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38화 (138/225)

138.

#천하는 계속 흐른다 (3)

“각주님이 그런 임무를 내리셨군.”

이능운이 진우선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진우선이 이능운을 찾아온 목적을 바로 꺼냈다.

“한효기 선배는 어떤 사람입니까?”

백무원주 이능운은 백무원의 무인인 한효기를 가장 잘 알 만한 사람이었다.

진우선은 취월루에서 무화라는 여인도 만나야겠지만, 그보다 이쪽이 먼저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음…… 한마디로 말하자면 과거에는 열정적이었으나, 지금은 마음이 식어서 술만 마시는 사람이지. 우선이 너도 몇 번 봤지 않아?”

“얼굴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데면데면한 사이여서 대화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랬겠군. 아직 함께 임무를 해본 적이 없고, 서로 성향도 달라서 별로 어울리지도 않았을 테고.”

이능운이 진우선의 상황을 가늠해보더니, 다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효기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효기는 좀 외로운 사람이다. 나랑 동갑이니까 올해 서른일 텐데, 오 년 전쯤에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냈어. 아내가 아주 아팠거든.”

이능운이 아련한 눈빛으로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는 원래 화중지방에서 손꼽혔던 고수인 단천도객의 제자다. 아내의 병 때문에 만초신의 어르신을 찾아서 정무맹으로 왔지.”

만초신의는 활인당주 왕약수가 강호에서 불리는 별호였다.

강호에 알려진 세 명의 신의 중에 만초신의만이 유일하게 정무맹에 터를 내리고 있어 찾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선천적인 질병이라 세상에서 찾아보기 극히 드물고, 치료 역시 어렵다고 하더군. 그마저도 영약이 필요한 거라서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고. 그래서 효기가 백무원에 들어온 거였어.”

“무원주님은 자세히 알고 계셨군요.”

“나랑 동기니까.”

이능운의 대답에 진우선은 저절로 수긍되었다.

“그럼 아내를 떠나보낸 후, 실의에 빠진 건가요?”

“맞아. 이 년 동안 미친 듯이 임무를 수행하여 아내를 살리려 노력했는데, 물거품이 되었어. 그 뒤로 술에 의지하며 살아왔지.”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밤새 술을 마시고 임무를 받으러 온 적도 많을 거다. 사실 다들 그걸 왜 모르겠어? 다만 사연을 조금씩은 알고 있어서 양해해줬던 거지.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군.”

이능운의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임무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연유로 취월루에서 술을 마시다가 무화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 건가요? 각주님은 한효기 선배가 그녀를 오랫동안 사랑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벌써 사오 년 됐으니까. 그간 나뿐만 아니라 다들 수차례 말렸는데, 전혀 듣지 않았지. 알고 보니 서로 연정을 느꼈다더군. 그래서 포기했다. 그 뒤로는 늘 그 모양이었어. 근데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이능운의 얼굴에 한 줄기 아쉬운 빛이 스치다가, 차라리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각주님이 이래서 그들의 관계를 알아보라 하신 모양이네요. 당장 첩자를 색출하지는 말라고 하셨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아직 결정을 명확히 내리지 못하신 거지. 그래서 더 알고 싶으신 거야. 때마침 미혼술을 익힌 사도의 고수와 맞닥뜨려도 걱정 없는 사람이 있고.”

그러더니 이능운이 조심스레 공야청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선아. 각주님이 조금 달라지셨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전 맹주님이 돌아가신 후에 심경의 변화가 좀 있으신 모양이다. 요 며칠 보니까 전 맹주님을 닮아 가시려는 듯하더군. 혜원주도 공감했고.”

공야청의 최측근인 이능운과 금청청은 어느새 생각을 나눈 모양이었다.

“사실 이번 일도 원래라면 효기를 불러서 바로 물어보고 결정하셨을 거다. 그게 일도 빠르고, 과정도 합당하지. 근데 그러지 않았어.”

“아-!”

진우선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무원주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각주님이 큰 결심을 하신 모양입니다.”

