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별이 지다 (1)
불청객의 마기(魔氣)는 흐릿했다.
그는 아직 백 장 밖에 있었는데, 너무나 은밀하여 기감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항마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다.
한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별안간 그 속에 가려져 있던 아주 희미한 사기(邪氣)도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에 벽사의 능력이 그 흔적을 잡아냈다.
[우선아. 네가 잘못 느낀 게 아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사마의 기운을 다 품고 있구나. 해괴한 일이야!]
게다가 기운을 감추는 것도 어지간해서는 알아채지 못할 정도입니다.
진우선이 불청객의 기예에 혀를 내둘렀다.
불청객은 이제 백 장 안으로 접근했으나 기감으로는 아직도 그의 접근을 감지하지 못했다.
항마와 벽사의 능력으로 마기와 사기를 알아챘을 뿐이었다.
여태껏 항마로 마기를 느끼면 불쾌하여 속이 메슥거렸고, 벽사로 사기를 느끼면 소름이 끼쳐 뒷골이 쑤시며 온몸의 털이 곤두섰었다.
그래서 지금 뱃속이 불편한 게 마기 때문이고, 머리가 아프며 몸이 으슬으슬한 게 사기 때문인 걸 명확히 분간할 수 있었다.
오행진기로 꽉 들어찬 육신이기에 그리 반응하는 것이리라.
어쨌든, 진우선이 독고월에게 그 사실을 얼른 전했다.
“맹주님. 불청객이 사마의 기운을 한 몸에 지녔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은밀하게 기운을 감춰서 저도 아직은 그의 존재를 명확히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허어-! 한 사람이 사마를 동시에 품었다니, 듣도 보도 못한 기사(奇事)로군. 게다가 진 호위가 어렵게 파악한 정도면 절대고수가 틀림없겠어. 대체 누구지?”
독고월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탄식을 흘렸다.
암중에 찾아온 기이한 절대고수.
내자불선 선자불래(來者不善 善者不來)라, 불청객은 결코 좋게 생각할 수 없는 자였다.
“근데 단전에 두 기운을 머금었다니, 생각할수록 정말 신기하군. 기운이 둘이라면 충돌하거나, 흡수되거나, 사라질 텐데. 진 호위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역시 의문입니다. 사마의 기운이 서로 다른데, 한 몸에서 어찌 공존할 수 있을까요?”
사공과 마공이 한 몸에서 공존하는 건, 각각의 공력이 한 단전에 있으면서도 제 특성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이를테면 빨간 물과 파란 물이 한 그릇에 담겨 있는데, 색을 유지한 채 섞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흐음-! 실전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음양이기를 동시에 다루어 태극을 이룬다는 양의신공(兩儀神功)이 떠오르긴 한다네. 하지만 사마의 기운은 음양이기와 달리 근본이 상이하여 함께 담기 어려울 텐데…….”
독고월은 어느새 불청객의 무공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맹주님, 그가 이곳으로 올 모양입니다.”
진우선이 독고월의 상념을 끊었다.
불청객은 기어코 천도관으로 오는 듯했다.
“역시 나를 찾아온 모양이군. 그렇다면 적문강일지도 모르겠어. 아무튼, 여기선 그를 상대하기 별로이니 앞마당으로 나가지.”
독고월이 짧게 추측하며, 진우선과 함께 천도관 앞뜰에 나왔다.
“진 호위. 조심하게. 나는 아직도 느껴지지 않네만, 기분은 영 좋지 않군.”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우선이 광륜검을 쥔 채, 독고월의 지척에 우뚝 섰다. 팔 뻗으면 바로 닿을 간격이었다.
잠시 후.
어둠에 동화되어 있던 흑의인이 대문 위로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진우선이 즉시 그의 존재를 알아챘다. 대문과는 삼십여 장 거리였고, 기감도 느껴지고 있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다니, 예상 밖이군.”
어둠 속에서 흑의인의 음성이 나직하게 전해져왔다.
독고월이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서 전했기에, 이것만으로는 그가 적문강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진우선은 잔뜩 경계한 채로 질문을 던졌다.
“누구냐? 여기에 왜 온 거지?”
“내 신법을 눈치챘을 줄이야. 이제 정무맹이 마냥 쉽지만은 않겠어.”
하지만 흑의인은 진우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감상만 흘렸다.
진우선이 슬쩍 그를 자극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사마의 공력을 함께 지녀서 자신만만한 건가?”
“오! 그것까지 알아냈나? 대단하군. 극경에 갓 올라서 아직 미숙할 줄 알았는데, 꽤 감각이 뛰어난 편인 모양이지?”
