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외롭지 않다.
공야청이 천도관을 찾았다.
“맹주님, 맹 노사는 어제 뇌옥에 들어간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기록을 뒤져 보니, 천마교와 결탁한 지는 대략 십 년쯤 된 듯합니다. 행적이 그때부터 묘연했습니다.”
“그렇군. 십 년이나 되었어.”
독고월이 서재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공야청과 대화를 이었다.
“맹 노사가 장로원에 든 게 칠 년 전쯤이지 않았나?”
“맞습니다. 낙일무정검이 자신을 넘어섰다며, 원단을 맞아 진양각주직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잠마심법을 본격적으로 수련한 게 아닐까 예상합니다.”
“천마교의 신뢰를 쌓는 데 삼 년은 필요했겠지. 근데 우리가 감쪽같이 몰랐군.”
“제 불찰입니다.”
“아니야. 그게 어찌 공 각주의 탓이겠는가? 정무맹의 장로가 적과 내통할 거라 예상하기도 어려운데 말이야. 그리고 장로의 뒤를 파헤치고 추궁하기도 쉽지 않지.”
“그래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야청이 강직한 모습을 보이며, 제 뜻을 꺾지 않았다.
“허허. 공 각주 자네는 이런 사람이었지. 그래서 늘 믿고 맡길 수 있었어.”
독고월이 환하게 웃으며 공야청에게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고맙네. 그간 고집이 센 내가 여기까지 잘 올 수 있었던 건 자네 덕분이야.”
“맹주님!”
“공 각주,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만 해주게. 내일 탁 각주에게 맹주직을 넘길 수 있도록 준비도 부탁하네.”
“아-!”
공야청이 탄성을 흘렸다. 결국, 독고월에게서 이 말을 듣고야 만 것이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게. 자네는 그 누구보다 맹에 필요한 사람이 야. 나는 가더라도, 자네는 맹을 잘 보살펴주어야 해.”
“가슴이 먹먹합니다.”
“내가 자네에게 그만큼 영향 있는 사람이었군. 헛살진 않았어. 외롭지 않구만. 허허!”
“헛사셨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맹주님만이 강호에 의와 협의 버팀목이셨습니다.”
공야청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그런가? 자네가 그리 평해주니 고맙군. 그리고 너무 낙담하지 말게. 이제 그 역할은 진 호위에게 물려줄 거니까.”
“……!”
진우선은 뜬금없이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 호위에게 큰 기대를 걸고 계시군요. 사실 저도 내심으로는 그리 여기고 있었습니다.”
“허허허. 그랬군.”
“두 분 다 과찬이십니다.”
진우선이 다소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독고월과 공야청이 빙긋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맹을 잘 부탁하네, 공 각주. 그리고 이왕 온 김에 차 한잔하고 가게.”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곧 탁자에 앉았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차향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좋군. 자네는 차향이 어울리는 사람이야. 자네 집무실을 가면 풍기는 그윽한 차향이 참 좋았지. 그래서 나도 하나 준비해보았네. 마음에 드는가?”
“맹주님,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야청은 이 자리가 마지막인 걸 직감하고 말했다.
하지만 독고월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서호용정차라 하더군. 귀한 거 알지? 자네는 나에게 그만큼 귀한 사람이었네. 이렇게 직접 차를 내어줄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야.”
“맹주님…….”
공야청의 목소리가 젖어 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차를 계속 마셨다.
“갈 때 챙겨가게. 자네 주려고 비싸게 구해왔어.”
“……감사합니다.”
잠시 후, 공야청이 서호용정차를 소중히 받고서 천도관을 나섰다.
한 시진이 흘렀을 때였다.
독고월이 서재에서 서찰 두 통을 들고 나오며 진우선을 찾았다.
“진 호위. 자네에게 부탁할 게 있다네.”
“네, 말씀하십시오.”
“나중에 이 서찰들을 전해주게. 이건 태청도문(太淸道門)에 보내는 것이고, 이건 탁무위에게 보내는 것이라네. 태청도문은 태산에 있는 내 사문이고, 무위는 작년 겨울에 항주에 있다는 말을 들었네.”
“제가 직접 전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네. 그냥 보낼 수도 있겠지만, 자네에게 맡기는 게 안심되거든. 자네를 나 대신 보내는 것이네.”
“알겠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거군요.”
