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도련주와의 조우 (1)
‘그때 그놈이다!’
등자경은 갑자기 나타난 검객을 본 순간, 그가 회남현에서 파사불주를 탈취해간 자인 걸 알아챘다.
그래서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내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상대는 벽사의 기운을 가진 범상치 않은 고수이기 때문이었다.
화아악-.
등자경의 전신에서 핏빛 사기가 용솟음치듯 피어올랐다. 그의 눈동자도 광기에 물든 것처럼 시뻘렇게 타올랐다.
“탁 형, 잠시만 기다려요.”
검객, 진우선이 탁운비의 앞을 가로막고서 등자경을 마주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흐압-!”
등자경이 강한 기합성과 함께 주먹을 마구 뻗어냈다.
어지간한 위력으로는 벽사를 이겨낼 수 없고, 직접 닿아 내공이 진탕되는 상황도 피해야 했다. 게다가 상대는 저력을 알 수 없는 고수이니, 단박에 승부를 봐야 하리라.
그렇다면 풍뢰만천(風雷滿天)이 제격이었다.
풍뢰만천은 사중효 등자경의 성명절기인 광풍팔절(狂風八絶)의 팔절로, 너무나 강맹하여 등자경 본인조차 전력으로 펼치는 걸 두려워할 정도였다.
한데 등자경은 지금 풍뢰만천에 온 내력을 퍼부었다. 지난번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필살의 수를 꺼내든 것이었다.
퍼퍼퍼퍼엉-!
귀청이 떨어질 듯한 파공음이 울렸다. 한없이 쏟아지는 폭발적인 힘에 대기조차 파르르 떨고 있었다.
‘헛!’
탁운비와 서문영화는 사방을 짓누르며 쇄도하는 기운에 절로 살이 떨렸다. 무지막지한 공포감에 전율이 흘렀다.
등자경이 죽을힘을 다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타앗!
그 순간, 진우선이 짓쳐나갔다.
‘진 대협!’
탁운비와 서문영화가 풍뢰만천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 나가는 진우선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여전히 등에 업은 상태이기에, 두 사람의 긴박한 심장 떨림이 서로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사실 지금 전해지는 압도적인 기세도 진우선이 있어 많이 감쇄된 게 분명하리라. 그만큼 전력을 쏟은 등자경의 무위는 실로 가공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지켜보고 있을 때.
진우선이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빛이 일었다.
그에 곧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콰앙-!
등자경의 풍뢰만천의 초식에서 쏟아진 핏빛 사기가 빛에 실린 수많은 기운과 부딪히며 검로를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빛살은 하나로 보이다가도 마치 백화(百花)가 만발하듯 수백, 수천 가닥으로 쪼개졌는데, 하늘을 뒤덮은 풍뢰의 권격으로 그것을 상쇄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헛! 저건!’
등자경은 찰나의 틈에서 자신을 덮쳐오는 검의 그림자를 보았다.
‘빛이 전부가 아니었나!’
빛에 이어 그림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는 함께였다.
검에서 빛이 뿜어지며 보였던 화려한 꽃이 그림자에 의해 터졌다.
수천에 달하는 빛살이, 이제 수만의 그림자 파편이 되어 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아……!”
등자경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찰나의 틈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면서 뇌리에 각인되었다.
찰나는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한데, 그사이에 마치 섬광이 일며 꽃이 흩날리는 환영을 본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신음이 이어졌다.
“크윽-!”
전신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하며 정신이 돌아왔다.
그림자 비수는 풍뢰만천의 힘을 갈가리 찢고 온몸을 난도질한 상태였다. 단전은 산산조각이 났고, 이제는 모을 내력도 없었다.
등자경은 죽음을 직감했다.
지금은 그저 마지막 자세 그대로 대지에 두 발로 서 있을 뿐이었다.
“미쳤군…….”
허탈한 속마음을 내뱉은 등자경은 문득 정면에 보이는 검객이 궁금해졌다.
“너는…… 누구지?”
“진우선이오.”
등자경의 힘겨운 물음에 진우선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꺼림칙했던 가장 큰 이유…… 바로 진우선 때문이었어.’
등자경은 답을 찾았다. 그게 죽기 직전 마지막 생각이었다.
쿠웅-.
그의 주검이 뒤로 쓰러져 땅바닥에 누웠다.
“진 대협!”
“탁 형.”
“진 대협은…… 어마어마한 고수였군. 하하.”