흑의인이 처음으로 진우선의 말에 반응하며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의 비밀이 들켰는데도 여유가 있는지, 시종일관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흑의인의 마음속에는 여유가 별로 없었다.
‘과연 진우선이로군. 쉬이 파악되지 않는다. 만만치 않겠어.’
그는 정무맹에 직접 온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큰 난관을 맞닥뜨려서, 어떻게 해야 뜻을 이룰 수 있을지 고민되었다.
‘맹주는 다 준비되어 있다! 정심과 육신이 다 무너져 신공마저 그를 지켜줄 수 없어. 이제 그를 가져가기만 하면 돼!’
그러나 계속 곁에 선 진우선이 거슬렸다. 그가 있어서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너무나 답답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진우선의 두 눈이 유난히 돋보인다고 느낀 찰나, 정광이 쏘아져 나와 자신을 꿰뚫었다.
‘설마?’
흑의인이 눈을 부릅뜨며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한순간에 불과했으나, 실체를 들켰는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급히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참이었다.
“……!”
진우선이 경악했다. 아연실색한 빛이 얼굴에 확연히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한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알아낸 사실을 바로 독고월에게 말했다.
“맹주님, 적문강입니다.”
“정말인가?”
“확실합니다. 예전과 사기가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공이 어느새 극사를 이루었으며, 마공도 깊게 익혔습니다.”
“허!”
독고월이 흑의인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예상한 바대로 흑의인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나 다름없는 적문강이었다.
독고월이 그에게 곧장 화를 쏟아 냈다.
“적문강, 네 이놈! 사악한 술수를 펼친 것도 모자라, 마교도의 탈을 쓰고서 나타났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바로 그 순간.
쐐애액-!
흑의인이 벼락같이 일 장을 내질렀다.
어둠 속에서 어둠보다 더 시커먼 마기가 공간을 뛰어넘어 독고월에게로 쇄도했다.
진우선이 곧장 독고월의 앞을 막아서서 검을 그어 내렸다.
솨아아-!
마기가 단박에 베어졌다.
마치 소멸하듯 기운이 사그라들어서, 주변에 충격파도 퍼지지 않았다.
그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흑의인이 재빨리 장력을 뿜었다.
순식간에 수백의 장력이 마구 겹쳐지며 진우선의 전면을 덮쳐왔다.
그에 진우선이 곧장 광영무의 일 초인 일광삼점파(日光三點破)를 쏟아냈다.
퍼퍼펑-!
굉음이 요란하게 터졌다.
섬전처럼 쏘아져 나간 세 줄기의 빛, 일광삼점파가 흑의인의 가공할 일격을 관통하여 부수며 난 소리였다.
빛살은 직선이었다. 막히지 않았다. 그래서 일광삼점파는 마공의 장력이 두텁게 세운 벽을 단박에 꿰뚫어버린 것이다.
한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저건!’
사특한 암경 한 줄기가 은밀하게 독고월에게로 쏘아지고 있었다.
독고월을 노리는 독아(毒牙)였다.
진우선이 재빨리 빈 손으로 장력을 쏘았다.
퍼억-!
일순간에 한껏 쏟아낸 벽사의 공력이 단박에 사특한 암경을 격추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고도의 공방이 오갔다.
흑의인이 휙 물러나 석 장 거리 앞에 내려섰다.
“후후. 제법이야. 오랜만인데 인사가 강렬하군.”
진우선이 그를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강렬한 인사는 네놈이 했지. 그리고 역용을 했나? 얼굴만 봐서는 전혀 몰랐겠군.”
진우선이 냉소적으로 물었다. 예전처럼 ‘적 당주’라 부르며 존대할 생각 따윈 없었다.
“진우선, 어떻게 나라는 걸 알았지? 신기하군. 아무도 나를 알아채지 못했는데.”
흑의인 적문강이 진우선의 말을 인정했다. 그로서는 오히려 의문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진우선의 뒤편에 있던 독고월이 호통 치듯 물었다.
“네놈. 적사안을 내게 왜 펼쳤느냐?”
“…….”
적문강이 잠시 놀란 눈으로 독고월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알아냈소? 정무맹이 이빨 빠진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호랑이는 맞았군.”
“광오하군. 감히 정무맹을 허투루 봤었다니!”
“내가 왜 신경을 써줘야 하지?
강호에선 실력이 중요한 거 아니오, 맹주?”
“이런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네놈의 목숨도 구해줬거늘!”
독고월이 일갈했다.
그에 적문강이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듯 말했다.
“후후! 그건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다 죽어 가는데도 그런 걸 따질 줄이야.”
“닥쳐라!”
