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강소풍운 (4)
한 사람의 음성이 청명하게 울린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심혼을 짓누르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상서로운 기운이 장내를 감싸는 듯했다.
“……!”
궁가장의 가주 궁목철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서, 방금 말했던 의기 어린 젊은 무인을 바라보았다.
“설마…… 진 대협?”
“맞습니다, 가주님.”
때마침 궁목철의 옆에 서 있던 제갈영이 젊은 무인의 정체를 확인해주었다.
“아!”
그러자 장내의 무인들이 소리를 죽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궁가장만이 아니라 남궁세가의 사람들까지도.
“네놈은!”
화동일검 교중학이 뒤돌아서며 젊은 무인을 노려보았다.
“만상각에서 온 진우선입니다. 교 대협께서는 이번 일을 저와 이야기 하시지요. 원래 관 대협과 만나서 찾아갈 참이었습니다.”
진우선의 목소리가 교중학이 재차 피워 올린 살기를 흩뜨리며 궁가장에 퍼졌다.
“자네가 진우선이었군.”
교중학은 싸늘한 눈빛으로만 진우선을 쳐다보았다. 기세로 압박하는 건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진우선이 교중학에게로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교 대협께서 저를 알고 계시다니 이야기가 통하겠군요. 교 대협께서는 지금도 저희가 그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살해 장소에서 만상각의 인장이 나왔지. 증거가 있는 이상 혐의를 벗을 수 없네.”
교중학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종전의 험악한 모습은 어느새 사그라든 상태였다.
“교 대협. 마음을 가라앉히기 쉽지 않으시겠지만, 한 번만 더 상황을 차분히 살펴봐 주시지요. 만상각이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만상각에서 저 같은 무인을 보내어 해결책을 찾으면 되는데, 굳이 그리 복잡하게 할까요?”
“인제 보니 자신감이 대단하군. 내 앞에서 이리 당당하게 말할 줄이야.”
“누가 들어도 타당한 추측이기 때문입니다. 교 대협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교중학이 진우선을 잠시 노려보다가, 그 질문에 답했다.
“자네의 말은 타당하지. 하지만 그게 나와 염성방을 설득하진 못하네. 내 제자이자 소방주였던 청문이가 세상을 하직했고, 우리가 입은 피해가 너무 크니까.”
“소방주를 살해한 흉수를 찾는 데는 저희가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정무맹에서 신기수사 냉군상 대협이 오고 계시죠.”
“신기수사라…….”
“또한, 귀 방의 피해는 사자검문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들 때문에 궁가장도 손실이 막대합니다. 그러니 이는 궁가장과 염성방이 함께 사자검문에게 죄를 묻는 게 마땅합니다.”
진우선이 사건을 차분하게 살펴 말하자 교중학도 화를 참으며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장내의 사람들 대부분이 감탄을 흘렸다.
하지만 두 사람, 관무평과 남궁경은 그렇지 않았다.
관무평은 시기심이 더 크게 타올랐다.
‘제길! 내가 한 말과 다를 바 없거늘.’
말한 내용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누가 말했느냐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관무평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남궁경 역시 비슷했다.
‘저놈은 정말 눈엣가시구나!’
그는 진우선이 너무나 못마땅했다.
남궁세가의 창천대가 함께했음에도 어쩌지 못한 교중학의 분노를 진우선이 대화 몇 마디로 풀어내고 있으니, 심히 거슬렸다.
더구나 진우선은 제갈영과도 친근해 보였다.
지금도 그녀는 탄복한 눈으로 진우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경은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관무평과 남궁경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에 상관없이, 진우선과 교중학의 대화는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 자네 말처럼 된다면 어찌 세상에 문제가 있을까? 천하의 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맞아! 잘 안 돼. 자네의 말은 얼핏 보면 다 맞는 것 같지만, 청문이가 숨을 거두었을 때의 우리 마음은 헤아리진 못하고 있어. 염성방주와 내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말이야.”
교중학의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했다.
“내가 자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버리면, 죽어서도 청문이를 볼 낯이 없어. 지금도 듣는 대로 수긍하고 있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야. 이제 더는 못 참겠군.”
“그렇습니까?”
진우선이 교중학의 뜻을 알아들었다.
교중학이 검을 뽑더니, 검집을 내던졌다. 분노를 검에 담으려 하고 있었다.
그에 진우선도 광륜검을 빼 들었다.
“사도련주와 동수를 이뤘다지? 그 실력을 한 번쯤 보고 싶었다. 과연 나와 얼마나 차이가 날까 하고 말이야.”
