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36화 (136/225)

136.

#천하는 계속 흐른다 (1)

장사 시내의 한 다관.

진우선과 백혜원주 금청청이 창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종종 창밖을 바라보는 걸 보면, 둘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다관 밖 거리에 검푸른 색 장포를 걸친 무인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왔습니다!”

“그렇네.”

진우선과 금청청이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무인들이 한 중년인을 에워쌌다.

그에 중년인이 인상을 팍 구기며 대차게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내게 볼일이 있으면 말을 하면 되지, 왜 길을 막는 거요?”

“호북반점에서 그래놓고도 아주 당당하구려.”

“배가 고파 식당에 들러 밥을 먹고 나왔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호북반점은 중년인이 조금 전에 밥을 먹고 나온 식당으로, 십 장(十丈, 약 30m) 옆에 있었다.

“아니, 대낮에 넓은 거리에서 이렇게 행패를 부려도 되는 거요? 정무맹에 신고하겠소!”

중년인은 불같은 성미를 드러냈다. 어느새 화까지 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 있었다.

“호오! 잘도 우리를 모른 척하는군.”

무인들의 뒤편에서 한 사람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 역시 검푸른 색 장포를 걸치고 있어서 옷으로는 신분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다만 거대한 도를 들고 있는 게 다를 뿐이었다.

“내가 어찌 알겠소? 오늘 처음 보는데.”

“그럼 맹호도 단휘는?”

“처음 듣는군. 그게 당신이오?”

중년인의 삐딱한 말에도 맹호도(猛虎刀) 단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중년인이 당연히 자신의 이름을 알 거라 여기고 있었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괘씸할 정도야. 네놈이 어떤 놈인지 다 알고 왔는데 말이지.”

“뭘 다 알고 왔다는 거요? 그리고 지금 이거 행패 부리는 거요. 인제 보니 별호도 있을 만큼 유명한 사람인 거 같은데, 후에 단단히 각오하시오!”

중년인이 버럭 소리쳤다. 그는 칠 테면 쳐보라는 듯 매우 거칠게 항의하고 있었다.

단휘가 서슬 퍼런 눈빛을 쏘아보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정무맹 외당 칠대 부대주 왕진삼. 그간 애 많이 썼어. 사도련의 첩자 노릇 하느라.”

“첩자? 십 년 넘게 정무맹에 열정을 다 바쳐온 내게 감히 그게 무슨 소리요?”

“정말 말을 더럽게도 안 들어 처먹는군. 예전 같았으면 콱 죽여 버리고 시작했을 텐데.”

단휘가 고개를 젓더니, 시퍼런 기세를 뿜으며 더욱 묵직하게 말했다.

“사도련의 첩자, 왕진삼. 호북반 점에서 형일사와 접선했지. 그도 지금 붙잡혔을 거야. 우리가 갔거든.”

“형일사는 또 누구야? 아니, 현청각에서 선량한 맹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도 무사할 것 같더냐?”

“뒤집어씌우긴 뭘 뒤집어씌워? 그리고 봐봐. 현청각도 알고 있었잖아. 이제 눈알은 그만 굴려. 확 파버리기 전에.”

단휘가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왕진삼의 기세를 팍 눌렀다. 그가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조차 꼴사나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금청청이 한 마디 중얼거렸다.

“왕진삼, 저놈은 정말 악질이네.”

“사도련의 첩자 중에서 가장 오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직위도 제일 높았지요.”

“그러니까 말이야. 저런 놈은 아주 확 죽여놔야 해.”

금청청의 말을 들은 모양인지, 단휘가 도를 내뻗어 왕진삼의 배를 퍽 쳤다.

“컥!”

왕진삼이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때, 현청각의 무인 하나가 서찰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단휘가 그걸 펼쳐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주 달필이구만. 대단해. 너무나 열심히 써놔서, 참으로 고맙게도 완벽한 증거를 얻었네. 이래도 발뺌할래?”

단휘가 멀찌감치서 왕진삼에게 서찰만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왕진삼은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오히려 독기 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날조다, 날조야! 어찌하여 강호의 의기가 이리 떨어졌단 말인가!”

마치 주변 사람 다 들으라는 투였다.

“참나!”

단휘는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이딴 놈들에게도 절차를 지켜야 한다니, 엿 같군. 그냥 잡아갔으면 편할 텐데.”

그때, 단휘의 뒤편에서 현청각의 또 다른 무인 천무결이 빠르게 다 가와 무언가 전달했다. 진우선이 그를 알아보았다.

