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24화 (124/225)

124.

#의천무제 독고월 (1)

대별산맥의 어느 깊숙한 골짜기에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을 찾은 이들이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장소는 팔괘동이 있던 자리인데, 지금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입구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사도련주 섭무악이 한 걸음 나서며, 돌무더기가 무너져 내려 사라진 팔괘동의 흔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도 무너져 있었다.

섭무악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도 감정을 착 가라앉힌 채로 망자의 이름을 불렀다.

“후우-! 광후야.”

그의 목소리가 참으로 애달팠다.

악중뇌 사마광후는 십 년 전에 사도련을 함께 일으켜 세운 불세출의 지략가였다.

또한 수많은 희로애락을 함께 나눠오면서,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었던 소중한 친우였다.

그런 사마광후가 죽었다.

섭무악은 그와 함께했던 지난 세월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때, 사영화 해금파가 섭무악의 발치에 바짝 엎드리며 슬픔을 쏟아냈다.

“련주님. 죽여주십시오. 저는 사형들을 아무도 지키지 못했나이다.”

그녀는 원래 대별산맥에 준비한 비처에서 대법이 이루어진 후의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밖으로 나간 사중효 등자경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느껴 문을 나섰고, 그의 주검을 마주했다.

설상가상으로, 대별산맥을 찾은 섭무악에게서 팔괘동이 무너졌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보니, 사마광후는 아예 시신조차 찾을 수 없어 보였다.

‘컥!’

해금파는 속이 콱 막혀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울분만이 온몸에 가득 차올라서, 당장이라도 원수를 잡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특히나 지난밤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까지 더해져, 슬픔과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섭무악이 그런 해금파를 보며 흥분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금파야. 네 실수가 아니다. 이만 일어나라.”

“련주님.”

해금파가 애통함을 삼키며 섭무악의 명을 따랐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서 시퍼런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원수는 누구일까요? 저는 반드시 대형과 이형의 복수를 해내야겠습니다.”

“복수라…… 당장은 어렵다.”

“왜 그렇습니까?”

“흉수는 정무맹의 진우선이다. 행적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팔괘동을 무너뜨릴 만한 건 그놈밖에 없다.”

“원수가 누군지 아는데, 왜 어렵다고 하셨습니까?”

해금파가 진우선의 이름을 곱씹으며 물었다. 그녀의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극경의 무인이기 때문이다.”

“아-!”

해금파가 깊게 탄식을 흘렸다.

그녀는 칠성홍옥대법과 일련의 계획이 왜 계속 삐걱대고 어그러졌는지 알아챘다.

진우선은 지금 당장 그녀가 암습하고 자시고 할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죽이러 갔다가 죽임 당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다가 사마광후와 등자경이 목숨을 잃은 게 이해되었다. 그걸 수긍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기까지 했다. 당면한 상황도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그를 미처 알지 못한 건 저희의 불찰입니다.”

“너무 자책할 필요 없다. 너희들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몰랐을 거다. 어이없는 게 정무맹 놈조차도 모르고 있더구나.”

해금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우선은 사도련과 정무맹, 양측 대부분이 몰랐던 변수였다는 말이었다.

그때 섭무악이 단호하게 물었다.

“나는 사령의 길을 열기 위해, 꼬박 십 년을 기다렸다. 어쩌면 너도 그렇게 복수의 칼을 갈아야 할지도 모른다.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좋다. 네 실력과 상황이 된다면 기회를 주마.”

“감사합니다. 련주님.”

해금파가 이를 부득 갈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의지가 어떠한지 확실히 전해졌다.

섭무악은 내친김에 해금파에게 몇 가지 더 물었다.

“광후에게 아들이 셋 있다고 들었다. 아비를 이을 놈이 있더냐?”

“대형은 일전에 첫째인 사마대륜이 술법에 능하고 지략에 밝으며 침착하다고 하면서, 후사를 잇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스물셋쯤 되었을 겁니다.”

“호오! 그럼 둘째와 셋째는?”

“둘째 사마철륜은 일찍이 무공에 눈을 떠서 대성할 실력을 갖췄으나 오만하다고 했고, 셋째인 사마진륜은 여러모로 자질이 훌륭하나 형들의 기에 눌려 유약한 까닭에 공부의 때를 놓쳐간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사마철륜은 어느 수준이지?”

