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송림의 노괴들 (1)
정무맹의 바로 뒤편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송림(松林)이 있는데, 장로원의 원로들 대부분이 거기에 머물고 있었다.
백 년 전에 정무맹이 생겼을 때, 협의가 드높았던 장로들이 송림에 하나둘씩 들어와 집을 짓고 산 게 그 시작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나고도 맹을 지키려는 뜻의 발로였다.
그게 관례처럼 굳어져, 이제는 장로 출신의 무인이 나이가 차면 송림에 들어왔다. 낙향하거나 떠나는 자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송림은 넓고 고요해 노년의 삶을 보내기 좋았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는 시끄러웠다.
그 중심에 남궁무기가 있었다.
“남궁 형. 탁 각주를 보고 왔소?”
남궁무기가 집에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용화성이 곧장 물었다.
“용 아우. 탁 각주가 세게 나오더군.”
“그렇소? 그가 뭐라 했소?”
남궁무기가 직전에 숭의각주 탁신과 나눴던 대화를 정리했다.
-노사.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길고 관계가 가까웠다고는 하나, 할 수 있는 게 있고, 아닌 게 있소. 이 일은 할 수 없소.
-내통과 맹주 살인 방조라 하셨지 않소? 그런데도 도와달라는 말씀이오? 미쳤소? 이건 파벌을 따지기 이전에 맹의 존속이 걸린 문제요.
-내가 아무리 패권에 욕심이 있다고 하나, 도리를 모르지는 않소. 맹이 있고서 우리가 있는 거요. 사도련과의 내통이나 맹주 살인 방조는 맹의 근간을 흔드는, 결코 묵시할 수 없는 죄악이오.
-오히려 내 뜻을 미리 말해두겠소. 장로원에서 맹에 해를 끼치려 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내 칼날도 당신들을 향할 것이오. 그때는 나를 원망치 마시오.
“그놈답군. 원래부터 대가 센 놈이었소. 그래도 자신만의 선이 있어 과함이 없었지.”
“용 아우! 자네는 대체 누구의 편인가? 왜 탁가 놈 칭찬만 하고 있어! 그놈을 그 자리에 앉혀준 게 누군데!”
“남궁 형, 그게 아니오. 그놈은 원래 이런 일에 나서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소.”
용화성은 정무맹의 요직을 거치며 십 년 넘게 탁신의 상관으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탁신의 성향을 상당히 알고 있었다.
남궁무기가 홧김에 말을 마구 지껄여댔다.
“맹의 어린 것들이 기고만장해졌어. 진우선을 믿고 아주 제 뜻대로 하려 해. 등봉조극의 고수가 대체 뭐라고!”
“허허. 근데 등봉조극의 고수면, 그럴 만하지 않소? 전전대 맹주 이후로 처음인 것 같소만.”
“그래봤자 극경을 향해 가는 고수 둘이면 상대할 수 있어. 우리 중에서 좀 나서면 해볼 만해.”
“상대할 수 있을 뿐이지, 무조건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럼 서넛이 덤비면 되겠지!”
“이번에 사도련주를 상대하려고 맹주와 탁 각주와 검후가 협력했는데, 동수였다고 하더이다. 그마저도 승기를 잡은 순간은 거의 없었다고 하고.”
용화성은 남궁무기의 말에 하나하나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에 남궁무기가 열이 뻗쳐서 용화성에게 버럭 소리쳤다.
“아니, 용 아우는 왜 자꾸 내 속을 긁어? 사람 미치게!”
“이렇게 흥분하여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오. 남궁 형.”
“열이 나는 걸 어쩌라고.”
남궁무기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는 성미가 괴팍하고 조급하여 쉽게 흥분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용화성의 말이 옳다는 걸 알기에 천천히 마음을 다스리며 호흡을 골랐다.
“후우. 그래도 이건 아니겠지?”
