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의천무제 독고월 (2)
다음 날.
양수객잔에 있는 정무맹의 사람들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신양현에서 빠르게 철수할 목적이었다.
“맹주님은 어떠신가?”
“계속 운기조식을 하고 계십니다. 태령단(太靈丹)의 기운도 빠르게 흡수하시는 듯합니다.”
“다행이군. 자네가 밤새 애 많이 썼어.”
만상각주 공야청이 활인당에서 온 의원 오복생을 격려했다.
오복생은 활인당주 왕약수의 수제자로, 활인당에서도 다섯 명밖에 없는 양의(良醫) 중 한 사람이었다.
뛰어난 의술과 차분한 성품을 지녔는데, 어제 새벽부터 지금까지 이틀째 잠도 못 잔 채 수많은 환자를 살피고 있었다.
중에도 독고월을 특히나 신경 써서 살폈을 정도로 꼼꼼하기까지 했다.
오복생의 나이가 이제 서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는 활인당의 앞날을 이끌 유망한 인재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오복생은 공야청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정말 수고한 건 진 대협이지요. 맹주님께서 지금 운기조식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진 대협의 공입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아마 저는 지금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을 겁니다.”
“허-! 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그렇게 말하는 건가?”
“맹주님의 바닥난 단전을 일부나마 채워서 운기조식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럴 경우 큰 충격만 없다면 사나흘은 숨을 더 이을 수 있을 거로 보았습니다. 맹주님이 그만한 고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이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진 대협의 내공은 제 예상보다 훨씬 정순하고 심후했고, 내공의 운용 또한 경탄할 정도였습니다. 오장육부를 보(補)하여 신진대사가 이루어지게 했고, 정심이 깨진 것마저 붙들어서 기운이 새는 걸 막았습니다. 육신의 기능을 모두 되살린 격입니다. 이는 마치 저승으로 가던 명줄을 잠시 붙들어 멈춰 세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허허-!”
공야청이 감탄하여 웃음만 흘렸다.
그리고 오복생이 왜 진우선을 대협이라 부르는지도 알 듯했다.
공야청은 어제 부하들로부터 보고를 받는 내내 진우선의 이름을 수도 없이 들었다.
대법을 저지하고, 사중효 등자경의 숨을 끊고, 사도련주를 막는 등 진우선이 활약하지 않은 데가 없는 까닭이었다.
진우선이 하루 사이에 쌓아올린 공로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한데, 오복생마저 진우선에게 크게 탄복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어제 만났던 다른 보고자들과 거의 똑같았다.
공야청은 평정심을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우선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사실만 깨달았습니다. 스승님은 항상 자신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도 조금은 알겠더군요.”
오복생이 계속해서 감탄을 쏟아냈다.
“알겠네. 그래도 자네가 고생한 것 역시 적지 않으니, 잠시 쉬도록 하게. 곧 출발할 거라네.”
“감사합니다. 각주님도 밤잠을 많이 못 이루신 듯한데, 건강에 특별히 유념하십시오.”
오복생이 말을 마치고 돌아갔다.
공야청은 곧장 숭의각주 탁신을 만나러 갔다.
“탁 각주께서는 어제보다 좀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일단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소. 태령단을 복용한 덕에 내상을 빠르게 다스릴 수 있었지. 고맙소.”
“다행입니다.”
탁신과 공야청은 그렇게 아침 인사를 나누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 각주, 사도련이 어제 대부분 철수했다고 들었소. 지금은 어떻소?”
“맹으로 복귀하는 길에 그들이 나타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잘 되었군. 숭의각은 갑의대와 을의대를 남길 거요. 그들이면 이곳을 정리하고 오기 충분하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백 명이면 큰 문제는 없겠습니다.”
독고월의 상황이 좋지 않기에, 공야청을 비롯한 수뇌부는 맹으로의 복귀를 급하게 결정했다. 신양보다 장사가 훨씬 안전해서 내린 판단이었다.
그런 까닭에 주변을 정리하고 후발대로 돌아올 이들을 숭의각에서 뽑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가장 피해가 적었던 까닭이었다.
원래는 평원에서 사도련의 무인들을 만나 크게 충돌할 거로 예상했었는데, 사도련주가 직접 나서며 절대고수들이 대결을 펼치다 보니 무인들 사이의 접전은 몇 번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큰 전투를 예상하고 정무맹의 주력을 내보냈는데, 제일 적게 싸우고 왔으니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후발대가 정해졌다.
탁신이 공야청에게 물었다.
“정확히 언제 출발하오?”
“반 시진 후입니다.”
***
갑의대와 을의대를 제외한 정무맹 무인들이 신양현을 떠나 빠르게 이동했다.