“칠사의 두셋이 덤벼도 이길 거라 자신했습니다. 아예 그들과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섭무악이 해금파의 설명을 다 듣고는 미소 지으며 명령을 내렸다.

“좋다. 그럼 사마대륜과 사마철륜을 불러라. 네가 그들을 이끌어 주기 바란다. 새로운 삼대호법으로 긴히 쓸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해금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섭무악이 그렇게 삼대호법의 구성원을 일단 해결하고는, 사사천주 혁련회를 불렀다.

“혁 천주. 환사문주에게 광후가 맡았던 총군사를 맡길 것이네. 자네가 오대사파의 맏어른이니, 신경 써주게.”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혁련회는 일흔의 노고수로, 오대 사파의 수장 중에 홀로 한 세대 전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위가 뛰어나고 기력이 넘치는 까닭에 사사천을 정력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혁련회가 섭무악에게 고개를 숙이며 답하니, 그의 옆에 서 있던 파천문주 차북도와 흑요궁주 막검해도 곧장 입을 열었다.

“련주님의 뜻을 받듭니다.”

“련주님의 혜안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특히 막검해는 섭무악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 모양이었다. 흑요궁에 속한 하오문을 통해 강호의 역사를 꿰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환사문은 백 년 전 사황성의 대술법가였던 자미법왕 두연정의 맥을 이은 곳으로, 현재에도 그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었다.

그와 비슷한 곳이 사마광후의 가문이자, 생사법왕 사마성이 세웠던 사마세가였다.

생사법왕은 자미법왕과 함께 당시 사황성의 삼대법왕에 속한 존재였다.

그들의 세력인 사마세가와 환사문이 백 년이 지나서도 명맥을 잘 이어온 까닭에 지금 섭무악이 뜻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호법의 역할은 사마세가에 맡기고, 총군사의 역할은 환사문에게 주어 사도련을 이끄실 생각이시구나!’

그렇다면 오대사파는 아무래도 친분이 깊은 환사문을 더 적극적으로 도울 터였다.

사도련은 수많은 세력이 연합한 까닭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나눈다면 좀 더 효율적일 터였다.

아무튼, 그렇게 사도련을 재편한 섭무악이 장내에 있는 무인들에게 외쳤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우리가 비록 대법은 이루지 못했으나, 정무맹은 맹주를 잃을 것이다. 그의 숨이 경각에 달했으니 곧 정무맹의 분위기는 흉흉해질 터, 저들은 서로 힘을 다툴 것이다. 그때 우리의 분노를 갚아주면 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침중하게 잠겨 있던 사도련 무인들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럼 이제 다들 련으로 복귀하라. 할 일이 너무 많구나!”

“련주님. 일부는 이곳에 남아 대형의 주검이라도 찾았으면 합니다.”

해금파가 의견을 꺼내자 섭무악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네게 맡기려 했다.”

“감사합니다.”

***

한편, 정무맹주 독고월은 그 시각에 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활인성자 왕약수는 이곳에 없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마저 치료할 만한 신의(神醫)는 왕약수뿐인데, 그는 정무맹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이번에 신양현에 함께 왔던 활인당의 양의(良醫) 오복생이 임시방편을 생각해냈다.

같은 도가 계열의 무공을 깊이 익힌 사람이 내공을 불어넣으면 깨진 육신에도 기운이 머물게 되니 시간을 잠시 벌 수 있었다.

전적으로 진우선이 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진우선이 이에 찬성했다.

그리고 지금 방 안에서 웅혼한 내력으로 독고월의 상세를 살피고 있었다.

“아-! 맹주님!”

“부디!”

양수객잔의 넓은 뜰에 모인 정무맹 사람들이 독고월의 처소를 바라보며 한마음으로 염원했다.

방 안에서는 탁신과 탁운비 부자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운비야. 고생했구나.”

“고생은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여태껏 말씀 드리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마도 알고 계셨겠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네 맘이 그럴 거로 생각했지.”

탁신이 탁운비의 말을 담담히 받았다.