“다른 방법을 찾읍시다. 맹주에게 다 털어놓고, 우린 그런 마음 없었던 것으로 이해시키는 게 좋겠소. 그러고도 안 되면 그를 처음 데려왔던 왕 아우가 책임지는 게 맞소.”
“끄응-! 그 수밖엔 없나?”
남궁무기가 앓는 소리를 냈다.
최악의 경우, 맹의 무인으로 수십 년을 함께하고, 장로원에서도 오 년 넘게 함께해온 동료 왕동웅을 내쳐야 할지도 몰랐다.
장로원의 삼대봉공으로서 면목이 서지 않는 짓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달리 좋은 수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필요할까?”
“적문강 그놈에게 받은 건 다 내놓아야 할 거요. 우리만이 아니라 제갈 아우의 몫과 왕 아우의 몫도 다 내놓는 게 좋겠소.”
“제길!”
남궁무기는 언짢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 돈을 토해내고 싶지 않으나, 그럴 수 없으니 욕만 할 뿐이었다.
“근데 이래서는 탁 각주를 맹주에 앉혀봤자 소용이 없겠어. 정작 중요할 때 우리를 나 몰라라 하고 있지 않나?”
“예상한 것이지 않소?”
“그렇긴 하지만, 이리 매몰찰 줄은 몰랐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튼, 그건 복안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게나.”
“남궁 형, 그새 누구 하나 또 끌어들였소? 맹주직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또 있었소?”
“진양각의 관 각주가 욕심이 있지.”
“허! 관 각주가 말이오?”
용화성은 전혀 생각지 못했는지 혀를 내둘렀다.
진양각주 관역산은 신정회가 아니라, 맹주를 깊이 따르는 무인이었다.
하지만 남궁무기는 그의 욕심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용 아우, 이번에는 아이들을 불러봤자 큰 도움이 안 되겠지?”
“당연하오. 잘 알면서 왜 묻소?”
“그렇군.”
남궁무기가 계속 꾀를 내다가 물었다.
“근데 제갈 아우는 집에 갔잖아.”
“맞소. 이번에 사도련이 쳐들어 올지 몰라서 아들과 손자들 잘 있나 보러 갔소.”
제갈세가는 하북성 북부의 상양 융중산 자락에 있었다.
이번에 위험 예상 지역이었던 남양에서 삼백 리 길밖에 되지 않았고, 실제로 격전을 치른 신양에서도 오백 리 길에 불과했다.
그래서 제갈종도는 급히 제갈세가에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그의 몫은 누가 내지?”
“남궁 형이 내시오. 제갈 아우에게서 돈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남궁 형밖에 없소.”
“아, 진짜!”
남궁무기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서는 용화성에게 통보했다.
“아무튼, 내일 오전에 맹주를 만나러 갈 테니까, 용 아우가 왕 아우도 불러줘. 이번엔 같이 가야겠다.”
***
다음 날 오전이었다.
정무맹주 독고월이 남궁무기에게 준 사흘의 기간이 다 찬 날이었다.
송림을 나선 장로원의 세 장로 남궁무기, 용화성, 왕동웅이 천도관의 앞뜰에 다다랐다.
그때, 짙은 현기가 심혼을 적셔왔다.
후웅-!
동작이 큼직큼직하고 묵직하면서도 쾌검의 묘리를 살린 검법이 펼쳐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남궁무기를 비롯한 세 사람은 그 현묘한 기운에 심령이 흔들리는 듯했다.
“와-!”
“아-!”
“허-!”
세 사람이 잠시 넋을 놓고 검법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한평생 무공을 익혔건만, 지금 보고 있는 검법에 담긴 상승의 무리를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세 사람에게 독고월이 다가왔다.
“대단하지요?”
“맹주, 아침부터 이게 무엇이오?”
“등봉조극에 오른 고수의 무공을 꼭 보고 싶어 어렵게 청하였소. 노사도 알다시피 그건 내 오랜 염원이었지 않소?”
“그렇긴 하다만…….”
