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26화 (126/225)

126.

#의천무제 독고월 (3)

이튿날 아침.

진우선이 만상각 이층의 자기 방을 나섰다.

‘잘 마치고 돌아왔구나.’

하룻밤 자고 난 후에야 복귀한 게 실감났다.

만상각의 고요한 분위기는 특유의 안정감이 있었다. 꽤 오랜만이었다.

진우선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삼 층에 올라가, 어젯밤에 언질 받은 대로 곧장 백혜원주의 집무실을 찾았다.

백혜원주 금청청이 활짝 웃으며 진우선을 맞았다.

“잘 쉬었어? 얼굴이 밝아 보이네.”

“네, 잘 쉬었습니다. 그래도 잠은 제 방에서 자는 게 편하네요. 하핫.”

진우선이 가볍게 웃었다.

“간밤에 네 임무 성과를 정리하면서 엄청나게 놀랐다. 진짜 대단해.”

금청청은 그간 전서구를 통해 진우선이 이뤄낸 소식을 들으며 연신 감탄했었다.

한데 지난밤에 진우선의 성과를 정리하다가 그마저도 일부에 불과한 걸 깨닫고는 경악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순진무구해 보이니, 너무 괴리감이 느껴지네. 사람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금청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우선은 등봉조극에 오른 무인이었다. 이번에 사도련주를 홀로 막아내며 밝혀진 사실이었다.

그건 곧 진우선이 정무맹의 최고수라는 말이었다.

지난 임무들에서 실패한 적이 왜 한 번도 없었는지 절로 이해될 정도였다.

하지만 실체는 열일곱의 청년에 불과했다.

금청청으로서는 지금 직접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다.

“혹시 반로환동한 노선배인 건 아니지?”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고수는 강호의 풍문 중 하나였다.

내공이 지극히 깊고 깨달음이 하늘에 닿으면, 노인의 육체도 재구성되어 어려진다는 말이었다.

진우선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이 계속 생각났다.

“반로환동 아닙니다. 그저 인연이 닿아 상승의 무공을 배웠을 따름입니다.”

“너도 각주님과 똑같이 말하는구나. 각주님이 네게 선도의 인연이 닿았다고 말씀하시던데.”

진우선의 해명에 금청청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아침부터 널 부른 건 월봉을 주려고 그런 거야. 지난달에 임무가 바쁘고 일정이 안 맞아서 월봉을 못 받았잖아. 그래서 너 온 김에 이번 달 것도 얼른 주려는 거였어.”

정무맹은 매달 말일에 월봉을 주는데, 이번 달은 말일이 아직 엿새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미리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걸 위해 금청청은 간밤에 진우선의 실적을 정리한 것이었다.

금청청이 서랍장에서 전낭 하나와 종이들을 꺼냈다.

“종이 하나는 전표고, 하나는 두 달 치 월봉의 명세서야. 액수가 큰지라 정확히 할 필요가 있어서 이번에 특별히 내용도 적어놨어. 보면 알겠지만, 총 일천육십 냥이야. 전표는 전장에 맡기면 원하는 만큼씩 빼서 쓸 수 있고.”

“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얼떨떨하여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와 전표를 받았다.

지난달 월봉은 총 육십 냥이며, 이중에 삼십 냥이 파사불주에 대한 특별수당이었다. 그리고 이번 달 월봉이 천 냥이었다.

이에 대해 금청청이 깨알같이 항목들을 적어두었다.

칠성홍옥대법을 막고, 악중뇌 사마광후와 칠사를 전멸시키고, 사중효 등자경을 보내버리고, 사도련주를 쫓아냈고, 정무맹주를 응급처치한 것까지 거의 다 적혀 있었다.

“아-!”

진우선이 희미한 숨소리만 흘렸다. 가슴에 무언가 벅차오르는 듯도 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말도 채 잇지 못했다.

천 냥은 상상도 못한 금액이었으니까.

“지금 모습을 보면 열일곱이 맞는 거 같네.”

금청청이 진우선의 놀란 모습이 이해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직 안 끝났어. 이건 탁 공자가 지급하는 이백 냥이야. 너 혼자 다 한 거나 마찬가지여서, 각주님이 전부 주자고 하셨어.”