진우선은 공야청과 독고월에게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평생 쌓아서 굳어진 생각을 단숨에 바꾸긴 쉽지 않을 터, 공야청은 정말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선아. 그럼 혹시 어제 내당을 확대하여 셋으로 개편했다는 말은 들었어?”

“아니요. 지금 처음 듣습니다.”

“각주님이 이것도 말씀 안 하셨구나. 내당을 내도원(內圖院), 혜도원(慧圖院), 무도원(武圖院)으로 확대 개편했어. 맹에서 냉군상 내당주에게 힘을 잔뜩 실어준 거다.”

“우리와 비슷하게 이름을 지었네요.”

“따라한 거지, 뭐.”

진우선은 듣자마자 내도원이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정무맹을 도맡아 살피고, 혜도원과 무도원이 백혜원과 백무원처럼 움직일 거라는 걸 알아챘다.

“이런 일까지 있었던 거면, 각주님의 마음속이야말로 정말 복잡하겠군요.”

“그렇겠지.”

이능운이 진우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생각난 바를 얼른 덧붙였다.

“아! 효기 말이야. 장평산이나 오수검과 술을 마실 때가 많다고 들었다. 셋 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 중이라니 참고해라.”

“알겠습니다.”

***

이틀 후 저녁.

세 사람이 취월루에 들어서고 있었다. 한효기와 장평산과 오수검이었다.

그들은 술상을 차리자마자 부어라 마셔라 했다.

“자, 다들 마셔라! 역시 임무 마치고 돌아와서 마시는 술이 제일 달다, 달아!”

“한 형, 좋소! 우리 오늘도 먹고 죽어 봅시다. 나 역시 닷새를 안 마셔서 목이 꽉 막힌 거 같았소.”

커다란 체구를 지닌 장평산이 한효기의 말에 한껏 흥을 냈다. 척 봐도 말술일 것처럼 생긴 얼굴이 어느새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그때, 서생처럼 생긴 오수검이 술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자, 한효기가 핀잔을 주었다.

“검아. 너는 오늘도 왜 이리 깨작깨작 마시냐?”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돼서요.”

“고민을 왜 해, 고민을. 그냥 가서 만나면 되지.”

한효기의 말에 오수검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술을 마셨다.

장평산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마디 꺼냈다.

“너는 어제 복귀했다며. 그럼 어제 와서 안 만나고 뭘 한 거야?”

“그러게요. 어제 뭘 했을까요?”

“그러게요는 무슨 그러게요야! 망설이면 밥이 되냐, 죽이 되냐? 패를 돌려야 뭐라도 나오지! 언제까지 끙끙대기만 할래?”

“후우-! 나도 장 형처럼 스스럼 없이 다녔으면 좋겠네요.”

오수검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한테 말대답하는 것처럼만 가서 말을 해봐. 대화가 하나도 안 끊기겠네. 어휴. 답답해.”

“평산아, 그쯤 하면 됐다. 그만 나무라라. 검이가 일부러 저러는 것도 아니잖아.”

“한 형, 그래도 일 년이나 되었소. 일 년이나! 아직도 이 정도로 마음을 졸이는 게 말이 되오?”

“형님들, 나라고 이런 상황이 안 답답하겠습니까? 날마다 와서 보면 좋은데, 그러지 못하니 늘 어색하더군요. 임무 때문에 열흘이나 보름마다 여기 와서 이삼일 보고 갈 뿐이니, 언제 친해질 수 있겠냐구요.”

오수검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나름대로 다가갈 계획이 있었으나, 숫기가 없어 진척이 더뎠다.

“검아, 그럴 땐 한잔하는 거다. 그리고 이번엔 이야기 좀 잘 해봐. 사도련이 잠시 조용해졌으니, 시간이 좀 될 거야.”

한효기가 오수검과 함께 술을 들이마셨다.

“에잇!”

장평산이 술독 하나를 들어 올려 벌컥벌컥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가보겠소. 벌써 한 시진쯤 마신 거 같은데, 손이 근질거려 못 참겠구려. 이번 임무에서도 손맛을 별로 못 본 터라, 얼른 가야 할 것 같소.”

“벌써 한 시진이나 되었어? 그래, 그래라. 그리고 오늘은 좀 많이 따서 내일 술 사라. 크크크.”