“부대주님, 금조령(金義鈴)입니다.”

“오, 때마침 왔군!”

딸랑-.

딸랑-.

단휘가 금조령을 건네받자마자, 청명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지만 명확했다.

금조령은 벽조목으로 만든 신령 한 방울로, 사기를 느끼면 소리를 내는 기물이었다.

대신 그만큼 귀해서 단휘도 잠시 왕진삼을 묶어둔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지금 현청각 무인들이 바쁘게 정무맹과 장사 시내를 휘젓는 까닭이었다.

“자. 됐지? 압송해라.”

“이, 이익!”

왕진삼이 악귀 같은 얼굴을 하며 이를 갈았다.

자신이 꽁꽁 감춘 사공에 금조령이 반응했으니, 이제 더는 뻗댈 수 없는 까닭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금청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야 잡혀가네. 정말 사납다, 사나워.”

“현청각에서 고생이 많겠습니다.”

현청각에서 첩자들을 어렵게 색출하는 광경을 보며, 진우선과 금청청이 혀를 내둘렀다.

사실 이는 며칠 전에 만상각주 공야청이 세운 계책으로, 진우선이 마공과 사공을 백발백중으로 찾아내는 능력을 이용한 방식이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순식간이지. 혐의자가 정확했고, 조사는 철저했고, 그들이 현장에서 발각되었으니까. 역으로 증거부터 찾아서 조사한 뒤 현장을 덮치려고 하면, 그것도 한세월이야. 하늘의 별 따기지.”

금청청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진우선이 아니었으면, 왕진삼도 꼬리를 붙잡히기 전까지는 실체를 몰랐을 터였다.

그만큼 사람 속이 어떤지 알아내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근데 마공과 사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은 정말 찾아내기 힘들겠네요. 형일사는 정무맹 소속도 아니었고, 무공도 익히지 않아 아예 몰랐습니다.”

“그럴 땐 지금처럼 꼬리를 붙잡고 가야겠지. 그래도 마공이든 사공이든 무공깨나 익힌 놈들이 중책이었으니, 첩자 중 십중팔구는 이번에 색출될 거야.”

“그럼 나머지 한둘은요?”

“독한 놈들이지. 감쪽같은 놈이야. 사마에 속했으면서도 정도의 무공을 익혔거나, 안 익혔거나, 아니면 후에 변절한 거니까.”

“없을 순 없겠군요.”

“그래도 거의 찾기 힘들 거야. 그리고 일단 이번에 대부분 솎아낸 것만으로도 성과가 커.”

금청청의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은 독고월이 숨을 거둔 열흘 전부터 정무맹도 전체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며 혐의자를 파악했다.

사람만 해도 수천 명이고, 여기저기에서 각자의 업무에 전념하고 있어 나흘이 꼬박 걸렸다.

명단을 전달하고, 현청각에서 그들을 조사하는 데 닷새가 걸렸다.

그리고 오늘이 일망타진하는 날이었다.

상황을 보니, 계책은 성공리에 마친 듯했다.

금청청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며 진우선에게 물었다.

“어쨌든 나는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 너는 어떻게 할래? 바로 집으로 돌아갈 거야?”

“아직이요. 내일부터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집을 재단장하고 있어서요.”

“아! 탁 공자가 신경을 써준 모양이네? 가구들을 선물했다고는 들었었는데.”

“맞습니다. 탁 형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그럴 생각도 못 했는데, 고맙게도 연무실을 비롯해 집을 어찌 개선하면 좋을지 다 살펴주셨어요.”

진우선은 지난 닷새 중 첫날에 만금전장 장사지점장 우국신과 함께 머물 집을 알아보고 구매했다. 예전에 그가 추천했던 오석교 근처의 괜찮은 집이었다.

그러자 탁운비가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는 세간살이를 선물하더니, 집도 더 편하게 쓸 수 있도록 몇몇 부분을 새롭게 고치고 수리해 주었다. 그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면서도, 미적인 부분까지 놓치지 않았다.

아무튼, 그로 인해 진우선은 오늘밤까지 만상각에서 잠을 잘 예정이었다.

“그럼 같이 복귀하자. 가서 최종적으로 이번 일을 정리하자.”

“알겠습니다.”

***

그날 밤이었다.

만상각 소요정에서 진우선과 사예설이 만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차향이 그윽하게 흘렀다.