탁운비의 청탁금이 고스란히 진우선에게 전해졌다. 전낭은 상당히 크고 묵직했다.

“부자 된 걸 축하해. 나도 이런 월봉은 집행해본 적이 없어서 너무나 놀랍더라. 원래는 오십 냥 넘기도 힘든데 말이야. 덕분에 재밌는 경험을 했어.”

진우선은 갑자기 들어온 목돈에 놀라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집을 살 수 있겠어.’

그때, 금청청이 진우선의 상념을 깨트렸다.

“그리고 너 오면 각주님이 보자고 하시더라. 지금 바로 가자.”

“알겠습니다.”

품이 두둑해져 한껏 기분 좋아진 진우선이 금청청과 함께 만상각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

“신양 임무는 정말 수고 많았네. 회복은 잘했는가?”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월봉도 잘 받았지?”

“네.”

그렇게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시작한 공야청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자네를 부른 건 임무 때문이네. 어제 막 복귀했으니 숨 돌릴 틈을 줘야 하지만, 바로 임무가 생겼어. 맡길 사람이 자네밖에 없더군.”

“괜찮습니다. 어떤 임무입니까?”

“맹주님을 호위하는 것일세.”

“맹주님을요?”

진우선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금청청이 놀라서 되물었다.

정무맹주가 정무맹에 돌아왔는데, 호위가 필요하다는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혜원주. 자네까지는 이 일을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함께 부른 거였어.”

“말씀해주시죠.”

금청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공야청이 진우선을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자네는 맹주님이 사술에 당하셔서 정심이 깨졌다는 건 알고 있나?”

“그 말은 처음 듣습니다. 하지만 무엇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렇군.”

진우선은 ‘정심이 깨졌다’는 말에서 공야청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다.

독고월에게 급히 내력을 불어넣었는데, 그때 심(心)이 처참하게 깨져 있었던 까닭이었다.

사도련주의 공격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럴까 싶었는데, 그 원인이 사술이었던 모양이었다.

“맹주님은 적사안에 당하셨네. 하지만 사도련주는 자기가 펼친 게 아니라면서, 그조차도 의아해했다더군.”

공야청이 독고월에게서 들은 바를 진우선과 금청청에게 조심스럽게 전했다.

“맹주님이 그의 말을 되새겨 보셨지. 적사안은 사파에서도 사도련주와 필적할 만한 고수만이 펼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으셨네. 사실, 그런 고수였기에 맹주님이 당하셨겠지.”

“그런 사도의 절대고수가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혜원주. 혹시 적문강 기억나는가?”

“네, 기억납니다. 천룡상단 외당주, 적문강. 그런데…… 설마!”

“그는 지독한 사공에 당했다며 지난여름에 찾아와서 맹주님을 만났어. 맹주님이 정심하고 웅혼한 내력으로 그를 치료했고.”

“그 과정에서였습니까? 그렇다면 장로원의 음모일 수 있습니다. 분명 천룡상단의 적문강은 장로원에서 데려왔었습니다.”

“맞네. 천룡상단에서 정무맹에 막대한 기부금을 내기로 했으니, 그 정성을 봐서라도 적문강을 맹주님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었지.”

“그놈들도 다 같이 먹었지 않습니까? 게다가 맹주님을 해하다니요!”

금청청이 분심을 터트렸다.

정무맹이 받는 기부금에서 그들이 적문강을 소개했다는 명목으로 상당한 금액을 가져갔었다.

어디 그뿐일까? 그간 장로원은 이 일처럼 교묘하게 여러 방식으로 정무맹의 행사에 간섭하며 신경을 거슬려왔다.

한데 정무맹주가 사술을 당하게 하다니!

이건 간섭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무맹을 망하게 하려는 심보나 다름없었다.

그에 공야청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자칫 옆으로 샐 수 있는 대화의 흐름을 조율했다.

“아무튼, 맹주님은 적문강 그가 적사안을 펼쳤다고 하셨네. 또한, 정심이 덜 깨져서 아쉽다고 말했다더군. 그때는 심히 혼미하여 아무런 기억도 안 났는데, 이제야 떠올랐다고 하셨네.”