탁운비가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등자경의 강력한 절초가 펼쳐졌을 때 그와 서문영화는 조마조마했건만, 진우선은 피하지 않고 맞붙어서 한 초식만으로 순식간에 그를 쓰러뜨렸지 않은가.
그 가공할 무위를 보고 나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두 분이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 약이라도 바르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고맙소. 진 대협은 참 좋은 사람이오.”
진우선이 품에서 금창약을 꺼내며 말하자, 탁운비가 싱긋 웃으며 감동의 눈빛을 보냈다.
서문영화는 탁운비가 약을 바를 수 있도록 그의 등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그러면서 감격한 목소리로 진우선에게 말을 건넸다.
“진 대협, 정말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보다 두 분이 함께 계시니 보기 좋군요.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진 대협 덕분이에요.”
진우선이 흐뭇하게 웃었다.
서문영화는 그의 미소가 참으로 맑다고 느꼈다.
탁운비가 금창약을 바르며 진우선에게 물었다.
“진 대협, 대법은 어찌 되었소?”
“대법은 잘 막아냈습니다. 사마광후는 결국 칠성홍옥의 어마어마한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지요. 게다가 그 사기가 쪼개져서 마구 날뛰는 바람에 흔적들이 모두 녹아내리고, 동굴도 무너졌습니다.”
“허! 그걸 혼자서 해냈군.”
“다른 이들은요?”
“그들을 싹 베었는데, 빠져나오면서 보니 모두 녹아내렸더군요.”
“아-!”
탁운비와 서문영화는 진우선의 말을 들으며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진우선은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두 사람은 칠성홍옥대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사도련의 거두인 사중효 등자경의 목숨을 단숨에 거두는 걸 눈앞에서 보았기에, 의심할 게 하나도 없었다.
‘진 대협이라면 충분히 악중뇌를 상대하고 대법을 부쉈을 것이야!’
탁운비와 서문영화는 이제 대법에 대한 불안감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진 대협, 아직 이곳에 적들이 많을 텐데 어떻게 할 계획이오?”
“일단 신양으로 돌아가서 합류한 뒤 상황을 보는 게 좋겠습니다. 사도련의 무인들이 아직 대별산맥에 많거니와, 사도련주도 이 근처 어딘가에 와 있을 겁니다.”
진우선은 정무맹의 신양 임시 거점을 나서기 직전, 북쪽에서 사도련주가 접근하고 있는 것을 느꼈었다.
하지만 신양현 남쪽의 대별산맥에 들어와 있는 지금은 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접근하는 기운을 감별할 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진우선은 사도련주가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진우선의 설명을 듣고 탁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요상단은 말하지 않은 거였구려. 시간이 없으니.”
“그렇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소. 근데 나에게 청령보정환이 있는데, 이건 급히 효력을 볼 수 있소. 반 각(약 7-8분)만 기다려줄 수 있겠소?”
“그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근데 탁 형은 정말 만사에 준비가 철저했군요.”
“과찬이오. 이건 진 대협도 구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소.”
요상단으로 내상을 다스릴 수 있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청령보정환(淸靈補精丸)은 요상단보다 가격이 훨씬 비싼 대신 약효가 빠르고 강했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 쓰기에 딱 좋았다.
잠시 후.
혈색이 다소 안정된 탁운비가 서문영화를 업으며 말했다.
“진 대협, 기다려줘서 고맙소. 이제 경신술 정도는 문제없으니, 영화는 내가 계속 업고 가겠소. 길을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죠.”
진우선이 탁운비와 서문영화를 앞장서며 신양으로 향했다. 안전하면서도 빠른 방향으로 이끄니, 그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적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
진우선이 잠시 멈칫했다.
검노야도 섬뜩함을 느꼈다.
[우선아. 극사의 기운이 사방으로 마구 날뛰고 있구나. 느껴지느냐?]
‘네. 저도 느꼈습니다! 얼른 가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꾸나.]
진우선이 검노야의 생각에 동의하며, 곧장 탁운비에게 말을 건넸다.
“탁 형. 북쪽에서 극사의 기운이 흉포하게 느껴집니다. 그건 곧 사도련주의 기운이 맹렬하다는 것일 테니, 맹의 무인들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아!”
“일단 빨리 거점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소.”
탁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경신술을 더 빠르게 펼쳤다.
그들은 임시 거점인 양수객잔에 정말 빠르고 무사히 도착했다.
