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42화 (142/225)

142.

#강소풍운 (3)

평호장에 아침이 밝아왔다.

정무맹 항주지부장 안이원이 동트자마자 찾아왔다.

“새벽에 맹에서 도착한 전서입니다. 진 대협께 전달하러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즉시 서찰에 난 표식에 자신의 인장을 사용했다. 그러자 문양이 딱 남았다. 정식 임무가 맞았다.

진우선이 임무를 확인하고 있을 때, 탁무위가 안이원을 불렀다.

“밤을 또 지새웠군. 사건이 또 벌어진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염성방의 소방주가 죽임을 당하자, 그의 스승이었던 화동일검 교중학이 뭇 고수들을 이끌고 궁가장으로 향했습니다. 정무맹에게 자초지종을 묻겠다고 합니다.”

“화동일검 정도면 아마도 극경이 보이기 시작했을 텐데…… 염성방이 엄청난 수를 뒀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안이원이 피곤해 보이는 모습 속에서도 눈을 빛내며 말하자, 탁무위가 안타까워했다.

“쉬어가면서 해라. 부하들도 쉬게 해야 한다. 몸이 버려야 정신도 버티거늘.”

“안 그래도 반씩 교대하여 쉬었다가 오도록 하고 있습니다.”

“잘했다. 그래도 좀 늘었구나.”

그때, 임무를 확인한 진우선이 탁무위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장주님. 저는 잠시 후에 남경으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맹에서 급했구나. 하긴, 우선이 네게 서찰이 왔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진우선과 탁무위는 어제 비무를 치른 이후로 한결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래서 호칭도 변해 있었다.

그때, 만총이 물었다.

“우선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적혀 있어?”

“아니, 너에 관한 언급은 없었어. 상황이 너무 긴박해서 일단 내 임무만 내려온 거 같네.”

또한, 만총 같은 호심당의 제자는 이토록 위험해 보이는 임무에 함부로 보내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탁무위가 만총의 마음을 바로 알아챘다.

“맹에서는 당연히 말이 없었겠지. 하지만 우선아, 총이와 둘이 함께 가는 게 어떻겠느냐? 내 보기엔 그래도 괜찮을 것 같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총이의 실력이 몹시 뛰어나니 오히려 큰 도움이 되겠지요.”

진우선의 의중을 확인한 탁무위가 만총을 바라보았다.

“총아, 조심히 다녀오거라.”

“스승님, 하루밖에 머물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안 가겠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앞으로의 정진에는 많은 실전을 겪는 게 중요하다는 스승님의 말씀을 받들었습니다.”

“허허. 그래, 맞다.”

탁무위는 만총의 당당한 모습에 뿌듯하면서도, 아쉬움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진우선과 만총이 떠날 채비를 마쳤다.

“지금까지처럼 항상 최선을 다하거라. 나도 오랜만에 제자를 만나며 뜻깊은 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탁무위가 웃으며 두 사람을 환송했다.

만총이 그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고서 진우선과 함께 장원을 나섰다.

탁무위가 배웅을 마치고 정자로 오르자, 안이원이 말을 건넸다.

“장주님. 만 소협이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물론, 진 대협과 함께이니 제가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아무렴, 내 제자인데 너보다는 훨씬 낫지. 항주지부가 다 몰려와도 상대하기 어려울 거다.”

“아!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안이원이 얼른 고개 저으며 손사래를 치자, 탁무위가 혀끝을 차며 말했다.

“이원아, 너무 저들을 부러워하지 말거라. 너한테는 지금 가는 길이 딱 맞으니, 마음만 좀 더 넓히면 된다. 부하들을 품을 줄 아는 윗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맹에서 널 중용하고도 남지.”

탁무위는 안이원을 오래 봐왔기에, 그가 승진에 대한 욕심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도 진우선이 방문하자 평호장까지 안내하고, 식사 자리에 끼려고 눈알을 열심히 굴렸지 않았던가. 물론, 탁무위가 돌려 보냈지만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안이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애초에 칠팔 년 전쯤 항주지부를 그에게 권했던 게 탁무위였고, 그의 조언을 따라서 열심히 하자 지부장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안이원은 은사인 탁무위의 말을 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장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남으셨습니까?”

“왜 그리 생각했느냐?”

“오늘의 모습은 여태까지와 달리 생기가 넘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진 대협과 만 소협을 만나서 마음에 변화가 생기신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 역시 너는 마음만 넓으면 되겠다.”

안이원은 눈썰미가 좋고 머리 회전이 빨랐다.

탁무위가 부정하지 않자 그는 다음 생각을 꺼냈다.

“아무래도 맹주님 때문이시겠군요.”

“맞다. 지금 다시 맹에 돌아간다면, 힘이 하나로 모이지 않을 수도 있지.”

