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사도련주와의 조우 (2)
섭무악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 즉시 겁황혈사강기를 더욱 끌어올려, 혈주를 더 늘렸다.
‘극경의 고수가 가세한다면, 정말로 쉽지 않다!’
극경(極境)은 도가의 등봉조극, 불가의 등각, 패도의 무극, 사도의 극사, 마도의 극마 등의 경지를 통칭하는 표현이었다.
섭무악은 등봉조극에 오른 정무맹 고수가 오는 걸 심히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불쾌하군.’
강력한 현기가 벌써 느껴지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실 삼 대 일로 맞붙어 대결이 길어지는 지금의 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극에 이른 무인 한 명이 더해진다니.
그럼 사 대 일로 승부를 내야 하고, 섭무악 혼자로서는 불리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상황이 오는 걸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서둘러야 해!’
하지만 이렇게 섭무악이 잠시 멈칫하며 생각이 분산되었던 찰나!
‘빈틈!’
섭무악이 움찔하는 걸 발견한 독고월이 지체 없이 태청신권을 전개하며 강기들을 쏘아댔다.
섭무악의 혈주가 종전보다 많았으나, 어떻게 된 것인지 그는 잠시 집중이 흐트러져 반격할 적기를 놓쳤다.
콰콰콰쾅-!
독고월이 펼친 강기들이 혈주를 잔뜩 격추했다. 그의 순간적인 기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카카캉-!
탁신의 도강이 굉음을 내며 섬뜩하게 섭무악의 허리를 베어갔다.
“감히!”
섭무악이 다급히 외치며 즉시 두 팔을 내리쳤다.
그러자 사이한 핏빛 강기가 바로 쏟아져 나와 탁신이 펼쳐낸 도강과 부딪쳐 터졌다.
“큭!”
섭무악이 신음을 흘렸다. 탁신의 도강에 일순간 스친 옆구리가 욱신거리는 까닭이었다.
도강에 어렸던 탁신의 내력도 파고들어 몸속을 헤집고 있었다. 기의 운용에도 다소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모영영이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검에서 부채꼴 모양의 강기가 쏟아져 나와 섭무악의 다리를 향해 날아갔다.
검각의 비전무공인 일월천강검법(日月天罡劍法)의 강기였다.
휘릭-.
섭무악이 통증을 참으며 재빨리 몸을 한 바퀴 회전했다. 그 순간 몸의 궤적을 따라 핏빛 강기가 일어나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콰앙-!
섭무악의 핏빛 강기가 모영영의 강기와 맞부딪쳐 소멸했다.
“윽!”
그러는 사이 섭무악의 입에서 신음이 또 터져 나왔다.
언제 일격을 당했는지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허벅지가 가로로 쭉 찢어지며 살갗이 푹 베였다. 이 정도면 보법을 온전하게 발휘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섭무악은 너무나 분통이 터져 소리를 냅다 질렀다.
“이것들이!”
그리고 내력을 마구 끌어올렸다.
고오오오-!
그의 주변으로 더욱 막대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근처 십 장 정도는 기세의 폭풍에 휩쓸려 사기에 내상을 입고도 남을 정도였다.
‘아직 이 정도로 내력이 남아 있었다고? 낭패다!’
독고월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여태껏 섭무악을 상대하는 동안 쉬웠던 순간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 그는 더욱 강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제 내력의 소모를 아예 신경 쓰지 않을 태세였다.
“단숨에 다 쳐 죽여주마!”
섭무악이 힘을 모아 새로운 핏빛 구슬을 만들었다.
광채가 종전의 혈주보다 더욱 진했다. 섬뜩한 광택이 흘렀다. 핏빛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니, 혈옥(血玉)이었다.
“헉!”
독고월은 그걸 본 순간, 정신이 바짝 들었다.
‘사사지옥혈공(邪邪地獄血功)!’
사(邪)가 두 번이나 들어가 있을 정도로 사도의 정점에 있는 무공이었다.
‘극사경의 무공이다!’
혈옥은 혈주와 달라서, 지금까지처럼 강기로는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다.
그때였다.
끼이익-!
심혼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귀곡성이 들렸다.
섭무악이 혈옥을 쏘아낸 것이다.
혈혹이 터진다면 일대에 한층 더 단단한 핏빛 강기가 사방팔방으로 흩뿌려질 테니, 그 전에 막아야 했다.
‘어쩔 수 없다! 둘은 막아내지 못해! 차라리 내가…….’
독고월이 급히 태청무진신공을 싹 끌어올리며, 혈옥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내공을 마구 퍼부어 태청신권의 가장 강력한 절초인 청사개천(淸絲蓋天)을 펼쳐냈다.
독고월의 현기가 어린 수많은 권격들이 혈옥을 에워싸고 강하게 때렸다.
혈옥이 푹푹 패이더니 곧장 터져 버렸다.
콰앙-!