진우선이 적문강과의 대화를 단박에 끝장냈다.
그는 독고월의 속을 긁으며 제 얘기만 했는데, 이런 대화는 언짢기만 할 뿐 백해무익했다.
샤아악-!
곧바로 힘껏 검을 찔러 들어가는 진우선에게서 빛이 터져 나왔다.
진우선은 광륜의 오행진기를 모두 끌어올리며 단숨에 검초를 펼치고 있었다.
광영창파의 기운이 끝없는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항마벽사의 능력까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힘이 단숨에 적문강의 앞과 옆을 봉쇄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신에까지 짓눌러 들어갔다.
검법의 예기가 심히 날카로웠다. 빛살에 스치면 베이고, 닿으면 잘릴 듯했다.
검광의 새하얀 빛들이 물샐 틈 없는 그물처럼 조여왔다. 빛 사이 사이의 작은 공백에도 기운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
적문강이 두 눈을 부릅떴다. 두려움이 엄습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희열이 가슴속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상대할 맛이 나지.’
적문강이 양손을 재빠르게 놀려 무수한 공력으로 허공을 수놓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더 시커먼 먹빛 마기가 쑥쑥 솟아나 진우선의 검에서 일어난 빛들을 마구 쳐 냈다.
하지만 절반은 막지 못했다. 광영무의 검초가 그의 공격을 넘어섰다.
피피핑-
그러자 어둠 속에서 희미한 핏빛 강막(聖幕)이 피어나 적문강을 둘러쌌다. 극사의 기운으로 펼쳐낸 막이었다.
“큭-!”
적문강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핏빛 강막을 수없이 두드리는 진우선의 공격이 절대 가볍지 않은 탓이었다.
“역시!”
그 과정에서 독고월이 짧게 외쳤다. 사기의 강막은 그가 적문강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주는 것이니까.
바로 그때!
적문강이 두 팔을 가슴팍으로 가져다 대더니, 일순간 고개를 숙였다가 확 치켜들었다.
눈에 검붉은 광채가 어린 게 보였다.
동시에 온몸에서 가공할 만한 사마의 기운이 줄기줄기 뻗쳐 나왔다.
콰콰콰콰쾅-!
그에게서 터져 나온 경력이 광영무의 검초와 마구 충돌하여 폭발했다.
광영무의 빛살이 비산했다. 사방팔방으로 튕겨 나가 담벼락을 부수고, 바닥을 뚫었다. 허공으로 치솟은 것은 잘게 쪼개지며 산화했다.
하지만 그걸로도 광영무의 연이어지는 검초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크윽!”
적문강이 작게 신음했다.
진우선의 공력 한 줄기가 핏빛 강막을 크게 뒤흔든 탓이었다.
막이 깨지거나 금이 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충격이 내부를 진탕 울리니, 신물이 나며 내장까지 울렁거렸다. 편치 않았다.
‘상대하는 게 생각보다 더 어려워!’
어느 정도 난관을 예상하고 왔으나, 극경의 실력에 항마와 벽사의 능력이 더해지니 까다롭지 그지없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안 되겠군.’
적문강이 재빨리 결론을 내렸다.
진우선과 첫 공방을 주고받을 때부터 강렬한 기운이 노출되고, 굉음도 터져나갔다.
그래서 밤을 지키는 정무맹도가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선과의 싸움은 당장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속 싸운다면, 시간이 흐르며 포위될 터였다.
그럼 사로잡힐 공산이 매우 컸다.
‘저놈 때문에 뭘 할 수가 없군!’
적문강이 진우선을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콰앙-!
적문강이 양팔에 공력을 끌어모아 진우선에게 힘껏 부딪치더니, 반탄력을 이용해 몸을 뒤로 휙 날렸다.
“어딜 감히!”
진우선이 바닥을 힘껏 박차고 날아올랐다.
아니, 날아오르려 했다. 뒤에서 들려온 소리만 없었다면.
“끄윽-!”
신음과 함께 독고월이 털썩 쓰러졌다. 그가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맹주님!”
“가…게, 진… 호위.”
독고월이 죽을 만큼 힘겨워하며, 간신히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잘못 따라갔다가는 맹주님께서 위험해지실지도 모릅니다. 그는 맹주님의 약해진 존체를 원하니까요.”
진우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알……겠네.”
독고월이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답했다.
그는 기식이 엄엄했다. 숨이 곧 넘어갈지도 몰랐다.
종전에 적문강이 펼친 사기의 강막을 확인하던 순간, 막대한 기파가 독고월을 휩쓸고 간 게 틀림없었다.
“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진우선이 곧장 독고월을 등에 업고, 천도관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