그에 반해 탁운비는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 눈을 빛내며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이름에 누를 끼쳤습니다. 이 일은 두고두고 아버지에게 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만상각주님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벌하려면 벌하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

“네 잘못을 잘 알고 있구나. 나로서는 정무적으로 상당히 큰 짐을 지게 되었다. 또한, 만상각주의 부탁을 무엇이든 하나 들어주기로 했지.”

탁신이 무감정한 어조로 대답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탁운비를 바라보았다. 언성을 높이지 않으니 오히려 분노가 더 극에 달한 듯했다.

“그런데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왜인지 아느냐?”

“미우나 고우나 하나뿐인 아들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틀렸다.”

“…….”

탁운비가 어리둥절하여 탁신을 바라보았다.

탁신이 아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무감정하게 물었다.

“후회하느냐?”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럼 되었다.”

“무엇이 되었습니까? 저는 아버지에게 해만 끼쳤을 뿐입니다.”

탁운비가 눈을 부릅뜬 채 물었다. 탁신의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운비야.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아비이니, 네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다.”

“……!”

탁운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탁신의 뜬금없는 말에 말문을 잃어버렸다.

탁신이 그런 탁운비를 바라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운비야.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아버지. 제가 어머니를 잡아먹었다고 여기셨지 않습니까?”

“나는 그리 말한 적이 없다. 그리 생각한 적도 단연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탁운비는 이번에도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그간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온 차갑고, 무뚝뚝하고, 몰인정한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탁신은 그런 탁운비를 나무라지 않고, 어색하게나마 진심을 전했다.

“그리고 잘했다. 자기 여자는 그렇게 지키는 거다.”

“네?”

“네 어미를 닮아서 잘 자라주었구나.”

“……!”

탁운비는 너무나 얼떨떨하여 뭐라 대꾸도 못 하고 있건만, 탁신은 제 할 말을 다 꺼냈다.

그때였다.

후우우우웅-!

바깥에서 느껴지던 기운이 한 차례 크게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둘은 그게 무엇인지 즉각 알아챘다.

“나가봐야겠다.”

탁신이 재빨리 방을 나섰고, 탁운비가 그 뒤를 따랐다.

그 시각.

진우선이 내력을 거둬들이며 호흡을 골랐다.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흘렀고, 온몸도 다 젖어있었다. 지친 기색도 역력했다.

그러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야!’

독고월에게 자신의 내력을 불어넣어 숨이 떨어지는 걸 일단 막았기 때문이었다.

독고월은 정심이 깨져 심령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심(心)은 강궁(篠宮)으로서 중단전(中丹田)이 되고, 중단전은 장기(藏氣)의 부인데, 이것이 깨짐으로써 육신에 생기가 머물 곳이 없었다.

‘금기에 철벽(鐵壁)의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진우선은 오행의 기운을 두루 사용하여 망가진 오장육부를 보(補)하는 한편, 굳건하여 무너지지 않는 철벽의 힘으로 심(心)을 감쌌다.

즉, 철벽의 기운이 빙화보심단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우선의 기운이 영약은 아니니, 이는 임시일 뿐이었다.

“하아-!”

그때, 독고월이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러더니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입을 열었다.

“내가 아직 살아있나 보군. 고맙네.”

“다행히 급한 불은 껐습니다.”

“그렇군.”

창백한 안색의 독고월이 맥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진우선이겠지?”

“맞습니다.”

“사도련주는 자네가?”

“네. 그런데 승패를 내기 전에 그가 비열한 수를 쓰며 도망쳤습니다.”

“나를 인질 삼았던 거 같군.”

독고월이 정확하게 알아챘다. 아무래도 드문드문 기억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고맙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만 좀 더 일찍 도착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진우선의 얼굴은 잔뜩 피곤해 보였으나, 그 와중에도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독고월은 그런 진우선의 모습에 흐뭇했다.

“자네는 일단 좀 쉬게. 나가는 길에 공 각주와 탁 각주를 불러주겠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에 진우선이 방을 나섰다. 독고월의 숨을 일단 붙여놨으니, 자신의 역할은 끝난 셈이었다.

잠시 후, 방에 혼자 남은 독고월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허허-! 하늘이 공평하여 치우침이 없으니, 아직 정도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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