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30화 (130/225)

130.

#송림의 노괴들 (2)

만상각주 집무실의 탁자에 독고월과 공야청과 진우선이 앉아 있었다.

독고월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한참 바라보더니, 아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 각주. 오 년 전에 있었던 일 혹시 기억나오?”

“벽력신창 탁무위, 전대 숭의각주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맞소. 정확하오. 아직 잊지 않은 모양이구려.”

“맹주님도 잊지 못했는데, 제가 어찌 잊었겠습니까?”

“그랬군. 나와 같은 심정이었구려.”

벽력신창 탁무위는 만총이 호심당에 오기 전에 모셨던 스승이었다. 진우선은 갑자기 들려오는 벽력신창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일을 지금 장로원에 물으시렵니까?”

“그럴 생각이오. 그때 조사해보니, 무위의 집에서 죽어 있던 그 마교도 아이가 맹 노사의 시종이라 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시종 장구오는 당시 여덟 살이었는데, 삼 개월 정도 맹여립 노사 밑에서 시종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때 보여드린 증거도 가지고 있습니다.”

“준비해주시오. 이제 물을 때가 되었소.”

“맹주님. 장로원에서 오래되어 날조됐을 수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맹 노사도 잡아뗄 겁니다.”

공야청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혔다.

오 년 전에 숭의각주였던 벽력신창 탁무위의 실각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는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그 후 상황을 살펴보니, 장로원에 든 원로 맹여립의 간악한 술수였던 게 틀림없었다.

맹여립은 정무맹에서 있을 때 탁무위를 여러모로 시기했다.

벽력신창이라고 불리는 건 헛된 명성이고, 맹 내에서 손꼽는 혼원벽력창의 무위는 부풀려진 실력이라 말하며 깎아내리는 건 예사였다.

심지어 숭의각주였던 탁무위와 진양각주였던 자신의 대원들까지 비교하며 성을 낸 적도 있었다. 실력 좋은 무인들을 숭의각으로만 보내어, 성과를 독차지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맹여립은 그 정도로 탁무위에게 심각하게 시기심과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종 장구오의 행적에서 그의 술수를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니까. 그리고 그때 무위가 했던 말이 있지 않소? 공 각주가 확보해둔 것들과 함께 그 말에 힘을 실어준다면 충분하오. 그래서 무위의 명예를 되찾아줄 거요.”

“장로원에서 뭐라 하지 않겠습니까?”

“남궁 노사는 크게 반박 안 할 거요.”

이 일에 대한 독고월의 의지가 굳건했다.

공야청이 그걸 확인하고는 넌지시 물었다.

“그렇다면 탁 각주나 냉 당주에게도 한 번 확인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우리와 다른 증거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끼리 가도 충분하오. 그리고 이 일에 그들의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군.”

공야청은 독고월의 말을 들으며 그의 심중마저 알아챘다.

“탁 각주에게 맹주직을 물려주기로 완전히 마음을 굳히셨군요.”

“공 각주의 생각은 어떻소? 여전히 반대하오?”

“아닙니다. 맹주님의 뜻대로 하시지요. 저는 행위로써 사람을 보지만, 맹주님은 심지를 살펴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습니까? 맹주님이 깊게 생각하셨을 테니, 따르겠습니다.”

“공 각주가 반대를 안 할 줄은 몰랐는데.”

공야청이 순순히 대답하자, 독고월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공야청이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남궁 노사가 최근에 관 각주를 눈여겨보는지, 얼마 전에 백련보의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권법의 고수인 관 각주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지요.”

“허허. 그렇다면 보의가 아니라 족쇄인 것을.”

“관 각주가 백련보의를 받고서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의 마음이 그런 모양입니다.”

“쯧쯧. 관 각주는 맹주의 깜냥이 전혀 아닌데. 그는 딱 진양각주 자리까지만 어울려.”

“그렇습니다. 하지만 남궁 노사로서는 관 각주가 더 제 뜻대로 하기 편하겠지요.”

“그랬구려. 그래서 공 각주가 탁 각주를 반대하지 않았군.”

공야청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무맹을 위해서라도 관역산보다는 탁신이 맹주직에 더 나았다.

사실 탁신이 신정회를 이끌면서 맹주와 척을 지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딱히 흠을 잡을 게 없을 만큼 제일 나았다.

현청각주 여문탁 역시 사람을 두루 살필 줄 모르기에 각주의 직책이 알맞았다.

“그런데 적문강과 관련하여 장로원을 더 몰아붙일 생각 아니셨습니까?”

“그건 당연하오. 나는 장로원에서 나를 살해할 의도가 없다는 것만 확인해주었을 뿐이오. 그들이 내게 적문강을 소개해준 사실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잖소.”