그리하여 저녁 즈음에 무한에 도착했다.
포구에는 이미 그들을 태울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인들은 피로가 많이 쌓인 탓에 대부분이 선실로 들어갔다.
진우선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스럽게도 일인실을 배정받은 덕에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는 조용한 선실에서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진우선의 선실로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들어가도 되는가?”
“네, 들어오십시오.”
진우선이 허락하며 눈을 떴다.
선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탁신과 모영영이 보였다.
진우선은 그들을 작은 탁자 앞으로 안내했다.
“여러모로 고맙네. 이 말을 전해야겠는데, 편히 이야기할 시간이 이제야 나더군.”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보다는 각주님이 더 걱정되었습니다. 내상을 다스리기도 바쁘실 텐데, 종종 볼 때면 항상 일과 사람에 둘러싸여 계시더군요.”
“그래도 태령단을 복용하여 거동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네. 근데 자네는 태령단을 받지 않았더군.”
“영단을 제가 쓰지 않는다면, 위급한 사람이 쓸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내상을 입은 게 아니라, 탈진한 것이니 안 먹어도 괜찮습니다.”
탁신이 진우선의 마음씀씀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은 조언을 덧붙였다.
“바로 안 먹더라도 챙겨두면 좋지 않겠나? 나중에 위급한 사람을 만났을 때 써도 좋겠지.”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허허! 그런 생각은 못 했었나 보군. 그럼 내가 자네의 것을 빼놓으라고 말해두겠네. 태령단이 귀하다지만, 자네에게 있으면 더 귀하게 쓰일 수도 있을 거라네.”
“감사합니다.”
탁신이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건, 진우선에게 고마운 마음이 큰 까닭이었다.
그때, 모영영이 입을 열었다.
“진 대협, 반가워요. 나는 모영영이에요. 어제 정말 고마웠어요. 사도련주가 생각보다 너무 강해서 합공을 펼쳐도 당해내기 힘들었거든요.”
“진우선이라고 편히 부르셔도 됩니다. 검후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진우선의 말에 모영영이 웃었다.
사도련주와의 결전이 끝난 탓인지, 지금은 단호함이 많이 가시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있었다.
“정무맹에 진 대협 같은 젊고 뛰어난 협객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파사불주도 진 대협이 직접 탈취했다고 들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파사불주가 주인을 찾아서 다행입니다.”
모영영은 진우선을 부르는 호칭을 바꾸지 않은 채, 왼손을 슬쩍 들어 손목에 찬 파사불주를 보여 주며 감사를 전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던 중,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우선. 들어가도 되겠는가?”
공야청의 목소리였다.
진우선이 선객인 탁신과 모영영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오십시오.”
선실의 문을 열고 공야청과 이능운이 안으로 들어섰다.
탁신과 모영영이 그들과 마주했다.
“공 각주도 이제야 시간이 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빠르게 오셨군요.”
“슬슬 일어나려던 참이네.”
탁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공야청과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목적을 이해하고 있었다.
검후 모영영도 탁신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진우선에게 인사했다.
“진 대협, 나도 이만 일어날까 해요.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보기로 해요.”
“알겠습니다.”
탁신과 모영영이 빠르게 선실을 나가자, 공야청과 이능운이 탁자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우선. 자네가 정말 많은 일을 해 줬어! 다들 자네의 활약에 고무되고 감탄했다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주님의 계획이 절묘했던 것 같습니다.”
진우선이 공야청의 말에 겸손하게 대답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이능운이 꾹 참아왔던 의문을 던졌다.
“우선아. 너 진짜…… 무공이 어느 정도인 거냐?”
“하핫!”
진우선이 머쓱하여 웃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대화가 이어지다가, 일 각 정도 지난 후에야 끝이 났다.
그제야 진우선은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배는 어느새 악양을 지났다. 이제 정무맹이 있는 장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진우선이 선실을 나섰다.
‘저 객실이로군.’
진우선은 공야청이 알려준 객실을 찾았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는 어제부터 여러 사람의 방문을 받았는데, 되짚어보니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었다.
바로 탁운비와 서문영화였다.
“진우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진 대협?”
진우선이 인기척을 내자, 탁운비가 바로 문을 열어 확인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들어오시오. 반갑소. 내가 먼저 찾아갔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이곳에서는 쥐 죽은 듯이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소.”
“탁 형,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진우선이 선실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했다.
그때, 선실 가장 안쪽에서 한 여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어왔다.
“진 대협, 저도 반가워요.”
“혹시?”
여인의 모습과 분위기는 기억 속의 서문영화와 사뭇 달랐다.
