해주기 전까지는 못 알아보겠습니다. 마병(魔兵)들은 마기가 섬찟하게 배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이지요.”

“자네 말대로군. 마기는 어려 있지 않은 것 같아.”

“사실 마기가 깃들어 성질이 변해버리는 게 있는가 하면, 마기가 깃들어도 세월이 흐르며 제 모습을 찾는 것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후자가 더 좋은 거라 생각합니다. 흑우신마도처럼요.”

“그렇군. 그래서 우리 집에도 화가 미쳤군.”

궁목철의 생각은 계속 아들 궁표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애써 적을 대비하고 있으나, 속마음은 마구 찢기고 있으리라.

“슬픔을 제가 다 덜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겠는가? 어쨌거나 내 업보인 것을.”

궁목철이 자조 섞인 표정을 짓다가 부러운 눈으로 남궁경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남궁세가에 자네 같은 박식한 청년이 있었군. 그리 말해 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남궁경이 궁목철의 칭찬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궁목철이 안쪽으로 다가가며 탁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냉군상을 바라보았다.

“냉 당주, 할 말이 있다고 들었소. 무엇이오?”

“흑의인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냉군상이 천천히 눈을 뜨며 대답했다.

“흑의인은 누구였소? 목적도 알아냈소?”

“그는 귀문탈백종의 지옥귀였습니다. 우리가 예상한 대로 흑우신마도를 노린 바가 컸습니다. 흑우신마의 후손이 천마교에 있었습니다.”

“허-! 그랬군. 고맙소. 근데 냉 당주가 심히 애쓴 모양이구려. 좀 쉬지 그러시오?”

궁목철은 냉군상의 안색이 병자처럼 파리한 것을 보았다. 매우 무리한 게 틀림없었다.

“가주님, 그럼 거절 않고 좀 쉬겠습니다. 저희가 회의를 다 마쳤으니, 제갈 책사가 말씀을 전해드릴 겁니다.”

“알겠소.”

냉군상이 다시 눈을 감았고, 궁목철이 제갈영을 바라보았다.

“가주님, 지옥귀는 귀문탈백종의 종주 잔백마군의 심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십중팔구 궁가장으로 다시 쳐들어올 겁니다. 또한, 흑우신마의 후손도 여기까지 온 마당에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요.”

“그럼 언제라고 보시오?”

“아마도 오늘 밤이 가기 전에 다시 올 겁니다. 한두 시진 내로요.”

“허허-!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는군.”

“천마교가 우리를 배려해주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바로 그때였다.

진우선을 위시한 백하련과 한효기, 만총이 대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지금 천마교에서 많은 수가 궁가장에 접근해왔습니다. 특히나 귀문탈백종의 기세가 강합니다. 바로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런!”

궁목철이 탐탁지 않은 마음에 역정을 냈다.

하지만 진우선의 말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리고 귀기가 궁가장을 뒤덮고 있습니다. 여길 에워싸려는 느낌인데, 마치 진법 같다고 의견이 모였습니다. 혹시 아십니까?”

“…….”

다들 답을 쉬이 하지 못했다.

그때, 제갈영이 창백해진 얼굴로 한마디 내뱉었다.

“설마…… 육합귀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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