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28화 (128/225)

128.

#의천무제 독고월 (5)

천도관을 나선 공야청이 곧장 창궁관으로 가서 하무백을 찾았다.

하무백이 방에서 나와 그를 맞이했다.

“노사를 뵙습니다.”

“만상각주께서 오랜만에 오셨구려. 이번에 고생 많았다고 들었소. 수고했소.”

하무백이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노사께 또 한 말씀 여쭙고자 왔습니다.”

“그러시오. 편히 말해보시구려.”

하무백이 맑은 눈빛을 보이며 사람 좋은 얼굴로 질문을 기다렸다.

그는 남궁무기와 동년배였는데, 시종일관 불편하기만 했던 남궁무기와는 정반대였다.

공야청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끼면서 질문을 꺼냈다.

“저는 일전에 노사께서 진우선에 대해 말씀해주셨던 게 아직 기억이 생생합니다. 맹을 위한 올바른 일이라면 그보다 믿고 맡길 사람이 없다고 하셨었지요.”

“천도관에서 했던 말이로군.”

“맞습니다. 그때 노사께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하셨지요.”

공야청은 그때 하무백의 말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진우선에게 빙화곡의 일도 맡겼었다.

“별걸 다 기억하는군. 그러고 보니 이번에 그 아이가 엄청난 실력을 보였다 들었네. 등봉조극의 수준이었다지? 허허허. 자네가 귀인을 얻었어. 맹에도 홍복이고 말이야.”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그래서 확인하고자 왔습니다.”

“확인? 무얼 확인한단 말인가?”

하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공야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창궁진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창궁진인? 그걸 왜 나한테 와서 묻는 건가?”

“왠지 노사님은 아시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우선이의 무공이 무엇인지, 어디서 익혔는지 알 수 없었기에 만상각에 온 날 물었지요. 그러자 창궁진인께 배웠다고 하더군요.”

“그랬군.”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야청은 만상각주이니, 사람을 들이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바였다.

“하지만 창궁진인을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누군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이의 말에 따르면, 도를 깨달아 하산한 분이시니 종적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천하를 살펴도 그런 분은 없더군요. 은거 기인이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토록 작은 흔적조차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무공에 현기가 넘치다 못해 등봉조극에 달해 있으니, 각주로서는 간과할 수 없었겠구려.”

“정확하십니다.”

하무백은 공야청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또 들은 바는 없소?”

“우선이에게 광영무를 가르치신 뒤, 선도를 찾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허허허.”

하무백은 공야청의 대답을 들으며, 자신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가늠했다.

그의 머릿속에 진우선이 창궁관에 들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목격한 건, 전설로만 전해 지던 무천 조문신의 패왕금룡신공이 진우선에게 전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창궁관을 굽어 살피는 존재를 심어로 듣고 희미한 빛무리로나마 접견하지 않았던가.

‘분명 이름을 밝히지 않고자 하셨지!’

하무백은 아직도 심령에 전해진 그분의 뜻이 생생히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인연이 이어진 진우선이 창궁진인의 이름을 밝힌 모양이니, 그건 상관없으리라.

“허허. 그랬군. 과연 그랬어.”

“노사께서는 아시는 바가 있으시군요.”

하무백이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그건 아는가? 만상각주 자네는 지금 창궁관에 와서 창궁진인에 관하여 묻고 있다네. 허허허.”

“……설마!”

공야청이 눈을 부릅떴다.

한 존재에 대한 전설이 뇌리를 번뜩이며 스쳐 간 까닭이었다.

그를 한두 번 떠올린 적은 있었다. 하지만 외호가 비슷할 뿐, 당대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배제했었다.

“삶을 여태 살아오다 보니 때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더군. 나는 인연이란 것도 종종 그렇다고 생각하네. 허허허.”

하무백이 그날의 기억을 반추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네. 더는 언급할 수 없음을 양해해주게. 또한, 자네도 그러길 바라네.”

***

남궁무기와 공야청이 떠난 천도관은 한없이 고요했다.

천도관 한복판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독고월은 눈을 감은 채 운기행공에 들어갔고, 진우선은 소리 없이 움직이며 천도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허허. 이곳은 오랜만이구나.]

검노야가 천도관 내부를 천천히 다니면서 회상에 젖었다.

이곳에서 조문신과 강호의 평안을 위해 밤낮없이 고심하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시간은 벌써 백 년이 흘러 사람은 간데없고 전각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진우선은 이미 독고월로부터 천도관 내부를 둘러봐도 좋다는 말을 들었기에, 검노야를 뒤따라 커다란 서재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명화와 명필로 만든 족자들이 여럿 걸려 있었다.