“그럼 그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로원에서는 적문강을 어떻게든 찾으려 하겠지. 아니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하든가. 물론 그건 가능해 보이진 않지만 말이오.”

“그럼 당분간 삼대봉공을 비롯한 원로들은 목소리를 크게 못 내겠군요.”

“그렇소. 아무튼, 이 일에 대해 매듭을 짓는 건 공 각주에게 맡기겠소.”

“아-! 알겠습니다.”

공야청이 탄식을 흘리며 대답했다.

독고월이 적문강 사건을 맡기는 건, 그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 뜻을 알아챈 공야청으로서는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맹주님. 일단 보고 드리자면, 지난여름을 기점으로 맹의 출입 기록을 계속 확인하고 있으며, 특히 맹주님과 접촉한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흉수는 그가 맞소.”

“그리 말씀해주셨지요. 하지만 이참에 몰래 숨어들어온 세작들도 속아낼 참입니다.”

“고맙소. 공 각주가 정말 수고가 많구려.”

하지만 공야청의 계획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맹주님. 장로원 원로들이 이래저래 손을 뻗쳐 진행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이참에 그런 관습도 뿌리를 뽑는 게 좋겠습니다.”

“어떤 일들이오?”

“남가철방의 주문이 밀려서 병장기를 납품할 다른 철방을 선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홍칠우 노사가 뒷돈을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식자재와 관련해서도…….”

“허허. 홍 노사가 내당주 출신이었던가. 아무튼, 악습은 근절해야 하니, 그런 것들은 모두 공 각주가 맡아주시오.”

“알겠습니다.”

공야청의 대답으로 긴 대화가 끝났다.

독고월이 차를 마시며 복잡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자, 집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독고월이 진우선에게 물었다.

“진 호위, 자네가 들어보니 어떤가?”

“상황이 여러모로 복잡하지만, 맹주님과 각주님의 판단이 매우 타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처음 듣는 자네에게는 복잡하겠군. 사람과 사건이 잔뜩 얽혀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벽력신창 탁무위 대협의 일을 해결하는 게, 탁 각주님께 맹주직을 물려주는 데 어떤 영향이 있는 것입니까?”

진우선이 스스럼없이 독고월에게 물었다. 독고월이 이런 식으로 자주 묻다 보니, 어느새 그와의 문답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무위는 탁 각주의 형이네. 그는 의기가 넘쳤고, 실력도 뛰어났지. 나와도 뜻이 잘 맞아 숭의각주로서 내 손발처럼 움직여주었어. 덕 분에 정무맹의 기치를 천하에 드 높일 수 있었지. 하지만 들은 바와 같이 장로원에서 술수를 부렸고, 내가 지켜주지 못했네.”

“아-!”

“탁 각주는 그때 숭의각의 부각주였네. 나는 그의 눈앞에서 형인 무위를 떠나보냈어. 그때부터 탁 각주가 나와 척을 졌다네. 신정회를 만들어 제 사람을 만들며 챙기기 시작했고.”

진우선이 독고월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일련의 대화가 이해되고 있었다.

독고월은 탁무위의 사건을 풀어 냄으로써 탁신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맹의 미래를 맡길 의중이었다.

그때, 공야청이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신정회는 정무맹을 진정으로 걱정하여 모였다고 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하고 있네. 너무 좋게만 봐선 안 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각주님.”

공야청은 독고월의 뜻을 십분 이해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이 용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진우선도 그러길 원했다.

그 순간, 독고월이 진우선에게 말했다.

“진 호위, 자네도 탁 각주를 봐서 알겠지만, 그는 맹을 잘 이끌어나갈 능력이 있네. 다소 냉정하기는 하나 공사가 분명하고 의기가 있지. 그를 따르는 사람도 있고.”

독고월이 탁신의 장점을 먼저 말한 뒤, 우려되는 점을 꺼냈다.

“하지만 장로원과 너무 가까워. 탁 각주가 나를 멀리할 때 장로원이 깊게 다가갔으니까. 그 당시 탁 각주는 내가 무위를 지켜주지 못한 일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다네.”

“맹주님은 장로원과 탁 각주님을 분리하려는 목적이시군요.”

“정확하게 보았네. 지금 내당에는 장로원 원로들의 후손이 곳곳에 있지. 남궁경, 제갈영, 용천월 등 말일세. 이들은 삼대봉공의 직계손이라네.”

진우선은 독고월이 염려하는 바를 금세 이해했다.

탁신이 지금 바로 맹을 맡는다면, 장로원의 영향력이 상당할 터였다.