탁무위는 친동생인 탁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안이원이 탁무위를 위해 조금 더 조언했다.

“그럼 얽매이지 않은 신분으로 강호를 돌아보십시오. 혹시나 진 대협과 만 소협에게 관심이 간다면, 함께 다니며 지켜보셔도 괜찮을 겁니다.”

“그게 가당키나 하겠느냐?”

“뭐가 어렵겠습니까? 맹에 속하지만 않으시면 되지요. 장주님만 그리 결심하시면 남들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천하는 넓기만 하고, 얼마나 볼 게 많습니까?”

“허허허-!”

탁무위가 안이원의 말을 듣고 웃음만 흘렸다. 본심이 이끌리기 때문이리라.

안이원이 내친김에 말을 더 이었다.

“장주님, 미련이 남아 있으면 강호에서 떠나실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에서야 장주님의 옛 눈빛을 보았습니다.”

“인제 보니, 너는 말도 줄이는 게 좋겠다.”

***

그 시각.

궁가장의 대전에서는 흉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화동일검이 곧장 이리로 오고 있소. 정오면 도착할 거로 보인다더군. 관 원주, 그를 멈춰 세우고 중재할 수 있겠소?”

궁가장의 가주 궁목철이 현재 정무맹을 대표하는 관무평에게 강하게 외쳤다.

“그리해야지요. 잠시 후 제가 직접 염성방 남경지소로 다녀올 생각입니다.”

“직접 만날 생각이시구려. 만나서 어찌할 대책은 있소?”

“사자검문의 사욕에서 사건이 시작되었는데, 누군가의 음모가 겹쳤습니다. 하지만 정무맹은 절대 그러지 않았고, 남궁세가가 이를 보증합니다. 그 사실을 명확히 전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관무평의 말에 남궁경이 바로 호응했다.

그러자 궁목철이 분노하여 버럭 소리쳤다.

“허-! 직접 관계된 일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니오? 염성방의 소방주가 죽었소이다.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죽어서 염성방주가 눈이 뒤집혔단 말이오! 남궁세가에서는 소가주가 죽으면 적이 사도련이라고 해서 복수를 안 할 거요?”

“그, 그건…….”

남궁경이 당황하여 말끝을 흐렸다. 궁목철의 말이 극히 타당한 까닭이었다.

“염성방에서 화동일검이 나섰소, 화동일검이! 그들은 생사를 건 거요. 그리고 설마 화동일검의 성정을 모르시오? 그는 십 년 전에 한 자리에서 추성보의 수백을 베고 현판을 내려버린 희대의 살귀(殺鬼)란 말이오!”

궁목철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화동일검 교중학의 추성혈사는 그가 얼마나 잔악한지 보여주는 유명한 일이었다.

실제로 추성보는 농민들의 고혈을 착취하고 교중학의 사문인 사수검문에도 고리채를 씌워 핍박했으니, 싸울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교중학은 일의 인과를 따지며 추성보에 대응한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추성보의 보주를 비롯한 모든 식솔을 베어버렸다.

그로 인해 산동성에서 힘깨나 썼던 추성보는 하루아침에 멸문했고, 엄청난 악명을 얻은 교중학은 사수검문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교중학은 화동지방을 방랑하면서 가는 곳마다 악인들을 처단하며 살았는데, 어마어마한 무위로 인해 그를 막아 세울 자가 없었다.

그래서 곧 화동일검이라 불리며, 화동지방의 뭇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 상태였다.

궁목철 역시 화동의 사람인지라, 그런 교중학을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관 원주! 내가 정무맹을 못 믿는 게 아니오. 누가 봐도 뻔한 수작이지. 인장을 그리 허투루 뺏기는 자객이 어디 있겠소? 하지만 우리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관 원주는 궁가장이 다 죽고 나서야 시시비비를 밝힐 거요?”

“그건 아니지요.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럼 관 원주는 어떻게 화동일검을 막아 세울 거요?”

궁목철의 말에 관무평이 아침에 받은 전서의 내용을 전했다.

“궁 가주님. 맹에서도 이 일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어젯밤에 맹에서 내당주님이 급히 출발하셨고, 또한 진우선 대협이 항주에서 오늘 아침에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오! 진 대협이라면 이번 신양대전에서 정도의 빛처럼 나타난 절대고수 아니오? 항주에서 출발했으니 내일이면 도착할 텐데, 천만다행이오.”

진우선의 이름을 듣자마자 궁목철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관 원주, 내가 너무 화내서 미안하오. 조금 전에는 목숨이 걸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촉급하여 어쩔 수 없었소. 이해해주시오. 중재하러 온 이들에게 너무나 무리한 부탁을 했소.”