“진 공자, 축하해요. 내일 나간다고 들었어요. 금세 정말 많이 벌었네요. 집도 다 사고.”

“하하. 감사합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진 공자가 열심히 수고한 덕이죠. 우리 백혜원에서도 밤잠 설쳐 가며 쉼 없이 일하고 나면, 보상이라도 받고 싶어서인지 집을 먼저 사요. 물론 업무가 많아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잘 때가 많지만요.”

“아! 너무 안타깝네요, 그건.”

사예설이 진우선의 일에 진심으로 기뻐해 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더니 소요정에서 만나기로 한 본론을 꺼냈다.

“진 공자. 지난번에 고향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아봐달라고 했잖아요. 알고 보니 녹림이 벌인 짓이 맞았어요.”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리는 사이, 사예설이 설명을 이었다.

“녹림도가 「혼원귀일」 이란 책을 찾아갔다고 하더라구요. 그 내용까지 찾아내느라 한 달간 너무 힘들었어요.”

“사 소저. 진짜 정말 고맙습니다.”

진우선이 깊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사예설은 그간 짬짬이 만상각 지하의 장서고에서 칠 년 전의 기록을 찾느라 애를 많이 썼다.

처음 ‘녹림’과 ‘금채현’을 염두에 두고 기록들을 훑었을 땐, 그래도 열흘이 지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완벽하지 않았다.

기록에는 녹림도가 평소처럼 도적질을 했다는 투로 쓰여 있었는데, 사예설은 그 일이 벌어진 이유도 알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한 달 가까운 시일이 더 걸렸다. 안휘성에서 올라온 수없이 많은 전서구를 샅샅이 파헤친 까닭이었다.

그 집념과 노력의 결과로 녹림도가 「혼원귀일(混元歸一)」이란 책을 탈취했다는 한 구절을 찾아 낼 수 있었다.

“근데 「혼원귀일」이란 말을 보면 아마도 천문역학과 관련된 거 같은데, 그 이상은 알려진 게 없었어요.”

“그렇군요. 듣고 보니 참 허탈하네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돼요. 고작 책 한 권이 그 많은 사람보다 어찌 가치가 있겠어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진우선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책 때문에 진우선의 고향이었던 금채현 남촌은 인적 하나 남지 않은 폐허가 되었다.

문득 부모님을 비롯하여 강 씨 아저씨와 강 대인의 얼굴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가에 선했다.

“하아…….”

진우선이 한숨을 내뱉었다. 가슴 속에 먹먹함만 잔뜩 밀려오고 있었다.

“진 공자, 그간 고생 많았겠어요.”

사예설이 조심스럽게 진우선을 위로해주었다. 그러면서 진우선의 찻잔에 차를 다시 따랐다. 차를 마시라고 말하지는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희미했던 차의 향기가 다시 주변에 내려앉았다.

주변의 분위기와 차의 향기가 오감을 통해 은은히 스며들어와 진우선의 마음을 적셨다.

“고마워요, 사 소저.”

진우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답답함이 많이 가신 모양이었다.

사실 금채현 남촌에서 일어난 일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강호에는 그런 일들이 꽤 있었다.

녹림이 행한 짓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사도련이 지나가면 처참하게 무너진 곳이 많았다.

천마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이 일으킨 잔악무도한 사건들도 많은 피해자를 만들었다.

진우선은 문득 강호가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호는 멀리서 보면 별일 없이 흘러가는 듯한데, 가까이서 보면 슬프구나.’

사예설이 그런 진우선에게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진 공자는 정말 강한 무인이잖아요. 요 몇 달 사이에도 천하에 해악을 끼치는 무리와 잘 싸워왔고,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네. 그래야죠.”

진우선이 슬쩍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제가 계속 살펴보다 보니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어요. 관인들이 마을을 정리한 모양인데, 그들은 그때 잠시 다녀갔다고만 하더군요. 녹림의 무리를 쫓거나, 나라를 흉흉하게 만든 죄도 묻지 않고요.”

“……!”

진우선은 문득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마을의 화마를 진압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설마 그게 단순히 불길을 잡는 목적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은 ‘남촌’이라는 지명이 관부의 기록에서도 없어졌다고 해요. 그 이름을 쓸 만한 곳도 별로 없었지만 말이죠. 이후에 없앤 거 같아요.”

관부의 기록에서 사라졌으니, 진우선의 고향은 공식적으로 없다는 말이었다.

그에 진우선이 눈을 부릅뜨며, 차갑게 말했다.

“그럼 그 일이 관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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