“만상각에서 그럴 이유가 없었다는 걸 보여드리죠.”
교중학이 기세를 피워 올리자, 진우선도 오행진기의 내력을 끌어 올렸다.
번쩍!
부지불식간 섬광이 터졌다.
교중학이 검에서 폭발적인 기운을 쏟아내며 짓쳐 들었다.
진우선이 광륜의 오행진기를 품으며 교중학을 정확히 살폈다.
그의 검은 섬전 같았다. 어찌나 빠른지 보통의 무인이라면 잔상조차 보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진우선은 검의 궤적을 꿰뚫어 보는 걸 넘어, 검에서 수십 개의 짙푸른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지는 것도 알아챘다.
‘검강(劍罡)!’
강기 다발이 예기를 뿜으며 화살비처럼 내리꽂혔다. 그 모든 게 진우선에게로 쏟아졌다.
수십 개의 화살이 온몸에 박힌다니!
그렇다면 진우선은 온몸에 수십 개의 가시를 꽂게 될 것이다. 마치 고슴도치 같은 모습으로.
좌중의 눈앞에 자연스럽게 그 광경이 떠올랐다. 진우선이 가만히 서 있는 까닭이었다.
휙-!
그러나 별안간에 새하얀 빛무리가 터지며 진우선의 검이 춤추기 시작했다.
힘을 모았다 터트리는 듯,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하자 끊임없이 나아가며 검을 뿌렸다.
검에서 흩뿌려진 새하얀 빛의 조각들이 허공에 떠 있던 수십 발의 강기들을 모두 요격시켰다.
그러자 짙푸른 기운들이 머리 위에서 팍팍 쪼개지며 아지랑이처럼 산화했다. 수십 개나 되다 보니, 공중에 자욱한 연기가 어리다가 안개처럼 증발했다.
광양찬망(光陽燦)의 초식 한 수가 빚어낸 상황이었다.
“헉-!”
‘강기를 허공에서 요격하다니! 엄청나구나!’
장내의 무인들은 눈앞에서 펼쳐진 대결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진우선과 교중학의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충돌의 여파가 장내를 뒤흔들었고, 기파에 놀라 본능적으로 내력을 황망히 일으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진우선과 교중학의 격전에서 시선을 떼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을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절대고수간의 대결을 볼 수 있을까?
자칫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강호의 무인에게 지금의 상황은 돈 주고도 못 사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두 사람이 순식간에 십여 초를 나누었다.
교중학이 강한 검세를 펼쳐내면, 진우선이 그때마다 절묘하게 검을 놀리며 대응했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검법에 표홀한 움직임이 더해지고 심후한 내력이 뒷받침되니, 진우선은 그야 말로 난공불락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장내의 모두가 알아챘다.
교중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공세를 끊고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왜 공격하지 않는 건가?”
그에 진우선이 검을 내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정무맹에서 중재하러 왔으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허-!”
“이만하면 맹의 뜻과 힘을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이해했네. 과연 진 대협이군. 정무맹의 기운이 미진했는데, 여러모로 경천동지할 인물이 나타났어. 본인은 진 대협 자네에게 감탄했다네.”
교중학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탄복한 마음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럼 신기수사 냉 대협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알겠네. 남경지소에서 정무맹의 뜻을 기다리지.”
교중학이 그렇게 진우선과 대화를 마친 뒤, 장내의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홱 고개를 돌리며 궁가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궁가장의 대전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진우선과 만총이 들어선 까닭이었다.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진우선을 보며 안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 대협! 급박한 순간이었으나, 때마침 도착해준 덕분에 절체절명의 순간을 헤쳐 나올 수 있었소. 정말로 감사하오.”
“저야말로 도움이 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가주님께서 궁가장의 식구들을 포구로 보내주신 덕분에 빠르게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소.”
궁목철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 소협께도 우리를 도우러 와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오. 벽력신창 탁 대협의 의기를 이어받으셨다 들었소.”
“스승님을 아십니까?”
“전에 크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소. 은거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몇 번 찾아뵙지 못한 게 너무나 후회되었소.”
궁목철이 만총에게도 뜨거운 감정을 쏟아냈다.
그는 지금 화동일검 교중학이 물러간 사실에 격동하여 환희가 넘치는 모양이었다.
“정무맹의 이후 계획은 어떻소? 진 대협께서는 어떤 방안을 생각하고 계시오? 궁가장의 가족들이 고견을 청하오.”
궁목철이 진우선에게 극진히 예를 다해 물었다.