“알겠소. 일월성신께서 내 염원은 안 들어주는 거 같으니, 한 형이 좀 빌어주시오. 크큭.”

장평산이 치아가 보이도록 활짝 웃으며, 순식간에 밖으로 나갔다. 그의 목적지는 취월루 옆에 세워진 도박장이었다.

그러자 방 안에 오수검과 한효기가 남았다.

“검아. 너는 오늘 어떻게 할 거야? 오늘은 만날 거지?”

“그러려고요.”

“그래. 자신감을 가져. 네가 소 낭자에게 선물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호감은 쌓았어. 이제 대화를 잘 해봐. 그래도 널 피하지는 않잖아.”

“알겠습니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오수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평소에 수줍음이 많아 사모하는 여인 소여홍과 말을 붙이기도 어려워했는데, 오늘은 제대로 이야기해볼 참이었다.

“고마우면 술이나 한 잔 따라주고 가라.”

“그러죠.”

그러고서 오수검도 빠르게 방을 나섰다.

한효기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잠시 후, 그 방에 한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는 익숙하게 한효기의 맞은편에 앉았다.

“왔구나. 그간 잘 지냈어?”

“저야 뭐 늘 똑같죠. 오라버니는 어땠어요?”

“나도 뭐 늘 똑같지. 크큭.”

한효기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자리를 옮기자.”

“알겠어요. 오늘도 별채로 갈 거죠?”

“당연히 그래야지.”

한효기와 여인이 곧장 방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취월루의 시녀들이 들어와 치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창밖에서 한 인영이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별채로 날아갔다.

“무화.”

별채로 자리를 옮긴 한효기가 나직하게 여인을 불렀다.

“왜요?”

“근심 있구나, 너.”

“없어요, 그런 거.”

“그래?”

한효기가 슬쩍 되묻더니, 무화의 말을 듣지도 않고 술 한 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애초에 무슨 대답을 바란 게 아닌 모양이었다.

무화가 한효기의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그렇게 묻는 오라버니야말로 근심 있는 거 아니에요?”

“나도 없어.”

“진짜 없어요?”

“어. 없어.”

한효기가 술잔을 들었다.

죽엽청의 달달한 향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하지만 목줄기를 넘어갈 땐 뜨겁고 독했다.

“술맛이 좋다. 이 맛에 술을 마시지.”

“그거 알아요? 지금 엄청 남자다운 척하는 거 같은데, 되게 고독해 보여요.”

무화가 한효기를 비꼬았다.

“이제 그만 근심을 털어놓아 보세요. 원래 운명적 고뇌가 있어서 맨날 술만 마시는 건 알고 있지만, 오늘은 다른 게 또 있는 거 같네요.”

“큭. 눈치가 참 빨라. 대단해.”

한효기가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술잔을 또 비웠다.

“같이 술 한 잔 마시면 말할게.”

“알았어요.”

무화가 한효기와 동시에 한 잔 마셨다. 그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술 많이 안 마시나 보네.”

“오라버니 아니면 술 안 마셔요. 알잖아요.”

“언제부터?”

“한 삼사 년 전부터.”

“너 고향에 갔다 왔을 때부터겠구나.”

무화는 대답 없이 발그레한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의 말간 얼굴처럼 달이 밝았다.

“네 조카는 잘 크고 있어?”

“이제야 묻네요. 오늘은 연이 언제 찾으려나 했어요.”

무화가 입술을 빼죽 내밀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 한 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아장아장 걸어서 다가오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연아, 이리 와봐.”

한효기가 여아를 불렀다.

“아저씨. 왔어요?”

“그래, 아저씨 왔다.”

“아저씨. 나 보고 싶었죠?”

“응. 엄청나게 보고 싶었지.”

한효기 앞에 도착한 연이가 말을 곧잘 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더니 손을 꼬물대며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아저씨랑 숙모랑 나랑 그렸어요.”

“아이고, 잘 그렸네.”

연이가 내민 종이를 살펴보니, 세 사람이 가족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때, 어둠 속의 한 나무 위에서 그들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던 진우선은 묘한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아이가 두 사람을 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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