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44화 (144/225)

144.

#강소풍운 (5)

아침이 찾아왔다.

접객당의 한 방에 세 사람이 부리나케 모여들었다. 진우선과 백하련과 한효기였다.

“제가 이른 아침부터 모이시라고 한 건, 새벽에 급보가 전해진 까닭입니다. 간밤에 사자검문의 둘째 아들이 숨을 거두었는데, 방에서 만상각의 인장이 발견되었습니다.”

“허~! 그럼 사자검문이 발칵 뒤집혔겠군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사자검문주 서도광은 혈사자(血獅子)라 불릴 정도로 성정이 불같으며 잔혹하기로 유명해서, 곧 소주를 나서리라 보이고요.”

백하련이 차분한 눈빛을 보이며 침착하게 말했다.

백하련은 언제나처럼 얼굴이 새하얗고 옷도 순백색이라 완전무결해 보였는데, 이와 대비되게 눈빛이 짙고 무거우니 상당한 안정감도 주고 있었다.

진우선은 그녀에게 절로 신뢰가 가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런데 만상각의 인장이 동시에 두 개나 나타날 수 있습니까?”

“만상각에서 근래에 회수하지 못한 인장이 두 개입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사도련 측에서 하나, 천마교 측에서 하나를 입수했을 거로 보고 있고요.”

“헛!”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한효기조차 급히 숨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백하련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정황상 천마교와 사도련 둘 다 이번 사태에 관련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진우선이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책사님, 혹시 회수하지 못한 인장이 그 둘 외에는 더 없습니까? 그리고 그들 중 한쪽에서만 일을 벌였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일단 제가 들은 건 두 개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만상각의 누군가가 외부와 결탁했다면 말이지요.”

“설마?”

“진 무사님이 이번에 첩자들을 색출해주셨지만, 아시다시피 모두를 살피진 못했으니까요. 특히, 만상각의 여섯 분이 그 시기에 임무 중이라서 진 무사님과 만나지 못했습니다.”

백하련이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첩자까지 고려해야 하는 경우라면 단 하나입니다. 첩자는 진 무사님이 계신 만상각에 어차피 돌아올 수 없으니, 이번 음모에 인장을 사용했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최악의 상황이고 말입니다.”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백하련의 설명을 완전히 이해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 무사님, 만약 백무원 출신의 사람이 적으로 나타난다면 바로 알려주십시오. 만상각에서 칠 년을 계셨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알겠습니다, 책사님.”

한효기가 백하련의 말을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이건 계략을 펼치는 수단과 방법의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게 있습니다. 사자검문이 염성방을 압박한 게 정말 사도련주의 기세를 등에 업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일까요?”

“책사님은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시는군요.”

“강소삼정 정도가 되면 한 달 수익이 기본적으로 몇 만 냥일 겁니다. 그 이상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벌써 한 달 반이 되어 가는데, 사자검문은 자신들의 행동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분명 그 손 해를 감수할 만한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

진우선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에 말문도 채 열지 못했다.

백하련의 통찰력이 대단했다.

강소성에 불어닥친 일대 풍운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건만, 백하련은 이 와중에도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감춰지고 있을지 모를 근 본적인 원인을, 그녀는 정확히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니 진 무사님께서 강소성의 상황을 진정시키는 와중에 이것도 알아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화동일검과 혈사자가 있고, 암중에 또 누가 있을지 몰라 너무나 어렵겠지만, 진 무사님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씀조차도 꺼낼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꼭 염두에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하련의 간곡한 부탁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총이도 이번 일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책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혈련화를 쓰러뜨린 만 소협 같은 고수가 도와주신다면 감사하지요. 진 무사님이 회의한 내용을 잘 전달해주세요.”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혈련화라면 수라객의 사저를 말하는 것입니까?”

진우선은 일전에 수라객을 쓰러뜨린 이후, 혈불의 네 제자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혈불의 셋째 제자가 수라객이고, 둘째 제자가 혈련화였다.

“맞습니다. 혈련화를 수라객과 비교해본다면, 아무래도 그녀가 무공이나 심기에서 한 수 앞선다고 말할 수 있고요. 그래서 각주님도 만 소협을 눈여겨보신 모양입니다. 아, 이건 전하지 말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회의에는 총이도 데려오겠습니다.”

