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사도련주와의 조우 (3)
“헛!”
“앗!”
탁신과 모영영이 놀람을 금치 못하고 탄성을 흘렸다.
순백의 강기와 사자후(獅子明)에서 느껴진 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순전한 까닭이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기의 파동이 느껴지더니, 곧 기운의 주인이 섬전처럼 빠르게 장내에 도착했다.
그는 정기(正氣)가 넘치는 젊은 검객이었다.
그 젊은 검객이 독고월의 앞을 막아서면서, 다가오는 섭무악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사도련주. 멈추시오.”
“네놈이었구나. 아까부터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놈이.”
섭무악이 눈앞의 상대를 보며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짜증을 팍 냈다.
“도착하기 전에 끝내려 했건만, 빨리도 왔구나!”
“이제 당신 뜻대로 되지 않을 거요!”
젊은 검객이 기세를 피워 올려 섭무악에 맞서면서 대꾸했다.
그때, 탁신이 힘겹게 다가오며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백무원의 진우선입니다.”
“아-! 나는 탁신이네.”
탁신이 탄성을 흘렸다.
젊은 검객 진우선, 그에게서 풍기는 현묘하고 심오한 기운은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에 더해 아들 탁운비와의 인연도 있으니 안도감과 친근감도 들고 있었다.
한편, 섭무악이 둘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웃기는군. 정무맹의 최고수를 여기서 처음 보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진우선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숭의각주 탁신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맹주님이?”
진우선은 바닥에 쓰러진 중년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매우 위중해 보였다.
탁신은 상황이 너무나 위급하여 진우선의 신원을 확인한다거나 다른 무언가를 떠올릴 새도 없이, 생각을 바로 꺼냈다.
“맞네. 맹주님을 살려야 하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한 결의를 보였다.
“제가 잠시 막아내겠습니다. 각주님은 맹주님과 몸을 피하십시오.”
그때, 섭무악이 버럭 소리 질렀다.
“누가 보내준다더냐?”
진우선이 검에 광륜을 이룬 오행진기를 가득 불어넣었다.
검에서 순백의 지극히 순전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당신은 내가 막을 것이오.”
“…….”
섭무악이 그런 진우선을 한동안 말없이 노려보았다.
등봉조극에 오른 무인이 무력시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은 방금 사사지옥혈공을 연거푸 펼치느라 내력 소모가 컸기에, 진우선의 검에서 느껴지는 힘만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또한, 앙천극사대법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아 육신을 아껴야 했다.
그래서 진우선과 섭무악 사이로 잠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탁신은 진우선의 검에 어린 기운이 종전까지 그토록 힘겨워했던 섭무악의 혈옥과 필적한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잔뜩 경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추측이 확실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섭무악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생각하면, 진우선의 실력은 정말로 그와 견줄 만한 게 틀림없었다.
“알겠네. 부탁하네.”
탁신은 진우선의 말대로 즉시 행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렀다.
그때, 섭무악이 얼굴을 굳히고 진우선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겠구나. 대법을 깨트린 게.”
“그건 결코 이루어져선 안 되는 대법이었소.”
진우선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꾸했다.
그 순간, 섭무악의 화가 폭발했다.
“그래. 어디 막는다고 했으니, 한 번 잘 막아봐라!”
고오오오-!
막대한 기운이 섭무악의 주위로 몰아쳤다.
그 힘이 어찌나 사악한지 공기가 파르르 떨리고 땅마저 부르르 떨었다.
섭무악이 사사지옥혈공을 다시금 끌어올리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그는 방금까지만 해도 지친 것이 걱정되고 육신의 안위를 살폈으나, 칠성홍옥대법의 실패를 연관짓는 순간 도저히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널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대법을 망친 원흉을 단죄해야 한다.
섭무악이 그 일념으로 핏빛 구슬, 혈옥을 피워냈다.
강렬한 원한이 서린 혈옥은 그가 여태껏 펼쳤던 것들 가운데 사기가 가장 지독하게 뿜어졌다.