“제길!”

금청청이 불평을 터트렸다.

“아!”

진우선도 절로 탄식을 흘렸다.

그에 공야청이 물었다.

“우선. 자네도 알던 사람인가?”

“저도 지난여름에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진우선이 섬찟하고 불편했던 적문강과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는 일순간 눈이 뱀처럼 찢어지면서 사특한 빛을 뿜었습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했고, 어마어마한 사기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게 워낙 사나운 사공에 당해 발작이 일어난 거라 말했습니다.”

“자네는 기억이 명료하군!”

공야청이 진우선의 말에 눈을 빛냈다.

“제게 벽사의 기운이 있었기에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허어-!”

“와!”

진우선의 말에 너무 놀란 공야청과 금청청은 탄성밖에 내지 못했다.

“혹시 그가 어느 수준의 무인인지도 기억나는가?”

“적문강의 수준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그의 말을 믿어서, 사공의 성취가 극에 다다른 사람에게 공격당한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발작이라기에는 너무나 위협적이었으니까요.”

그때는 광륜을 이루기 전이었다.

그저 오행진기를 깊이 수련하던 때였기에, 진우선은 더 알지 못했다.

[아! 나조차도 그때 그의 실체를 명확히 보지 못했구나!]

검노야도 탄식을 흘렸다.

아마도 진우선이 광영무를 깨닫기 전이니 그랬을 테지만, 너무나 안타까웠다.

“일단 알겠네. 이렇게 이야기해 줘서 고맙군.”

공야청이 진우선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빛을 보내더니, 임무를 기록한 서찰을 건넸다.

“우선. 자네에게 임무를 맡기겠네. 맹주님을 호위해주게. 지금 맹주님의 존체가 아마 적문강 그가 원하는 상태일 테니, 언제 나타나서 무엇을 할지 모르네.”

“알겠습니다.”

“혜원주는 그의 행방을 찾아주게나.”

“네!”

금청청이 각오를 뜨겁게 다지며 대답했다.

공야청은 바로 나설 채비를 했다.

“자네는 나와 함께 바로 천도관에 가지.”

***

진우선과 공야청이 곧장 천도관에 들러, 독고월에게 종전에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독고월이 심유한 눈빛을 보이며 경청했다. 그 모습이 마치 득도한 진인 같았다.

“그렇군.”

독고월은 표정의 변화 없이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웃었다.

“정무맹 한복판에 와서 나에게 적사안을 걸다니. 이걸 배포가 크다고 해야 할지, 흑심에 눈이 멀었다고 해야 할지. 허허허.”

“맹주님.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공 각주, 그럼 울까?”

긴박해 보이는 공야청과 달리 독고월은 한결 여유가 있어 보였다.

“진 호위. 당분간 나를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눈을 빛내며 답했다.

독고월은 그의 눈빛이 깊고 그윽함에 잠시 탄복했다. 맑고 순수하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공야청에게 말했다.

“공 각주, 그리고 장로원에서 오늘 중에 찾아오겠다는 기별이 있었소.”

“장로원 말입니까?”

“내가 사도련주와 싸우고 와서 목숨이 경각에 달했으니, 궁금한 모양이오.”

“삼대봉공 중에 누가 온다고 했습니까?”

“남궁 노사요.”

“아!”

공야청이 탄식을 터트렸다.

삼대봉공은 장로원의 원로들을 이끄는 세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남궁무기, 제갈종도, 용화성으로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했는데, 정무맹에서 한평생을 보내며 번영시킨 공로로 장로원에 들어가 있었다.

그중에 남궁무기는 성격이 괴팍하며 물욕이 극심한 인물이었다.

또한, 독고월을 이십 년 넘게 부하로 부렸던 탓에, 맹주가 된 이후에도 낮잡아 보는 경향이 심했다.

그런 그가 온다고 하니, 공야청은 벌써부터 껄끄러워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독고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진우선에게 말을 건넸다.

“진 호위, 장로원은 이미 가진 것이 많으나, 항상 더 가지려고 하므로 경계해야 하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반 각이 지났을 때였다.

“맹주. 나 남궁무기요. 들어가도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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