진우선이 서찰을 챙기면서 말했다.
“진 호위, 사실 나는 스물다섯 때 도문을 뛰쳐나왔어. 태산과 그 안의 작은 도문에서 벗어나, 넓은 강호에서 이름을 크게 날리고 싶었거든. 매일 반복하는 수련이 지루하기도 했고.”
진우선은 단단해 보이는 독고월이 그랬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정무맹에 들어와 수많은 격전을 치렀는데, 원하던 게 이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네. 잠시 내 삶의 기치를 잃고 방황할 때, 다행히도 무위를 만나 승부를 겨루고 정을 나누었어. 무위와 함께 의협심을 곧게 세우며 젊은 시절을 보냈지.”
독고월이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기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네. 천하가 참 녹록지 않더군. 나를 돕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적들은 더 많이 있었지. 그래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쁘지 않게 살아왔어.”
“이후로도 맹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저 역시 맹주님과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진우선은 요 며칠간 맹주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독고월의 삶을 지켜보았다. 그는 인간미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맹주님, 그럼 탁 대협께는 제 친우와 다녀와도 될까요? 만총이라는 친우가 그분의 제자이니, 같이 가면 반가워하실 겁니다.”
“오! 그럼 같이 다녀오게. 작년에 그의 제자가 호심당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한 번 듣긴 했었는데, 자네와 가까운 줄은 몰랐군. 허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나도 좋기만 하네. 그 건은 공 각주에게 말하면 호심당에서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독고월이 흐뭇하게 웃더니, 진우선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진 호위, 자네는 참 신기해. 칠 년 전에 고향을 잃어버리는 혈사를 겪었다던데, 지금도 그렇고 여러모로 마음이 따뜻한 게 느껴져. 정말 놀라워.”
“그간 좋은 인연을 만난 덕분입니다. 고아로 떠돌던 시절에는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도 많았습니다.”
“허허. 그랬군. 어느 귀인에게서 수학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훌륭한 스승님을 만났어.”
독고월은 진우선의 내력을 몰랐고, 묻지도 않았다. 그 역시 태청도문의 내력을 크게 밝히지 않으며 살아온 까닭이었다.
그래서 진우선이 불행 중에 좋은 스승을 만난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스승님은 정말 훌륭하십니다.”
“허허. 대단하시군. 나도 제자를 키울 걸 그랬어. 자네를 보니 그게 참 아쉽군.”
독고월이 빙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앞으로도 맹을 잘 부탁하네. 자네가 탁 각주를 많이 도와주게.”
***
그날 밤.
탁신이 천도관을 찾았다.
“맹주. 요 며칠 사이 심히 수척해지셨소.”
“탁 각주. 반갑네.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급히 하느라 수고를 좀 했지.”
“애쓰셨구려.”
탁신이 탁자에 앉으며 맞은편의 독고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기력이 거의 다한 게 눈에 확연히 보여 안타까웠다.
“고맙소.”
“무위의 일이 고맙나? 맹주직이 고맙나?”
“형의 일이 고맙소. 맹주직은 어차피 나에게 왔을 테니 말이오.”
“자신감이 넘치는군.”
탁신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포부가 컸고, 자신의 그릇 또한 잘 알았다.
“나도 그래서 무위의 일을 매듭지었다네. 장로원과 자네 사이를 좀 끊어두려 했지. 노사들이 맹의 일에 너무 간섭하면 안 좋으니까.”
“그런 거였소? 맹주의 심중에 깊이 남았던 일을 해결한 게 아니라?”
“허허. 자네는 참 직설적이군. 옛날에는 안 이랬는데.”
독고월이 탁신의 말을 부정하지 않은 채, 웃음만 흘렸다.
탁신이 술잔을 단번에 비우며 말했다.
“맹주는 그간 자기 사람을 잘 챙기지 못했소. 그건 정말 무능한 거요.”
쪼르륵.
독고월이 탁신의 말을 들으며, 그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래도 이리 정리하고 가니, 책임감은 있다고 할 수 있소. 그것마저 없는 이들이 천하에 부지기수니까.”
탁신은 자기 사람 챙기는 걸 중요하게 여겼는데, 독고월은 탁무위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여태까지 독고월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독고월이 결자해지를 해낸 까닭에, 지금은 독고월에 대한 마음이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맹을 잘 부탁하네.”