진우선은 탁운비와 서문영화를 쉬게 하고, 곧바로 만상각주 공야청을 찾았다.
“각주님, 심각한 상황입니다. 사도련주의 기운이 너무나 강해서, 맹의 무인들이 위험합니다!”
“아! 안 되는데!”
“제가 바로 가서 한 손 거들겠습니다.”
“자네가 바로? 이제 막 대법을 저지하고 왔지 않은가?”
“아직은 괜찮습니다.”
공야청은 진우선의 말이 든든한 한편, 그가 무리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대별산맥 깊숙이 들어가 칠성홍옥대법을 막고, 악중뇌 사마광후와 칠사 여섯 등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지 않았는가.
말은 간단했으나, 그 과정에서 몹시 고생했을 게 뻔했다. 내력 소모 또한 절대로 적지 않았을 터였다.
진우선은 그런 것들을 하나도 내색하지 않은 채 또다시 나서고 있었다.
현청각주 여문탁이나 백무원주 이능운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상황에서 진우선의 결정은 너무나 고맙고, 미안했다.
그러나 공야청은 자신의 감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만상각주로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북쪽의 평원에서 결전 중이네. 무인들이 군집해 있으니 찾기 쉬울 걸세.”
문득 공야청은 진우선의 눈동자가 정말 맑고 그윽하여 의기가 넘치는 걸 느꼈다.
“대규모 난전은 없고, 맹주님과 숭의각주, 검후께서 사도련주와 상대 중이네.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
쐐애애액-!
사도련주 섭무악이 쏘아댄 핏빛 구슬, 혈주(血珠) 하나하나가 공기를 찢으며 허공을 격하고 날아왔다.
콰앙-!
콰콰쾅-!
독고월이 양팔을 마구 휘둘러 태청신권(太淸神拳)과 태허신수(太虛神手)의 절초들을 마구 쏟아냈다. 필요하다면 즉시 펼쳐야 했다. 급박하여 순서를 가릴 틈조차도 없었다.
그렇게 벼락같이 연신 뿜어진 강기(罡氣)가 혈주를 허공에서 폭발시켰다.
승의각주 탁신도 쉴 새 없이 도를 휘둘렀다.
선명한 황색빛 도강(刀罡)이 혈주를 갈라서 터트렸다.
검후 모영영은 검을 표홀히 휘두 르며 검강(劍罡)을 쏘아댔다.
검강이 화살처럼 뻗어 나가 혈주를 맞추니 터져버렸다.
“큭!”
그 과정에서 독고월이 신음을 흘렸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섭무악의 공세는 막아내기만도 벅찼다.
탁신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그는 온몸이 이미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이미 도를 수백 번은 휘두른 것 같은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혈주가 줄어들지를 않는다니!”
“겁황혈사강기는 내공이 마르지 않는 한 무한하네. 그래서 겁황이지.”
탁신의 물음에 독고월이 재빨리 답했다. 모영영은 말할 틈조차 없어 보였다.
겁황혈사강기(劫荒血邪罡氣)는 섭무악이 익힌 절대무공 중에서도 상당히 애용하는 것으로, 혈주 하나하나가 강력한 위력을 지닌 강기였다.
강기는 기를 유형화한 것을 일컫는데, 강력하게 실체화하고 압축하는 과정이 동반되었다. 그러려면 무공에 대한 지극한 깨달음을 얻어서 그만큼 내력을 섬세하게 다룰 수 있어야 했다.
평원의 네 사람은 모두 그런 경지를 넘어선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정무맹 측 세 사람 중 누구도 섭무악의 경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수세에 잔뜩 몰려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이 협력하여 섭무악의 공격을 감당하니, 단숨에 무너지지도 않았다.
그 말은 곧, 어느 한쪽도 쉽게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길!”
섭무악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짜증을 냈다.
대별산맥의 팔괘동에 벌어진 상황을 얼른 확인하러 가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그렇다고 근접전을 펼치고 싶지는 않았다.
정무맹의 최고수 두 명과 검후를 상대로 근접전을 펼쳐, 상처 하나 없이 이기기는 요원한 까닭이었다.
또한, 섭무악은 대법을 이룬 자신의 육체가 너무나 소중했다.
그때였다.
‘……!’
빠르게 다가오는 기운에 섭무악이 속으로 매우 놀랐다.
‘정무맹에 극에 이른 자가 있다고?’
종전에 검후가 다가올 땐 극에 이르지 못함을 알아 크게 상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등봉조극을 이룬 자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