백하련이 진우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이후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제 제 생각은 다 전한 것 같습니다. 아침에 사자검문의 소식을 들은 내당주님이 곧장 염성방 남경지소로 가셨으니, 돌아오시면 그때 우리의 역할도 논의하면 될 거 같아요.”

“사자검문으로 바로 가는 게 아니었군요.”

“네, 맞아요. 그건 제가 아니라 내당주님이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분이 이곳에서의 일을 주관하실 테니까요.”

백하련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당주님의 방법도 들어 보고 결정하는 게 좋습니다. 내당주님은 신기수사(神機秀士)라 불릴 정도로 신묘한 기략을 펼치시는데, 그 방법이 저와는 아주 다르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천하의 큰 이치를 깨달았다고 알려진 만큼이나 기발합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창궁관에서 신기(神技)를 얻으셨다는 소문도 있구요.”

백하련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냉군상에 대한 경외심이 묻어나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총이에게 회의 내용을 전달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진우선이 방을 나섰다.

그때, 한효기가 뒤따라 나오며 말을 걸었다.

“진 대협. 고맙습니다.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한효기가 진우선에게 감격한 눈빛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각주님이 저와 무화에게 올바른 뜻이 세워진다면 옥중에 있더라도 혼례를 치러준다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말이었지요.”

“오! 그러셨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진우선이 처음 듣는다는 듯이 반응하자, 한효기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진 대협. 그런데 각주님은 이게 다 진 대협의 의기에서 나왔으니, 진 대협께 고마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감사를 꼭 전하고자 여기로 오는 걸 자청했습니다.”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만상각주가 그때의 대화를 고스란히 한효기에게 전했을 줄이야. 어쨌거나 이건 공야청의 결정이지 않은가.

“진 대협,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행입니다. 연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가 키우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같이 사는 걸 어색해했지만, 사흘 만에 아빠라고 하더군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효기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환히 웃었다. 그런 가운데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렸다. 뭉클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술 너무 드시지 마시고요.”

“당연합니다. 그날로 끊었습니다. 그럴 시간 있으면 연이와 함께 보내고, 또 제 어미를 보러 가야지요. 그간 결정을 계속 미뤄온 탓에 세 사람의 관계가 어긋난 채로 너무 많이 와버려서, 시간을 아껴 쓰자니 술을 생각할 틈조차 없습니다.”

“선배님, 정말 다행입니다.”

진우선이 한효기의 말에 감동했다. 뿌듯한 마음도 벅차오르고 있었다.

***

냉군상이 궁가장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한 시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염성방의 흉수가 어느 쪽인지 확인하고 왔습니다.”

대전에 모인 모든 사람의 시선이 냉군상에게로 쏠렸다.

“제가 특별히 그곳에 남겨져 있던 인장을 확인해본 결과, 흉수는 사도련의 무인이었습니다. 결국, 염성방에서의 일은 사도련의 음모였습니다.”

“냉 당주, 그걸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소?”

궁목철이 곧장 질문했다.

그에 냉군상이 지친 기색을 보이면서도 차분히 대답했다.

“그건 제 무공의 비밀이라 알려드리기 곤란합니다. 하지만 이 무공으로 인해 제가 강호에서 신기수사라는 명성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허허! 그렇구려. 냉 당주가 그리 자신한다면, 알겠소이다.”

냉군상이 상황을 계속 이끌어나갔다.

“사자검문의 소식도 다 들으셨겠지요. 그들에게 떨어져 있던 인장은 자연히 천마교가 두고 간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를 궁지에 빠트리려는 계략이지요.”

“천마교? 천마교가 여기에 끼어 들었다는 말이오? 갑자기?”

“그렇습니다. 강소삼정이 모두 혼전에 말려들수록 기뻐할 곳은 천마교이니까요. 특히나 맹과 사도련이 지리멸렬하게 싸우길 바랄 겁니다.”

“허!”

궁목철이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적의 영역에서 숨을 거두어 인장을 뺏긴 만상각의 무인이 둘인데, 각기 사도련과 천마교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니 천마교까지 이 혼잡한 상황에 끼어들었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정확한지는 사자검문을 만나서 제가 확인할 것입니다.”

“알겠소.”

그때였다.

한 사람이 급히 대전으로 들어왔다. 정무맹 남경지부의 무인이었다.