“부탁할 게 뭐 있소? 맹주가 뭐라 하든, 나는 내 협의를 지키며 살아갈 텐데 말이오. 맹주도 알겠지만, 내가 신정회를 이끌다 보니까 생각보다 잔인한 면도 있더이다.”
“하긴, 그랬지. 아무튼, 자네는 잘 해낼 거야.”
독고월의 말에 탁신이 곧바로 대꾸했다.
“맹주, 그리 걱정되면 나보다는 차라리 진 호위에게 부탁하시오. 극경에 이른 정파 최고수가 저기 있지 않소?”
“……!”
삼 장 옆의 다른 탁자에 앉아 있던 진우선은 자신의 이름이 뜬금없이 나오자, 잠시 그들을 바라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답을 들으려 한 건 아니었기에, 탁신이 곧장 말을 이었다.
“나는 그가 운비를 돕기로 했을 때만 하더라도 사지에 함께 뛰어드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더한 고수이더이다. 그때 사도련주 앞에서 처음 봤는데, 어찌나 대단한지 놀라서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소.”
“허허허. 그랬겠지. 난들 알았겠나? 공 각주도 그때까지 몰랐다더군.”
“맞소. 정무맹의 아무도 몰랐다더군. 우리가 등잔 밑이 어두웠지.”
독고월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간 고생하셨소.”
탁신이 그답게 독고월을 위로했다.
그에 독고월이 어색하게 웃으며 진심 어린 부탁을 꺼냈다.
“탁 각주, 나를 예전처럼 불러줄 수 있겠는가?”
“……!”
그 순간, 탁신의 표정이 확 굳어 버렸다.
정적이 흘렀다. 그저 독고월과 탁신이 서로를 하염없이 쳐다보며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잠시 후.
“……독고 형.”
“신아.”
두 사람이 힘겹게 서로를 불렀다. 가슴에서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허허. 이제 나는 여한이 없어.”
독고월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
한편, 짙은 어둠을 틈타 몸을 날리는 흑의인이 있었다.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척도 없었다.
그래서 정무맹을 지키는 그 어떤 무인들도 흑의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흑의인은 이전에도 정무맹을 다녀간 적이 있는지, 어렵지 않게 맹 내에 숨어들었다.
정무맹 내부는 곳곳마다 불을 밝혀 밤이어도 길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흑의인은 지붕 위, 담벼락 주변, 건물 뒤 등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라면 어디든 몸을 숨긴 채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그의 움직임이 극히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들은 바가 있는 까닭이었다.
-내일 숭의각주 탁신이 정무맹주 자리에 오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고월과 탁신이 한자리에 모인다는군요.
-진우선이 맹주 곁에서 항상 호위하고 있다고 합니다.
-흑괴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항마의 능력도 탁월한 절대고수라고 합니다.
-탁신이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마영님. 진우선 역시 마영님처럼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극경의 고수입니다. 마영님이 패퇴한다는 걸 상상할 수 없으나,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이 걸립니다.
흑의인, 마영은 풍노와 장노에게서 여러 정보를 들었다.
하지만 마영이 아는 건 그 정도만이 아니었다.
‘진우선! 그는 항마의 능력만이 아니라, 벽사의 능력도 갖춘 절대고수다. 그때 그 소년이 삽시간에 극경의 고수가 되었어!’
그는 이미 진우선의 벽사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없으리라.
마영이 곧바로 자신의 칭호를 만들어준 무공, 마영은형신법(魔影隱形身法)을 극성으로 펼쳤다.
기척과 기운을 모두 숨기는 것도 모자라, 형체마저 상대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경악할 만한 마공이었다.
이것이 마영의 최선의 수였다.
“……!”
천도관 내에 있던 진우선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온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자 흐릿한 마기가 느껴졌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천도관으로 오는 것일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비를 하는 게 좋았다.
“맹주님, 불청객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천도관 한복판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독고월이 즉시 눈을 떴다.
“어쩌면 그일지도 모르겠군.”
“마교도 같습니다.”
“그래? 그럼 누구지?”
독고월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교도라면 알 수 없었다.
최근에 맹여립을 옥에 가둬서 그런 것일까 생각해봐도, 딱히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진우선이 눈을 부릅떴다.
‘사마(邪魔)의 기운을 한 몸에 지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