선한 눈망울이 특히나 기억에 남았는데, 지금은 눈매가 달라져 인상 자체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네, 맞습니다. 저예요. 정파 사람처럼 보이나요?”
“그렇게 보입니다.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종종 성격이 너무 유해 보인다는 말을 들어서, 이번에는 눈빛에 힘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성공하신 것 같습니다.”
서문영화의 목적대로 지금 얼굴은 상당히 강단 있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전의 기품 있고 신비롭던 분위기는 잃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초면에 말을 걸기 쉽지 않겠구나.’
그녀는 아름답지만 차가워 보였다. 말을 걸면 싸늘한 눈초리만 되돌아올 듯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신분을 숨기고 지내야 하니, 그게 좋을 수도 있었다.
탁운비가 그런 서문영화의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 대협, 그래도 영화는 아름답지 않소?”
질문하는 말투지만, 확인을 바라는 느낌이었다.
“오라버니!”
서문영화가 얼른 탁운비를 말렸다.
“진 대협, 오라버니의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앞으로 저를 신영화라고 불러주세요.”
“성이 바뀌었군요.”
“예전처럼 그대로 쓸 수는 없으니까요. 탁 대협께서 지어주셨어요.”
“탁 각주님이 포용하셨군요. 다행입니다.”
탁신이 성을 지어주었으니, 두 사람의 관계마저 받아들이기로 한 게 틀림없었다.
그에 탁운비가 의문을 던졌다.
“진 대협. 나는 그게 이상하오.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신양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내 행동을 괜찮다 하셨소.”
탁운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오. 영화에게 ‘신(信)’이라는 성을 붙여주신 것도, 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오신 거요. 그리고 친우의 딸이며, 아들과 태중혼약한 사이라고 말하겠다 하셨소.”
“그럼 잘된 일 아닙니까?”
진우선이 못마땅해 하는 탁운비에게 물었다.
모든 게 탁운비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탁신의 모습은 인자한 아버지에 가까웠다.
“나는 혼란스럽소.”
하지만 탁운비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로 머리가 복잡해 보였다. 그리고 쉽게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
일행이 정무맹에 복귀했다.
백발이 성성한 활인당주 왕약수가 바로 천도관에 들러 독고월의 상태를 살폈다.
“어떻소?”
“걸어서 여기로 오신 게 용하군요. 어찌 살아계신 겁니까?”
“허허. 그 정도요?”
“맹주님!”
“공 각주, 살살 말하시오. 귀 안 먹었소.”
옆에 있던 공야청이 비통한 심정으로 외치자 독고월은 이 와중에도 피식 웃으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공야청이 왕약수에게 물었다.
“왕 당주님, 정녕 방도가 없겠습니까?”
“방도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럼 있긴 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게 무엇입니까?”
“어떤 귀인이 맹주님의 전신에 골고루 알맞게 기운을 불어넣은 덕분에 맹주님이 이곳에 오실 수 있었더군요. 그 기운으로 숨을 유지하면서, 등봉조극의 경지를 이루어 환골탈태하셔야 합니다. 그게 아니고서는 정심이 깨진 걸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마저도 될지 안 될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
“허허.”
왕약수의 단호한 대답에 공야청은 정신이 아찔했다.
독고월은 그저 웃었다.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소. 그리고 귀인은 진우선이라오.”
“그렇군요. 일전에 들은 듯합니다.”
“아마도 맞을 거요.”
독고월이 왕약수에게 가볍게 말을 건넨 뒤, 공야청을 진정시켰다.
“공 각주.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천하에는 아직 의기가 남아 있더군. 진우선을 자주 봤으니 잘 알리라 생각하오.”
“하지만 맹주님이 계셔야지요. 안 계시면 그들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련과 천마교 말이오? 진우선이 있으니 충분히 해볼 만하리라 보오. 탁 각주도 잘할 거고.”
“맹주님!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탁 각주라니요? 여 각주도 있지 않습니까?”
공야청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는 지금 독고월의 모든 생각이 탐탁지 않았다.
죽음을 가정하고서 유언하듯이 말하는 게 싫고, 차기 정무맹주로 탁신을 거론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 각주. 믿을 수 없게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머릿속이 명료하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소.”
독고월이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왕약수는 그런 독고월의 모습에서 회광반조의 낌새를 느꼈다.
“진우선을 내 호위로 붙여주시오. 그에게 할 말이 있소.”
“어떤 말입니까? 저도 듣고 싶습니다. 제게도 비밀입니까?”
“그건 아니오. 다만 이 일은 진우선만이 해결할 수 있을 거요. 내가 적사안을 누구에게 당했는지 깨달았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