검노야가 일필휘지로 내려쓴 한 족자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음미하자, 진우선도 그 앞에 섰다.

천도무친 상여선인

(天道無親 常與善人)

-하늘의 도는 공평하여 특별히 친함이 없으니, 항상 선인의 편을 든다.

[문신이 썼었지. 천도관을 세우며 적어 내려갔었다.]

‘아! 이래서 천도관이었군요.’

진우선이 검노야의 말을 들으며 글귀를 보았다.

족자 속 여덟 자는 부드러운 필체 속에 강인함을 품고 있었다.

진우선은 문득 검노야와 초대 정무맹주 조문신이 어떤 뜻으로 강호를 종횡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여기 있었군.”

두 시진 가량의 운기행공을 마친 독고월이 서재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드는가? 하긴, 자네와 잘 어울리겠어. 초대 정무맹주께서 쓰셨다더군.”

“그렇군요.”

진우선이 독고월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른 족자를 가리 키며 말을 이었다.

“진 호위, 이건 어떤가? 나는 이쪽이 늘 마음에 들더군.”

소인측이신순리 성인측이신순천하

(小人則以身殉利 聖人則以身殉天下)

-소인은 이익에 몸을 희생하고, 성인은 천하에 몸을 희생한다.

“맹주님의 마음을 담은 듯합니다. 남궁 노사와의 일을 생각하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 제대로 알아챘군. 맞네. 내가 써서 걸었지. 맹주가 되고 나서 고뇌한 적이 많았는데, 이걸 보며 마음의 중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어.”

독고월이 흐뭇하게 웃으며 자신이 서재에 걸어둔 족자를 바라보았다.

필체가 그를 닮아서인지 위풍당당해 보였다.

독고월이 문득 호기심에 중얼거렸다.

“진 호위, 자네가 품은 뜻은 무엇일지 궁금하군.”

“아! 저는 아직…….”

진우선이 난데없는 그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독고월이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말하지 말게! 나는 지금 말하라는 게 아니었네. 자네의 삶은 이제 시작이지 않은가. 때마다, 시마다 옳다고 여기며 나아가야 자네의 도(道)가 완성되겠지. 그러니 지금 말하여 의미를 짓지 말게. 자네의 도가 그 말에 국한되거나, 도가 아니게 될까 봐 우려되네.”

“아! 알겠습니다.”

독고월은 자신의 호기심으로 진우선의 도를 방해할까 두려워 얼른 화제를 돌렸다.

“자네의 일상이 궁금하군.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가? 오늘은 어땠나?”

“음…… 오늘 아침에 월봉을 많이 받았습니다. 집을 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늘은 그 생각을 좀 했습니다.”

“허허. 좋군. 이번에 크게 활약했으니, 각주가 넉넉하게 줬겠어. 어떤 집을 구할 생각인가?”

“저번에는 연공실이 있는 집을 얻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연무장이 있어도 좋겠다 싶습니다. 만상각에서는 수련에 집중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렇겠군. 만상각엔 수련할 만한 장소가 없지.”

독고월이 진우선의 상념에 흥미로워했다.

진우선은 그의 말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맹주님은 이곳에서 지내시는 게, 마냥 편하지는 않으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네. 여기서는 천지의 도를 생각하게 되고, 성인의 도를 고민하게 되지. 그래서인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자네가 부럽군.”

“아!”

진우선이 문득 탄성을 흘렸다.

독고월이 숭고한 삶을 감내하고 있으나, 그게 마냥 순탄한 건 아니니었음을 느낀 것이었다.

“아무튼, 진 호위는 아쉽겠지만 집 얻는 걸 며칠만 미뤄주게. 한 열흘 정도? 그쯤이면 될 걸세.”

“맹주님…….”

“이미 느끼고 있는 모양이군. 하긴, 자네를 어떻게 속이겠나? 허허.”

진우선이 말끝을 흐리자, 독고월이 슬쩍 웃으며 눈을 감았다.

열흘은 그의 숨이 붙어 있을 거라 예상되는 기간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짧을 수도 있었다.

“왕 당주가 그러더군. 자네의 기운을 날마다 받아 연명하면서 등봉조극에 오르라고 말이야. 그러면 환골탈태하여 정심이 깨진 것도 새로워질 수도 있다고 하더군. 물론 이것도 가능성이 있을 뿐인 거고, 정작 내가 등봉조극에 언제 오를지는 기약도 없지.”

독고월이 아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나도 마음 같아선 진 호위 자네를 붙잡고서 끝없이 묻고 배워 등봉조극에 오르고 싶다네. 하지만 그건 내 역할이 아닌 걸 깨 달았네. 순리도 아니지.”

