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송림의 노괴들 (4)
송림에 난 숲길을 여섯 사람이 어색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장로원의 삼대봉공인 남궁무기, 제갈종도, 용화성이 좌측에서 움직이고, 송림을 방문한 독고월, 공야청, 진우선이 우측에서 걸음을 옮겼다.
정적이 흘렀다.
말도 없었다.
맹여립의 집은 남궁무기의 거처에서 반 각 거리밖에 되지 않으나, 이미 한참을 걸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분위기가 이리 껄끄러운 건, 종전에 그가 마기를 휘둘렀기 때문이리라.
그때, 남궁무기가 바로 옆의 진우선에게 말을 걸었다. 둘의 위치가 양쪽 무리의 접점이었다.
“진 호위. 급박한 순간에 자네가 있어 다행이었네. 저번에도 그랬지만, 자네의 무공에는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오더군.”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다네. 아까 보니 자네는 맹여립이 마공을 펼치자 곧바로 상대했는데, 이미 알고 있었는가?”
“처음부터 마주보고 있어서 기운이 급변하는 것도 바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진우선이 싱긋 웃으며 겸손히 대답했다.
남궁무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랬군. 근데 나는 얼핏, 맹여립의 마공을 진 호위 자네가 끌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혹시 정말로 자네가 그랬는가?”
“……!”
“……!”
남궁무기의 말에 제갈종도와 용화성이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떴다. 남궁무기는 추측처럼 물었으나, 확신하는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진우선은 이미 남궁무기의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맹여립이 마공을 익혔음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지 않은가.
“노사께서 보신 바와 같습니다. 그가 은밀한 마공을 익혀서 잘 드러나지 않는 듯했지만, 제가 익힌 무공에 항마의 능력이 있어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항마의 기운으로 자극하고 압박한 것도 맞습니다.”
“허-! 정말 그랬군.”
남궁무기가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예상이 맞아 기쁘면서도, 그로 인해 관계가 다소 불편한 진우선이 더욱 크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는 진우선을 알아갈수록 정말 상대하기 어렵겠다는 것만 깨닫고 있었다.
“진 호위. 그럼 자네는 상대가 마공을 펼치지 않아도, 익히기만 했다면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대화의 물꼬가 터지자 용화성도 진우선에게 말문을 열었다.
“맞습니다. 종종 그런 의문을 접하곤 합니다만, 저는 마공을 익힌 자를 만나면 거북한 느낌이 들고 악취가 나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허허-! 아까 자네가 펼친 검초에 마기가 소멸할 때부터 범상치 않았건만, 실로 대단하군. 내가 아는 항마공은 마공의 기운을 굴복시키는 데 이점이 있다는 정도인데 말이야.”
용화성이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진우선의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그가 지닌 항마의 능력도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이제야 왜 전전대 맹주였던 대연신검 황우립에게서도 보지 못한 광경을 진우선에게서 볼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혹시 그 무공이 뭔지 알 수 있겠는가?”
“제가 익힌 내공에 항마의 힘이 있을 뿐이라, 이름은 없습니다.”
“허! 이름이 없다니. 내심 무상항마력(無上降魔力) 정도의 이름은 나올 줄 알았는데! 강호에 이보다 더 뛰어난 항마공이 존재할 리 없으니 말일세.”
“노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이름을 한 번 고민해보겠습니다. 무상항마력은 참 대단해 보이는군요.”
“그러시게.”
진우선이 싱긋 웃으며 ‘무상항마력’을 기억에 새겼다.
그런 용화성 다음으로 제갈종도가 자신을 소개하며, 질문을 던져왔다.
“진 호위, 나는 제갈종도라고 하네. 나도 자네에게 하나 묻겠네. 다른 원로들은 어땠는가? 일단 아까 본 자들은 의심할 거리가 없는 게 맞는가?”
“네, 그분들의 내력에서는 특별히 이상한 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특별하다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건지 정확히 알려주게. 나는 그간 장로들을 아끼고 믿어왔네만, 아까 너무 큰 배신감을 느꼈네. 그래서 확인하고 싶다네.”
제갈종도가 아직 화가 덜 풀린 듯한 음성으로 캐묻듯이 물었다.
그는 공명심이 강했는데, 정도의 무인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일이 밝혀지자 치를 떨며 분개하고 있었다. 또한, 무엇이든 완벽하게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듯했다.
“특별히 마공도, 사공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공도?”
“그렇습니다.”
“그럼 진 호위 자네에게 벽사의 능력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합니다.”
“허! 들을수록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 정말 대단하네.”
깐깐해 보였던 제갈종도마저 탄성을 흘렸다. 진우선에게 물으면 물을수록 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만 알게 되는 까닭이었다.