“커억!”
독고월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그 충격이 어찌나 거셌는지, 오십 장을 뒤로 튕겨 날아간 후에야 땅에 떨어졌다.
“맹주님!”
“맹주!”
검후 모영영과 숭의각주 탁신이 다급히 외치며 쫓아왔다.
“크윽-!”
독고월이 연신 검게 죽은피를 게워내며 넝마가 된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왜 그러셨소? 왜 혼자서 감당하신 거요?”
탁신이 독고월을 부축하며 안타까워 외쳤다.
“극사경의 무공이라서 그러셨소?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는 무리였소.”
“하아-. 셋이 감당했어도 힘들었을 거라네. 자네도 알 테고, 검후께서도 느끼셨지 않은가.”
“맹주님. 그건 그렇지만…….”
모영영은 독고월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으나, 그래도 애처로운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그때, 독고월이 정면을 바라보며 다시 우뚝 섰다.
섭무악이 혈옥을 허공에 띄운 채 살기등등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혈옥의 기운이 너무나 강하고 무거운 탓에 섬전처럼 빠르게 쫓아오지 못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봤자 열 호흡을 할 시간이나 벌 수 있겠냐마는, 잠시라도 그 공격을 대비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내가 한 번은 더 막아낼 수 있을 거 같군. 그때까지 각자 혈옥을 막을 방도를 찾아야 하네.”
“맹주님!”
“맹주!”
터벅.
터벅.
독고월은 침묵으로 두 사람의 외침을 무시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섭무악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의 말은 독고월의 뜻이요, 유언인 셈이었다.
그걸 눈치챈 탁신과 모영영이 얼른 독고월의 앞을 막아섰다.
“맹주라고 해도 한 번 더 막을 수는 없소! 몸을 살피시오.”
“맹주님. 이번엔 저희가 막겠습니다.”
“아니야. 내 모든 기운을 끌어내면 한 번은 더 가능해.”
목숨을 도외시한 독고월이 위엄을 잃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사도련주가 벌써 저만치 왔다네. 자네들을 부디 내 뜻을 알아주게나.”
“그럼 내가 반을 감당하겠소.”
슈악-.
탁신이 급한 마음에 다가오는 섭무악을 향해 재빨리 도강을 쏘아냈다.
도강에 상당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섭무악이 다가오는 걸 잠시라도 늦춰보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화라락-.
그의 도강이 혈옥 한 줄기에 닿자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가소롭군. 쓸데없는 짓이야. 극경에 오른 자를 못 만나본 모양이지? 크크.”
섭무악이 탁신을 비웃으며 다가왔다.
“의욕은 있는데 자존심만 살았군. 맹주보다 많이 부족해. 네 수준을 알아라. 차라리 맹주처럼 막는 데 온 힘을 기울이든지. 그래도 부족하겠지만 말이야. 크크크.”
“나를 무시하지 마시오! 그런 격장지계에 넘어갈 것 같소?”
탁신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어 태세를 더욱 굳건히 했다.
그는 사실 속으로 적잖이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비록 초식조차 펼치지 않은 채 도강만 쏘아 보냈다지만, 섭무악은 그 막강한 기운을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버렸다.
‘극사경의 무공이 이리도 강력했을 줄이야!’
전혀 생각지 못한 바였다. 그래서 두려움도 몰려왔다.
그리고 독고월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격장지계? 내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섭무악은 탁신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콧방귀를 뀌면서 점점 다가왔다.
탁신은 잔뜩 긴장했는지 섭무악에게서 시선조차 떼지 못했다.
그에 독고월이 탁신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탁 각주. 내력을 최대한 응축시켜 막아야 하네. 극사경의 무인은 같은 내력을 써도 그 파괴력 자체가 다르니, 막을 방도는 거기서부터 찾아야 할 걸세.”
독고월은 생각을 바꾸었다. 탁신과 함께 막을 생각이었다. 탁신이 단단히 각오했다는 걸 눈치챈 까닭이었다.
“저 역시 혈옥을 막아내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니, 사도련주에게 너무 끌려들지 마십시오.”
모영영도 탁신의 마음을 붙잡아 주며 뜻을 보탰다.
그러면서 일월천강검법 중 가장 강력한 수비초식인 금정검벽(金頂劍壁)을 준비했다.
그에 탁신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을 건넸다.
“후우-! 고맙소이다.”
세 사람의 뜻이 모였다.
독고월은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태청무진신공을 다시 샅샅이 끌어올렸다.
‘으으으……!’
그는 고통에 찬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내력을 긁어모으려 하니, 단전과 기혈이 마치 끊어질 듯이 고통스러웠다. 방금 혈옥을 막아내며 내상을 크게 입은 탓이었다.
‘잘 모이지도 않는군. 그래도 빙화보심단이 가진 대자연의 기운이 강한 게 다행이야.’