“진 호위, 사실 장로원의 악행은 파면 팔수록 나올 거라네. 악습도 많고, 남궁 노사와 제갈 노사가 세 치 혀로 간악한 짓거리를 많이 했어. 공 각주가 그간 모아둔 증거가 적지 않지.”

“맹주님의 말씀대로 상당해. 그간 장로원의 입김이 거세서 함부로 들추지 못했을 뿐이네.”

공야청이 독고월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에 독고월이 진우선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없어서 지금 다 손대지 못하니,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제게 말씀입니까?”

“그럼 자네 말고 그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나? 탁 각주가 맹주가 되면 그를 따르는 내당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텐데, 만상각에서 힘을 써줘야지 않겠나?”

독고월이 공야청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공 각주. 이번에도 내 뜻대로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해해주게.”

“맹주님!”

공야청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독고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계속했다.

“이제 만상각에는 진 호위가 있으니 힘든 일 많이 올 걸세. 미리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보다는 맹주님이야말로 마지막까지 헌신만 하다 가시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아무도 맹주님의 뜻을 모를지도 모릅니다.”

“자네들이 기억해주겠지. 그리고 의천무제의 삶이 그거면 되었지 않나? 허허허.”

“……!”

독고월의 나직한 말에 공야청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진우선도 잔뜩 아쉬운 음성으로 물었다.

“장로원에 맹주님 같은 사람은 정말 없을까요?”

“왜 없겠나? 다 있다네. 그간 천하의 안녕을 위해 애쓰느라 전심 전력을 다하지 못했던 무학에 전념하는 분도 계시고, 음률에 심취하거나 동정호에서 고기를 낚는 분도 계시다네.”

“다행이군요.”

“사실 삼대봉공조차 맹에서 활약할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무엇이 그들을 저리 만든 것일까? 참 아쉽군.”

독고월이 한탄하듯이 말하며 차를 마셨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앞에 과거가 흘러가고 있었다.

***

정오 무렵.

송림에 있는 남궁무기의 거처에 예닐곱 명의 노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장로원에 속하는 원로들이었다.

“다들 며칠만 옴짝달싹하지 말게. 맹주가 약빨로 버티고 있는데, 독이 잔뜩 올랐어.”

“알겠소이다, 남궁 노사.”

“그러지요.”

남궁무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노인이 도착했다.

“남궁 형, 나 왔소이다. 근데 분위기가 왜 이렇소? 우리 집은 괜찮았는데, 여기가 적습을 받은 것 같군.”

“그와 비슷하지. 어쨌든 때마침 잘 왔어. 자네의 지낭이 필요하던 참이야.”

“무슨 일 있었소?”

도착한 이는 제갈종도였다.

남궁무기는 곧장 그에게 지난 며칠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허허! 남궁 형,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을 왜 긁어 부스럼을 냈소?”

“제갈 아우, 나도 그 말을 했다네.”

“그게 나 혼자 좋자고 한 일이야? 미리미리 확답을 받아두려 한 거지.”

제갈종도와 용화성이 핀잔을 주자, 남궁무기가 버럭 소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다들 모여 계셨구려.”

독고월의 목소리와 함께, 대문 안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남궁무기가 그들을 확인했다.

정무맹주 독고월과 만상각주 공야청을 중심으로 무원주 이능운과 혜원주 금청청이 좌우에 있었다.

그리고 맨 왼쪽에 섰지만, 눈에 가장 거슬리는 극경의 고수 진우선.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

‘아니, 맹주가 갑자기 여기는 왜…….’

삼대봉공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사이 독고월이 입을 열었다.

“다행이오. 오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는데, 이리 모여 계시니 따로 찾아갈 필요가 없겠구려.”

독고월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하자, 남궁무기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맹주, 공사다망하여 바쁘기 그지없을 텐데, 그냥 우리를 부르지 그랬소? 당연히 찾아뵐 텐데 말이오.”

“남궁 노사, 그리 말해주니 고맙소. 하지만 노사들과 빨리 이야기하고 싶어 직접 왔다오.”

“무슨 일 있소?”

“노사들은 잘 알 테지만, 근래에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소. 그러다 보니 심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더이다.”

“어떤 일인데?”

남궁무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독고월이 웃음을 잃지 않고 대화를 이었다.

“맹 노사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었소.”

그 말에 원로 맹여립이 나섰다.

“본인에게 말이오?”

“맹 노사, 당신이 삼 개월간 먹이고 키우고 가르친 시종 장구오의 죗값을 이제는 치러야겠소.”

“허허. 장구오가 누구요? 처음 듣는 이름이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맹여립이 난생처음 듣는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런 맹여립을 쳐다보는 진우선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맹여립에게서 불쾌하고 역겨운 기운이 확연히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마공을 익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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