그때, 공야청이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사들께 부탁드립니다. 진 호위의 내력을 외부로 알리지 말아 주십시오. 적이 아직 산재해있는데, 그들이 더 거세게 몰아칠까 봐 우려됩니다. 보다시피 진 호위는 혼자이지 않습니까?”
“공 각주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 정도는 우리도 잘 알고 있다네.”
제갈종도가 안심하라는 듯이 대답했을 때, 남궁무기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다 왔군. 저기 보이는 저 집이네. 근데 참, 진 호위는 왜 빨리 와보자고 한 건가? 혹시 그리 말한 이유도 있었나?”
“다들 느끼셨겠지만, 그의 마공이 상당히 강하고 짙었습니다. 하지만 내력이 다소 겉돌더군요. 직접 쌓은 내력이 아닌 듯했습니다.”
“허-! 그럼 뭔가 있겠군. 누가 어지럽히기 전에 우리가 가봐야지.”
남궁무기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가 진우선의 말뜻을 알아채고 얼른 맹여립의 집에 들어갔다.
반 시진 후.
남궁무기가 익숙하게 맹여립의 집을 샅샅이 털어내더니, 방바닥에 마련된 비밀공간에서 두레박만 한 목함 하나와 서책 세 권을 찾아냈다.
독고월이 한숨을 내쉬며 참담한 시선으로 앞에 놓인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허어! 진 호위의 말대로라면, 그는 이 환단으로 내공을 쌓았겠군.”
목함 안에서 꽁꽁 싸매진 스무 개의 환단이 나왔다.
정확한 이름을 몰라도 그것들은 마공을 쌓는 환단일 게 틀림없었다. 선단이나 영단이었다면 청아한 기운이 흘렀을 것이나, 아무런 기운도 흘리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게 잠마적공단인가 봅니다. 여기 나와 있습니다.”
잠마심법(潛魔心法)의 서책을 살피던 공야청이 바로 환단의 이름을 알아냈다.
잠마적공단(潛魔積功丹)은 잠마심법을 익히는 데 필수적인 환단으로, 이를 복용한 후 잠마심법을 운용하면 은밀하게 마기를 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쌓은 내공으로 아까 잠마쇄혼권을 펼쳤던 모양이구려.”
독고월이 잠마쇄혼권의 책자를 한 장씩 넘겨보며, 맹여립이 바닥에 널브러지기 전에 보였던 무공을 기억해냈다.
“공 각주, 이 이 비급이 훨씬 두꺼운 걸 보니, 이게 혈폭마강의 진본 같소. 그건 전반부 반절만 담았겠구려.”
용화성이 힘없는 목소리로 혈폭마강의 진위를 확인해주었다.
일련의 상황을 보며 허탈해진 제갈종도가 독고월에게 말을 걸었다.
“맹주, 아까 맹여립 그자를 투옥한다고 하지 않았소?”
“맞소.”
“당장 죽이는 게 어떻소? 나는 지금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마뜩잖을 심정이외다.”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말하는 제갈종도에게서 섬뜩한 살기가 배어 나왔다.
독고월도 땅거죽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경이 제갈종도와 다르지 않았다.
“후우-! 어디 노사만 그렇겠소? 나도 마음이 무너지고 있소이다.”
용화성도 독고월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맹주, 나도 참으로 면목이 없소. 그때 일은 정말 미안하오.”
“허허-.”
“아무리 못났어도 정도가 있지, 이런 놈이 장로원에 있었다니! 너무나 수치스럽구려.”
용화성도 머리끝까지 치미는 치욕에 마음을 주체할 바를 몰랐다.
그때, 공야청이 독고월에게 다가왔다.
“맹주님, 아무래도 맹 노사는 천마교와 내통했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잠마쇄혼권은 제가 알기로 삼십 년 전에 절강 지역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킨 옥면서생(玉面書生)의 무공인데, 천마교 내에서 결코 위상이 낮지 않습니다. 혈폭마강과 잠마적공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허허-.”
독고월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제 비통할 감정조차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탁무위의 누명을 벗긴 건 좋았는데, 맹여립의 죄가 밝혀지며 천마교와 내통했다는 사실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 까닭이었다.
“이놈, 감춰둔 돈도 꽤 많구려.”
남궁무기가 어딘가에서 묵직한 자루도 하나 발견하여 들고 왔다.
“허허-.”
마지못해 웃는 독고월의 모습이 참으로 고달파 보였다.
***
“몸이 무겁군. 벌써 피곤해졌어. 전에는 이런 걸 별로 못 느꼈었는데.”
해가 저물 무렵, 천도관으로 돌아온 독고월이 피로를 호소했다.