정력이 깨진 상태로 내공을 바닥까지 긁어 써버렸기에 당연한 결과이리라.
슬프게도 회복마저 더뎠다.
독고월은 즉시 심령을 지탱하던 빙화보심단의 기운마저 끌어올렸다.
이것마저 쓰고 나면 심령의 그릇은 완전히 깨지고 말 터였다. 정력이 깨진 상황을 버텨낼 기운이 더는 없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파답게 보기 좋군. 그럼 사이 좋게 가든지.”
어느새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섭무악이 독고월을 비롯한 세 사람을 비웃으며 혈옥을 던졌다.
끼이익-!
혈옥이 날아오는 동안, 대기가 비틀리며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들려왔다.
“나를 따르시오!”
독고월이 말을 던지자마자 앞으로 달려갔다.
직전에 혈옥이 터졌을 때 그 힘을 감당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했기에, 한꺼번에 몰아붙일 심산이었다.
탁신과 모영영이 곧장 뒤따랐다.
세 사람이 호박만 한 혈옥 앞에 달려들더니.
“지금이오!”
독고월의 외침과 함께 각자 준비했던 절초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콰쾅-! 콰아앙-!
네 절대고수의 내력이 대격돌하자 대기가 맹렬히 와류했다. 매섭게 터진 칼바람이 그 와류마저 도려낼 듯이 폭풍처럼 사방에 몰아쳤다.
섭무악이 혈옥을 다스려 독고월과 탁신과 모영영의 힘을 마구 짓밟았다.
“흐압!”
“타앗!”
“이얏!”
그에 세 사람이 기합성을 터트리며 쉼 없이 각자의 무공을 이어갔다.
중앙에서 독고월이 빙기가 섞인 현기로 강기를 쏟아내며 혈옥의 움직임을 최대한 제한했다.
좌측에서 모영영이 금빛 검강을 마구 쏘아대며 혈옥을 압박했고, 우측에서 탁신이 황색 도강을 겹겹이 쌓아서 휘두르며 혈옥을 베어갔다.
하지만 혈옥은 부서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기운을 뻗어내며 세 사람을 상대했다.
콰-콰-콰-콰-쾅-!
그러더니 혈옥이 연속적으로 터졌다.
혈옥이 터지며 그 충격파가 한 호흡 간격으로 연이어 쏟아졌다. 끊어지지 않았다.
단박에 세 사람의 합공이 깨졌다.
혈옥의 힘이 강기를 부수고 한 번 충격을 가한 것으로도 모자라 거듭하여 충격을 쌓으니, 각자의 내기가 진탕되며 버티기 힘들었다.
‘이럴 수가!’
독고월이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섭무악은 직전과 다른 운용을 보이고 있었다. 혈옥 역시 더욱 강력했다. 이래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크윽-!”
검후 모영영에게서 가장 먼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뒤로 튕겨 나가며 입에서 피를 쏟았다. 온몸은 마구 두들겨 맞은 듯한 몰골이었다.
“컥-!”
탁신 역시 신음을 터트리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모영영이 튕겨 나가면서 확 쏠려 버린 혈옥의 기운을 감당치 못한 것이다.
바닥에 철퍼덕 엎어진 그가 도를 지탱하여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도를 쥔 팔뚝으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얼굴이 매우 창백했다. 척 봐도 외상이 심상치 않은데, 내상은 그보다 더 심한 듯했다.
하지만 이둘은 독고월보다는 나았다.
콰콰쾅-!
독고월이 혈옥의 마지막 폭발을 온몸으로 막았다. 태청신권과 태허신수로 혈옥의 힘을 최대한 억제하며 마지막까지 감당한 것이다.
“으으…….”
땅바닥에 널브러진 독고월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간신히 눈만 끔뻑이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널브러진 몸도 만신창이였다. 피가 줄줄 흐르는 건 물론이거니와 살갗이 베이고 살점이 뜯겨 나간 곳도 상당했다.
그래서 모영영과 탁신은 이제 몸이라도 일으키고 있는데, 독고월은 손가락 하나 깜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산송장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섭무악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독고월과 탁신과 모영영에 비하면, 그저 얼굴이 해쓱해진 섭무악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는 단숨에 공력을 너무 많이 써버려서 기진맥진한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싸움을 끝낼 순간이 왔기에, 섭무악은 지체하지 않고 독고월에게로 나아갔다.
“맹주. 이만 황천길로 갈 때야.”
섭무악이 손을 들었다.
겁황혈사강기의 혈주가 다시 허공에 솟아올랐다. 독고월의 목숨을 끊을 목적이었다.
혈주는 종전보다 핏빛이 옅고 크기도 작아 보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쳐 있는 독고월 일행으로선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콰콰앙-!
평원 저편에서 순백의 강기가 빛살처럼 쏘아져 날아와 혈주를 터트렸다.
곧이어.
“멈춰라!”
사마를 제압하는 사자후가 심령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