“때마침 가주님께서 제가 궁금한 사항을 물어봐 주셨군요. 이미 정무맹의 관 원주님을 비롯한 여러 의인께서 먼저 도착해 회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분들께서 먼저 살피셨을 테고, 저 역시 그분들의 깊은 뜻을 먼저 물으려 하던 참이었습니다.”
“진 대협도 그리 생각하셨구려. 사실 관 원주께서 여태까지 애를 많이 써주셨다오.”
궁목철이 얼른 진우선의 말을 받아 관무평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일단 화동일검이 돌아갔고, 일의 경위를 알아볼 시간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내일 저녁에 신기수사 냉 대협께서 오실 겁니다.”
관무평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속마음까지 웃고 있는 건 아니었다.
***
다음 날 밤, 남경에 도착한 세 사람은 바로 궁가장으로 향했다.
“냉 대협께서 오셨군. 기다리고 있었소.”
“가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오. 진 대협과 관 대협이 애를 써준 덕분에 위험한 순간을 넘겼을 따름이오.”
냉군상과 궁목철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와 함께 온 백하련과 한효기는 바로 진우선을 만났다.
“진 무사님의 활약상을 종전에 들었습니다. 침착하게 잘 대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행이군요. 임무 받은 대로 중재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잘하셨어요.”
백하련이 교중학을 상대했던 진우선의 대응을 좋게 평가했다.
“진 대협, 수고하셨습니다.”
만상각주에게 자발적으로 청하여 남경에 온 한효기도 진우선에게 한마디 건넸다.
“선배님은 달라지셨군요.”
“진 대협 덕분이지요. 제가 언제까지 그렇게만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효기가 담담히 말했다.
그는 이전처럼 술에 취해 흐리멍덩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서슬퍼런 안광만 흘리고 있었다.
얼마 전 무화가 투옥되었으나, 그들은 이제 숨기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한효기는 그날로 심기일전한 상황이었다.
그때, 냉군상이 궁목철에게 묻는 음성이 들려왔다.
“가주님, 사자검문과는 언제 마지막으로 소통하셨습니까?”
“닷새 전이오.”
“그럼 딱 염성방이 소방주를 잃기 전이군요.”
“맞소. 그래서 염성방의 일을 사자검문이 벌였을 거라 추측하고 있소.”
궁목철이 조심스레 자기 뜻을 밝혔다.
그간 사자검문이 걸어온 길을 본다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냉군상은 신중했다.
“가주님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궁가장과 염성방의 피해가 심각하여 사자검문이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큰일이라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합니다.”
“그럼 사자검문이 아니라는 말씀이시오?”
“미리 확정 짓지 말자는 뜻입니다. 주변을 더 크게 보면 강소성의 혼란으로 이득을 얻는 곳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사자검문이 심히 의심스럽소. 우리는 그들과 강소의 패권을 두고서 계속 부딪쳐왔기 때문이오.”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뻔히 자신들이 의심받을 만한 상황인데, 사자검문이 그런 짓을 저질렀겠습니까?”
“그들은 그러고도 남소. 이득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오.”
“알겠습니다. 그 점은 저도 명심해두겠습니다. 아무튼, 내일 염성방에 찾아갈 생각입니다. 어쩌면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겠소! 잘 부탁드리겠소.”
냉군상이 궁목철과 의견을 팽팽히 나누다가 한 발 물러섰다.
그에 궁목철도 겸연쩍게 웃으며 자신이 그를 너무 오래 세워둔 걸 깨달았다.
“그보다 급히 먼 길을 오셨는데, 일단 쉬시오. 내가 손님을 맞아야 하는데 상황이 급하여 깜빡하고 있었군.”
***
그 시각.
사자검문에서는 불빛들이 한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문파가 구석구석 빈틈없이 밝혀졌다.
“문주님, 문파 내부를 샅샅이 살폈으나,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밖을 살펴라. 일이 조금 전에 벌어졌으니, 흉수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사자검문의 문주 서도광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둘째 아들 서륜이 살인을 당한 까닭이었다.
그에 무인들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빨리 흩어졌다.
그때, 방 안을 살피던 무인들 중 하나가 황급히 외쳤다.
“문주님! 탁자 밑에 이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이건!”
서도광이 찢어질 듯이 눈을 부릅떴다.
무인이 건넨 건 작은 막대기처럼 생긴 정교한 인장이었다.
인장에는 예상치 못한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만상각.
서도광이 눈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정무맹-! 감히 우리에게 이딴 짓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