그에 진우선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맹주님, 몸이 너무 약해지셨습니다.”
“진 호위가 보기에도 그런 모양이군.”
독고월이 늘 머물던 자리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내 숨이 하루 이틀 남은 거 같군. 아침보다 반으로 줄었어. 이번에 심력을 너무 많이 쓴 탓이겠지. 그마저도 힘은 자네가 다 썼는데 말이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좀 후련하다네. 마음의 짐을 하나 덜었어.”
독고월이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맹주님, 좋아 보이십니다. 혹시 아직도 못 다하신 게 있으십니까?”
“뭐가 또 있겠나? 나머지는 자네와 공 각주가 능히 잘 해낼 텐데 말이야. 아! 탁 각주와 마음을 풀고 술이나 한잔하고 싶군. 예전에 무위가 있을 때 셋이서 가끔 회포를 풀고는 했는데, 무위의 일 이후로 오 년이나 자리를 가지지 못했어.”
독고월이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하더니 곧장 결심했다.
“지금은 힘들겠고, 내일 한잔하자고 해야겠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게 해야지 않겠나? 내일 밤까지라도 버티려면 얼른 운기조식해서 남은 진기라도 끌어모아야지. 그것도 어려우면 아침에 탁 각주를 만나야지, 뭐. 허허허.”
독고월이 의지를 다졌다. 내일을 살기 위해 밤새 운기조식할 생각이었다.
진우선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맹주님, 그럼 제가 기운을 한 번 더 보해드리겠습니다.”
“진 호위,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괜찮네. 자네는 왜 고생을 사서 하려는가?”
“맹주님의 존체가 신양에서보다 쇠하였으니, 기운을 보해드려야 사나흘은 움직이시는 데 문제가 없으실 겁니다. 저에게는 잠시의 수고이지만, 맹주님께는 천하의 그 무엇보다 귀한 시간이지 않습니까?”
“허허. 진 호위의 마음이 참으로 의로워. 말만으로도 너무나 고맙고. 사실 사나흘이라도 더 버틸 수 있다면, 당연히 욕심이 난다네. 하지만 그러자니 미안하군. 내 결심과도 다르고.”
몸이 쇠약해져 이제는 진우선이 손을 써도 사나흘밖에 시간을 벌 수 없었다.
하지만 독고월은 그마저도 감지덕지했다. 천명에 순응하기로 했으나, 그렇다고 살고 싶은 욕심이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진우선이 독고월의 뒤로 다가가 앉았다.
“맹주님, 그럼 이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 기운을 불어넣겠습니다.”
독고월은 뭐라 거절할 새도 없이 갑자기 들어오는 진우선의 내력에 온몸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게 먼저였다. 진우선의 순수한 마음과 정성에 눈물이 울컥했다.
“……알겠네. 정말 고맙군. 그럼 거절하지 않겠네.”
***
이튿날이 밝았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장사의 길거리에 있는 어떤 평범한 이층 전각에 두 손님이 찾아왔다.
“장노. 오랜만일세.”
“마영님, 오셨습니까?”
마영이 전각에 들어서며 집주인인 장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장노는 마영과 풍노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장노, 그런데 은월은 왜 안 보이는가? 나를 맞이하러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은월님은 어제 뇌옥에 갇히셨습니다. 저도 오전에 접한 사실입니다.”
은월은 장노가 모시는 천마교 흑암무영종의 마인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바둑을 두러 장노에게 찾아오는데, 오늘은 기별이 없어서 수소문해보니 이미 투옥된 상황이었다.
“뭐라고? 왜?”
“마공을 익힌 게 발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송림의 거처에도 이미 맹의 무인들이 깔려 있었습니다.”
“발각?”
마영이 눈을 부릅떴다.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근데 믿을 수 없는 게, 은월님이 왜 마공을 쓰셨을까요?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격전 속에서도 잠마공을 끌어올린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군.”
“저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알아보니 맹주가 다녀갔다는데, 애초에 은월님을 찾으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맹주는 왜 다녀갔는데?”
“오 년 전의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제저녁에 탁무위의 누명을 벗겨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계속 이야기를 듣던 마영이 다소 짜증난 기색으로 물었다.
“자네의 말에는 연관성이 하나도 없군. 이제 상황 이야기는 말고, 중요한 사실부터 말해보게.”
“죄송합니다. 아직 정황을 다 파악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장노가 급히 사죄하며 말을 이었다.
“맹주와 동행한 등봉조극의 고수 진우선이 은월님의 마공을 단박에 제압하고 쓰러뜨렸다고 합니다. 그는 마영님께서도 특별히 주의하셔야 할 자입니다.”
그 순간, 마영의 가슴속에 한줄기 섬뜩함이 스몄다.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진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