“무슨 일로 급히 여기까지 들어온 건가?”

“내당주님께 아룁니다. 양주지부에서 급히 알려온 바에 따르면, 사자검문의 무인이 양주의 수룡방에 들렀다고 합니다.”

“수룡방? 설마 장강이룡?”

“그렇습니다. 때마침 장강이룡이 수룡방에 함께 머물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수하들에게 전투 준비를 명했다고 합니다.”

좌중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사도련에 속한 수룡방(水龍)은 수적들의 우두머리 집단으로, 장강에 여러 수채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주인이 바로 장강이룡(長江二龍)이었는데, 장강신룡(長江神龍)과 장강패룡(長江覇龍)으로 불리는 쌍둥이 주인이었다.

무공이 심히 뛰어난 그들 두 사람은 서로를 시기하며 심보도 고약하여, 툭하면 누가 적을 더 많이 죽이는지 내기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항상 쌍으로 움직이니, 적으로 맞이한다면 재앙이 곱절로 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으로서는 단연코 피하고 싶은 부류였다.

“미치겠군.”

궁목철이 저도 모르게 초조한 마음을 입 밖으로 흘렸다.

냉군상이 눈을 차갑게 빛내며 곧장 판단을 내렸다.

“가주님도 아시겠지만, 수룡방이 움직였다는 건 사도련에서 나선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들과는 염성방처럼 빠르게 대화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우리가 아예 밖에서 그들을 맞이해야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소?”

“그러지 않으면, 궁가장의 물적 피해가 막심할 겁니다.”

“알겠소, 고맙소.”

궁가장의 피해가 이미 상당하기에, 냉군상은 장소를 바꾸려는 생각이었다.

“어디서 맞이할 생각이오?”

“맹의 남경지부가 포구 근처에 있으니, 남경지부에서 맞이할 생각입니다. 수룡방이니 배를 타고 올 테니까요.”

“맞습니다. 수룡방에서 배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경지부의 무인이 냉군상의 말에 곧장 호응했다.

“그럼 우리도 일부나마 힘을 보태겠소.”

“감사합니다.”

잠시 후, 궁가장을 나선 일행이 남경지부에 도착했다.

냉군상이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사자검문에 수룡방까지 합치면 적의 수가 너무 많소. 난전도 대비해야 하오. 남궁 대주가 창천대를 이끌어주시고, 관 원주가 남경지 부의 무인들을 독려해주시오.”

“맡겨주시오.”

“알겠습니다.”

냉군상의 명령에 남궁지철과 관무평이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그때, 냉군상이 진우선을 보았다.

“진 무사, 사자검문주와 장강이룡을 부탁하오. 그들 개개인은 화동일검보다 한 수 쳐지지만, 셋이 힘을 합치면 그보다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소.”

“……!”

냉군상의 말에 좌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최고수 세 명을 진우선에게 맡기고 있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진우선을 제외하곤 그들과 대등하게 맞설 만한 실력자가 없었다.

진우선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미안하오. 일이 이리 번질 줄 알았으면 고수들을 더 데려올 걸 그랬소. 일단 맹에 전서구를 띄웠으니, 진 무사가 그때까지만 힘을 내 주시오.”

“그리하지요.”

그날 밤.

포구에 세 척의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하나는 사자검문의 배요, 둘은 수룡방의 배였다.

후우우웅-!

진우선이 포구의 한복판에 서서 기운을 한껏 끌어올려 전방을 짓눌렀다.

그러자 맨 앞에 선 사자검문의 배에서 내공을 잔뜩 담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고인은 뉘시오? 우리가 고인과 척을 진 일이 없는데, 왜 우리를 막아서려는 거요?”

“정무맹을 만나러 오지 않았소? 그렇다면 나를 만나시오. 내가 정무맹의 진우선이오-!”

***

그 시각.

“표야-! 표야-!”

궁목철이 아들 궁표의 방에서 피를 토하듯 외치고 있었다.

궁표가 가슴팍에 강한 일격을 맞아 비명횡사한 까닭이었다.

그때, 궁목철은 바닥에 흥건한 핏물 가운데서 작은 막대기 하나를 발견했다.

얼른 주워들어 확인하는 순간,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막대기는 인장이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만상각

“이,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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