“힘든 결정을 하셨군요.”

진우선은 독고월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더 안타까워졌다.

그는 생명이 다할 날을 알고 있으며,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다.

“진 호위, 나를 너무 불쌍히 보지 말게. 나는 괜찮다네. 천명은 하늘의 명령이고, 내 수명 역시 하늘로부터 나온 것이야. 자네 덕에 비명횡사하지 않고 이렇게 마무리할 시간을 얻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네.”

독고월이 활짝 웃었다. 그는 진심으로 천명에 순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네에게 해줄 말이 있다네. 적문강이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했던 말이 있었어.”

“그게 무엇입니까?”

“그는 무언가가 안 된다고 하더군. 정심이 깨졌지만, 정파의 신공이라 잘 안 된다고 했던 거 같네. 다만 그가 무얼 하려 했는지를 모르겠네. 그건 내 기억 밖이었던 모양이야.”

독고월이 태을무진신공을 대성했기에 그의 흉계를 능히 견뎌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심이 그냥 깨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부서졌기에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자네를 호위로 불렀다네. 때마침 우리에게도 현기가 가득한 극경의 고수가 있어 그를 상대할 만하겠다 싶었지. 근데 아까 벽사의 힘으로 물리친 적도 있다고 하니, 더없이 든든할 따름이네.”

“저야말로 그의 실체를 알고 나니, 너무나 화가 납니다. 맹주님이 이토록 고생하셨는데…….”

“나는 괜찮다네. 그리고 빙화보심단도 자네가 구해줬었지? 이제야 말하지만 정말 고마웠네. 덕분에 큰 힘이 되었어.”

***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남궁무기는 용화성이 건네준 서찰을 보며, 당황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용 아우. 이게 정말 사실이란 말인가?”

“남궁 형. 본 문에 급히 의뢰하여 정확히 알아 온 거요. 남궁 형이 직접 알아봐도 똑같을 거요.”

용화성의 출신가문인 비천용문은 강서성 남창에 있어, 안휘성 천주산 자락에 있는 남궁세가보다 가까웠다.

그런 이유로 남궁무기가 용화성에게 급히 알아봐 주길 부탁한 게 있었다.

-천룡상단 외당주 적문강은 넉 달 전 상행에서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 천하 어디에서도 그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서찰을 쥔 남궁무기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게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소?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이러면 어쩔 수 없군. 다 뒤집어씌우는 수밖에. 실종된 거면 이미 숨이 끊어졌을 거야. 지금 천하가 어떤 세상인데.”

“그가 적사안을 펼친 게 사실이라면, 그만한 고수가 연락이 끊긴 정도로 설마 죽기야 했겠소?”

용화성의 추측이 매우 타당했다.

남궁무기도 그걸 알았지만,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며칠만 버티면 되는 거야. 그때까지만 이유가 합당하면 돼.”

“허허. 맹주가 잘도 믿겠소.”

용화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남궁무기는 기어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탁 각주를 만나고 와야겠어.”

***

그 시각.

저 멀리 남쪽 광서성에서는 두 사내가 남녕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풍노. 이번에 정무맹주가 사도련주에게 깨져서 죽기 직전이라더군.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마영님.”

그들은 마영(魔影)과 풍노였다. 십만대산에 있는 천마교 흑암무영종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때가 되었어.”

“맞습니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없습니다. 천하의 대운이 마영님께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건 아직 정확히 모르지. 사도련주와 동수를 이룬 정무맹의 고수는 예상한 바가 아니었잖아. 그가 변수가 될 수 있다.”

“그건 그렇습니다.”

마영은 즐거워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지존께서 폐관수련을 하고 계셔서 신경 쓸 거 없이 다녀올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은 맞지. 다행이야.”

마영과 풍도 둘 다 음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서로 닮아 있었다.

“지존은 이미 극마를 넘어섰는데도 부족하다 여기는 모양입니다.”

“무공에 미친 거지. 고금에 유례가 없던 탈마경에서의 무공도 창안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천재긴 천재야.”

두 사람은 천마에 대해 감탄을 늘어놓았다.

지존은 천마교의 절대자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때, 풍노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마영님. 근데 이번에 장사로 갈 때, 상단에도 기별하실 겁니까?”

“아니. 그럴 생각 없어. 어차피 천룡상단은 나 없어도 잘 돌아가고, 상단주도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니니까 문제없을 거다. 우리는 이쪽에만 집중하자.”

마영이 단호하게 말하더니, 풍노와 함께 정무맹이 있는 장사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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