또한, 두 팔을 쫙 뻗어야 간신히 안을 정도의 바윗덩이만 하여 가장 컸고, 핏빛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게 섬뜩했다.
섭무악이 두 손을 내밀어 혈옥에 어린 기운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혈옥의 기운에서 시뻘건 줄기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투투툭-
그리고 진우선의 근처에까지 다다라서는 개화했다.
꽃이 열리자 사방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고, 꽃 안에서는 사악한 살기가 마구 뿜어졌다.
이 모든 게 혈옥의 변화이니, 이는 지옥의 꽃 혈옥광화(血玉狂花)였다.
“……!”
진우선은 등골이 쭈뼛 섰다.
섭무악의 무공에서 느껴지는 사악함은 사기의 정수로, 종전에 겪은 칠성홍옥의 기운보다도 짙었다.
이 정도라면 결코 인세의 것이라 볼 수 없었다. 심혼마저 갈가리 찢어발길 듯한 지옥도의 살기라 할 만했다.
극사경의 무공이 아니라면, 결코 이럴 수 없으리라.
하지만 섬찟한 느낌에 사로잡혀서 대비한 걸 잊어버릴 진우선이 아니었다.
슈악-!
진우선이 광륜검으로 지옥의 꽃을 베었다.
퍼엉-!
혈옥광화 하나가 터졌다.
피가 사방으로 번지듯 광화가 수백 파편으로 부서져서 흩날렸다.
검에는 이미 광륜을 이룬 오행진기가 가득 담겨 있었기에 능히 극사경의 힘을 상대하고 파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흐압!”
진우선이 기합을 내지르며, 광영무의 한 초식을 펼쳤다.
그러자 광륜검에서 빛살이 쭉쭉 뻗어 나갔다. 사방으로 막힘없이 퍼져나갔다.
콰콰콰쾅-!
굉음부터 마구 들려왔다.
광륜의 빛줄기가 혈옥광화의 흔적을 만나면 세차게 부딪쳐 핏빛을 흩어버렸다. 또는 부숴버리거나 뒤덮어서 으깨버렸다.
굉음은 그 과정에서 나는 소리였는데, 절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광륜의 순전한 빛이 넓고 큰 바다의 맑고 푸른 물결처럼 거침없이 퍼져나가는 광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바로 광영무 열두 초식 중 하나인 광영창파(光影滄波)였다.
광륜은 대자연이 진우선에게서 낳은 오행진기의 정수여서, 진우선의 광영무는 그 특성을 담아내어 빛이 가득 담긴 모습으로 변화해 있었다.
광영창파가 광륜의 빛을 뿜어냈다.
이는 진우선의 깨달음으로 완성되었고, 그에게 가장 적합하게 맞춰진 극경의 힘이었다.
사실 그렇기에 동공으로밖에 익힐 수 없었으리라.
아무튼, 진우선은 여러모로 꽤 지친 상태에서도 광영창파의 빛살을 줄기줄기 쏘아댔다.
그에 섭무악의 내력이 먼저 떨어지기 시작했다.
혈옥광화 수백 송이가 터졌을 때였다.
“허억!”
돌연 섭무악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무슨 이런!’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광영창파의 빛살이 혈옥광화의 절반 이상을 바스러뜨렸다.
처음의 바윗덩이만 하던 혈옥은 이제 절구통만 한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광영창파는 그러고도 끊임없이 기운을 내뻗었다.
촤악-! 촤악-!
이윽고 섭무악마저 후려치기 시작했다.
‘무슨 이런!’
섭무악이 기겁을 하며 진우선을 노려보았다.
그때, 가슴팍에서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상의가 예(乂)자로 찢어지며 핏물이 주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낭패였다. 기운이 빠지니 상대의 공격을 하나둘씩 놓치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내가 내력만 충분했어도!’
독고월 등을 상대하면서 사사지옥혈공을 몇 차례 힘껏 펼쳐내느라 소모된 내공이 컸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흉수에게 온전한 힘을 쏟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길!”
섭무악이 분을 못 이겨서 이를 갈았다.