남궁무기가 독고월과 대화하면서, 왠지 모를 찝찝함에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하나 깨달을 수 있다면, 노사들께서도 진일보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용 노사와 왕 노사는 이미 무아지경에 드셨구려.”
“……!”
남궁무기가 재빨리 용화성과 왕동웅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독고월의 등장조차도 느끼지 못했는지, 눈앞에서 펼쳐지는 진우선의 검법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진 호위가 나를 위해 하나씩 보여주고 있었소. 이건 비홍검법이라더군. 복건성의 고수였던 비홍검객의 상승검법이라 했소.”
“그걸 어찌…….”
“숭의각 무의대에서 공을 세운 한 무인이 받았다 하더이다. 하지만 스승이 없어 수련이 어려웠는데, 진 호위가 가르쳐주었다더군. 근데 이 정도면 비홍검객의 진신절기가 복원된 걸 넘어 진일보했다고 해도 되겠구려.”
독고월이 진우선의 무공을 보며 감탄했다.
‘대단하다!’
남궁무기 또한 진우선이 펼치는 비홍검법을 보며 독고월의 말에 크게 동의했다.
남궁무기가 비록 일선에서 물러난 노고수라지만, 그래도 한평생 검법에 매진했기에 보고 느낄 줄은 알았다.
지금 진우선의 모습은 비홍검객 당사자라고 해도 믿을 터였다. 아니, 복건성을 넘어 천하를 진동시키고도 남았을 절세의 실력이었다.
‘과연 누가 이 자와 검을 섞을 수 있을까?’
그러던 중, 남궁무기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아뿔싸! 맹주가 그걸 노렸구나!’
진우선이 등봉조극에 올랐다는 말만 들은 것과, 그의 무공을 직접 본 것에는 체감상 천지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다 보고야 말았다.’
용화성과 왕동웅은 여전히 무아지경에 빠진 채, 진우선의 검법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독고월이 홀로 깨어 있는 남궁무기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남궁 노사, 여전히 검을 닦고 계시오? 예전에는 검을 늘 옆에 두셨던 걸로 기억하오. 무인은 임무에 나서기 전에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지. 진 호위는 노사가 보기에 어떻소?”
“허허-.”
남궁무기가 허탈하여 웃었다. 왠지 모르게 독고월의 말에 화도 나지 않았다.
“대단하구려.”
그저 감탄만 나왔다.
진우선은 표홀하게 움직이며 검을 있는 듯 없는 듯 다루었다. 이를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어찌 막을 수 있을지 답답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저게 끝이 아니오. 내가 진신무공 한 초식을 청했소. 사도련주를 패퇴시켰던 그 초식 말이오.”
“정말이오?”
“보면 알 거요.”
독고월의 말대로였다.
진우선은 비홍검법의 시연을 마친 후, 호흡을 한 차례 가다듬었다.
그리고 빛으로 화했다.
검이 빠르게 움직이며 순전한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막을 수 없는 물결이 끝없이 쏟아져 나와 사방을 메웠다.
물결 사이에 빛의 힘이 있고, 그림자의 굴곡이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물샐 틈 없는 천라지망을 구축하여 밀려들고 있었다.
“아-!”
독고월이 탄성을 흘렸다.
남궁무기도 넋이 빠진 채 바라보았다.
만약 검 앞에 서 있었다면, 막강한 기운이 숨통을 조여 왔을 것이다. 한없이 물결치니 어찌 막아낼지 막막했을 터였다.
그저 옆에서 보고 있는 게 다행일 뿐.
“후우-.”
그 순간, 진우선이 검을 거두며 숨을 내쉬었다.
잠시 무아경에서 빠졌던 남궁무기가 독고월에게 물었다.
“맹주, 저건 뭐였소?”
“광영무의 초식인 광영창파라 했소.”
“광영무라…… 허허허.”
남궁무기는 물론 용화성, 왕동웅도 ‘광영무’의 이름을 나직하게 되뇌었다.
잠시 후.
천도관 안에 그들이 자리했다.