“아닙니다. 궁 가주님의 처지라면 당연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려. 그럼 오늘을 잘 부탁하오. 그간 우리가 맹에 깊은 뜻을 보여 왔음을 잊지 말아 주시오.”

궁목철이 그리 말을 남기고 대전을 떴다.

관무평이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누르며, 심화를 가라앉혔다.

‘제길! 진우선의 이름을 듣자마자 안도하는 꼴이라니……. 나로 부족한 건 그렇다 쳐도, 맹의 이름도 남궁세가의 힘도 부족했단 말이냐!’

머릿속에서 생각이 떠나지 않으니, 화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사실 진우선의 이름은 정말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실력은 인정하나, 그의 이름에 자신의 공까지 다 묻힐까봐 우려되는 탓이었다.

게다가 협박까지 당했다.

궁가장이 맹에 깊은 뜻을 보여 왔다는 건, 그간 돈을 많이 냈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궁목철로서는 압박하고자 한 말이겠지만, 관무평에게는 너무나 굴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때, 남궁경이 관무평에게 말을 걸었다.

“원주님. 괜찮으십니까?”

눈을 뜨니 남궁경이 보였다. 그의 우측에는 남궁세가의 창천대를 이끌고 온 남궁지철이 있었고, 좌측에는 제갈영이 있었다.

하나같이 세력이 등등한 이들이 바로 보이자, 관무평은 기분이 더 나빠져 속까지 더부룩해졌다.

“후우-! 잠시 바람 좀 쐐야겠다.”

잠시 후, 한낮 때였다.

관무평과 일행들이 염성방 남경 지소를 찾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무맹은 나더러 참으란 말이오?”

화동일검 교중학이 섬뜩한 기세를 마구 피워 올리며 관무평에게 물었다.

“참으란 뜻이 아닙니다. 저희가 그럴 거였으면, 사도련이든 천마교든, 그들의 흔적을 남겼을 겁니다. 상황을 잘 살펴봐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이 인장은 어떻게 설명할 거요? 만상각에는 정무맹의 고수들이 있다는데, 막말로 정무맹이 획책하여 벌인 짓이 아니라는 증거는 있소?”

“어찌 정무맹이 그런 일을 벌였겠습니까? 오해이십니다.”

“오해는 무슨! 지금 당신네 꼴이 딱 그러하지 않소.”

교중학이 더욱 성을 냈다. 관무평의 말은 그의 화를 더 돋울 뿐이었다.

“아주 대단하구려. 강호를 이리 우습게 볼 줄이야. 궁가장을 뒤로 숨기고, 정무맹의 이름으로 핍박하면 다 될 줄 알았소? 그렇게 중재하러 온 거 아니오? 내가 아니었으면 염성방은 이대로 억울함도 못 풀었겠소이다.”

“그게 아니라 시간을 달라는…….”

관무평이 그리 말할 때였다.

진득한 살기가 그의 전신을 옥죄어오니,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관무평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교중학의 눈빛이 살기등등했다.

이 자리에서 즉각 죽일 심산인 게 느껴졌다.

‘컥!’

순간 무형의 기운이 관무평의 가슴을 때렸다.

관무평은 순식간에 내력이 뒤틀리며 내상을 입었다. 속에서 피가 목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하나도 내색할 수 없었다.

‘지금 피를 쏟으면 안 된다! 이것도 술수라 할 테니까.’

관무평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버텼다. 낯빛이 심히 창백했으나, 애써 태연한 표정마저 짓고 있었다.

그에 교중학이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후우-! 알겠소. 그래도 정무맹의 이름을 내 어찌 무시할 수 있겠소? 대신 하루의 시간을 드리리다. 그때까지 내가 납득할 만한 답을 가져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궁가장에게 바로 죄를 물을 것이오.”

“……고맙습니다.”

관무평이 간신히 작게 대답하고는 자리를 떴다.

물러서는 그의 마음이 참으로 비참했다. 목숨으로 시간을 번 꼴이었다.

***

다음 날 낮이었다.

교중학이 검 한 자루를 손에 든 채,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궁가장에 들이닥쳤다.

“관 원주, 하루의 시간이 되었소. 당신들의 답은 무엇이오? 청문이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심히 답답하여 답을 들으러 왔소이다.”

답을 가져오라던 교중학이, 숨을 거둔 염성방 소방주 차청문의 이름을 들먹이며 험악한 기세로 물었다.

그에 궁가장 전체에 짙은 살기가 드리워졌다.

“곧 말씀드리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관무평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궁목철을 비롯한 궁가장 내의 사람들 역시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바로 그때였다.

궁가장 정문으로 몇 사람이 들어섰다.

그중에 의기 어린 젊은 무인 하나가 목소리에 청명하고도 깊은 공력을 실어 외쳤다.

“교 대협, 여기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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