그와 동시에 이제 절구통만 한 정도밖에 남지 않은 혈옥을 진우선에게로 던졌다.
“……!”
진우선이 눈을 부릅뜨며 즉시 대처했다.
광영창파 초식의 움직임을 그치고, 혈옥의 기운을 향해 내공을 집중시켰다.
콰아아아앙-!
혈옥이 깨지며 광폭한 사기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광륜의 오행진기가 그에 맞서서 소멸시켜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기가 진우선의 몸에 닿을 듯이 가까이 왔을 때, 황금빛 호신강기가 반투명한 구처럼 진우선을 감쌌다.
그리고 사기를 소멸시켰다.
완벽한 방호였다.
“……!”
이에 섭무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회심의 마지막 수마저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것이다.
‘말도 안 돼!’
섭무악이 속으로 경악하며 진우선을 노려보았다.
진우선은 여전히 검에 기운을 유지하고 있으나, 인제는 확실히 지쳐 보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아직 사냥이 끝나지 않은 야수의 눈빛이었다.
‘위험하다!’
바로 그 순간!
섭무악의 예상대로 혈옥의 기운을 모두 흩어버린 진우선이 세차게 달려들었다.
그에 섭무악이 얼른 몸을 내빼고는, 종전에 생각해둔 방법을 실행했다.
투투퉁-!
섭무악이 급히 겁황혈사강기를 일으키며 혈주를 여럿 만들어 던졌다.
그 크기나 모양이 살구만 하여 꽤 작았으나, 지금은 이 정도여도 부족함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친 몸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몇 사람이 목표였으니까.
게다가 그중 한 명은 이제야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는 정무맹주 독고월이었다.
독고월은 정심이 깨졌고, 신단의 기운마저 사용하여 심령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이제 육신에 생기가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뭐 어쩌랴.
섭무악으로서는 어차피 죽일 상대였는데, 자신의 탈출에 이용할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쏴솨삭-!
그때, 진우선이 급히 강기를 마구 뽑아냈다.
콰콰쾅-!
순백의 강기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혈옥을 모조리 터트렸다.
무인들이 놀라서 움찔거렸다. 몇몇은 자신에게 오는 기운을 보며,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뼛속까지 악랄하구나!’
만일 진우선이 강기를 쏘아내 막지 않았다면, 그들은 목숨을 잃었으리라.
섭무악의 본성은 애초부터 악한 듯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섭무악은 그렇게 빠져나가는 과정에서도 울분을 쏟아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진우선이 혈옥을 향해 검을 쓰고 있을 때, 그의 귓가로 싸늘한 의지를 전했다.
“진우선! 우리는 또 볼 것이다. 그때는 오늘과 다를 것이다!”
그에 진우선이 똑같이 응수했다. 아니, 굳건한 기세를 담으면서도 섬뜩함을 느낄 수 있도록 나직하게 음성을 전했다.
“당신이야말로 그때는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오!”
***
잠시 후.
사도련주 섭무악이 진우선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 평원을 떠났을 때, 검노야가 곧장 진우선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선아. 혹시 사도련주에게서 무언가 느낀 점이 있느냐?]
‘스승님께 배운 이후 처음으로 상대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련주의 무위를 측량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랬구나. 그의 실력은 확실히 극사를 넘어선 상태였지. 사령의 길에서는 아직 몇 걸음 떼지 못했지만 말이다…….]
검노야의 말대로였다.
그러다 문득 진우선은 검노야가 말끝을 흐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 혹시 걱정이 있으신지요?’
[글쎄다. 나는 섭무악을 방금 처음 보았는데,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들고 낯설지도 않더구나. 마치 기억 속에 무언가 있는 것처럼 말이야.]
진우선이 직전에 섭무악과 일전을 치렀을 때, 검노야는 그가 뿜어내는 사악한 기운의 정수를 직접 느꼈다.
그러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고 있었다.
마치 이전처럼 기억 속이 뿌연 안개로 가려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르겠구나. 사도련주가 사황의 진전을 완전히 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 이외에 극을 넘어선 무인을 처음 봐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어.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