독고월과 진우선의 맞은편에 남궁무기를 비롯한 세 장로가 앉아 있었다.
“맹주. 천룡상단의 외당주 적문강은 넉 달 전 상행에서 연락이 끊겼다고 하더이다. 따로 알아본 바로도 종적을 찾을 수 없다 했소.”
“하지만 알아주시오. 우리는 사도련과 내통하려거나 맹주에게 어떤 해를 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소. 다만 돈에 눈이 멀었던 탓이오. 맹주, 죄송하오.”
“맹주, 너무 죄송하오. 내 탓이 정말 크오. 강호를 거닐며 두루 벗을 사귀다가, 맹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 소개해드린 거였소. 결단코 다른 의도는 없었소.”
남궁무기와 용화성, 왕동응이 차례대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천도관에 들기 직전에 진우선의 진면목을 본 탓에 태도가 고분고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남궁무기가 전표 하나를 꺼내놓았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때 받은 기부금을 다 내놓기로 했소. 가장 애를 쓰고 수고한 건 맹주였는데, 인제 보니 우리가 맹주의 노고를 챙기지 않고 있었소. 정말 미안하오.”
“알겠소. 이게 얼마요?”
“만 냥이오. 나와 제갈 아우와 용 아우가 삼천 냥씩 받았고, 왕 아우가 천 냥을 받았소.”
“허허. 많이들 받으셨구려. 근데 고작 이거 받고 나를 팔아넘겼다니 허탈하구려. 기왕 받을 거 배포 있게 받지 그러셨소.”
독고월이 어이가 없어 실소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 일로 맹이 받은 게 만 냥이었소.”
독고월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얼굴에도 화를 가라앉히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무맹이 그때 받은 기부금이 만 냥인데, 장로원이 챙긴 게 만 냥이었다.
그에 남궁무기를 비롯한 세 장로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낯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근데 우리도 적문강이 그런 자일 줄은 정말 몰랐소. 알았다면 절대 그리하지 않았을 거요. 맹이 있고서 장로원이 있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남궁무기가 어제 들었던 탁신의 표현마저 가져다 쓰며 태도를 굽혔다.
용화성도 한마디 덧붙였다.
“맹주, 부디 장로원에 선처를 바라겠소.”
“이걸로 뭐가 해결되었겠소? 다들 알겠지만, 내가 죽기 직전이오. 그리고 적문강이 흉수인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소.”
독고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개적으로 알려진 건 적문강이 맹주에게 사공을 쓴 흉수로 유력하다는 추정뿐이었다.
사실 그가 흉수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아직 비밀이었다.
“근데 노사들의 가문에서 천룡상단과 계약을 맺어 여러 사업을 벌인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건 왜 빼놓은 거요?”
“그, 그 수익에 대해서도 맹에 당연히 내놓을 생각이었소. 인연을 끊는 것도 당연하고 말이오.”
남궁무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에 독고월이 선심 쓰듯 답했다.
“알겠소. 노사들께서도 이리저리 알아보고 결심하느라 여러모로 고생하셨을 거요. 그리고 적문강에 대해서 몰랐다고 하니, 살인 방조의 죄는 더 묻지 않겠소.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 일에 관해 전적으로 협조를 해주셔야겠소이다.”
“알겠소.”
“그러겠소이다.”
“고맙소.”
그리고 다음 날.
“진 호위. 나설 채비하게.”
“어디로 가십니까?”
독고월의 말에 진우선이 물었다.
지금의 모습은 예정에 없던 바였다.
“만상각에 들렀다가 송림으로 갈 것이네. 장로원이 고작 이번 한 번만 이랬겠는가? 맹에 여기저기 들러붙어서 많이 해 먹었고, 많은 짓을 저질렀어.”
독고월은 장로원에 맺힌 바가 많은 모양이었다.
“근데 진 호위 자네가 내 곁에 있을 때 해야 해. 시간이 별로 없지. 그러니 어서 가자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