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대법은 과연? (2)
먼동이 터올 무렵.
사중효 등자경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역할은 대법이 이루어지는 팔괘동을 정무맹으로부터 지켜 내는 것이다.
분명 지난 몇 시진 동안 정무맹의 움직임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대별산맥 곳곳, 지나갈 수밖에 없는 위치마다 사도련의 무인들이 진을 치고서 정무맹의 무인들과 마주치고 싸웠다.
생각했던 대로였다. 정무맹이 어찌 이리 빨리 눈치챘는지 약간 궁금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왜 이리 찜찜하지?’
놓친 게 있었던가.
등자경이 사마광후에게서 받은 명령과 해금파가 추가로 전해준 내용을 떠올렸다.
칠성홍옥대법은 대략 이틀 정도 걸릴 것이다. 그때면 련주님도 와 계실 것이다.
-네가 할 일은 그때까지 팔괘동을 지키는 것이다. 신양에 몰려와 있는 정무맹의 무인들을 조심하라.
-파천문주와 흑요궁주, 사사천주께서 직접 도와주시기로 했다. 사파와 흑도의 동도들 역시 힘을 모아줄 것이다. 하지만 정무맹에서 맹주까지 움직였다고 하니, 특히 유의해야 한다.
-이형. 대형이 대법이 이루어지는 동안 팔괘동에서 십 리는 떨어져 있으라고 했어요. 대법의 기운에 사도련의 무인들이 휩쓸릴 수 있어서요.
-그리고 제가 새로워진 칠사와 함께 정무맹을 쓸어버릴 계획을 짜도록 할게요. 대형이 분부하셨어요.
‘놓친 건 없다.’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본 등자경이 확신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등자경은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해금파가 계획을 짜는 곳으로 내려갔다.
“막내야.”
“이형, 무슨 일이에요?”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하다. 꼭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구나.”
“정무맹이 한밤중에 접근해 와서 그런 거 아니에요?”
“맞아. 그 생각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닌데…….”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세차게 싸운다고 해도 정무맹은 팔괘동의 위치를 정확히 모를 테니까요.”
“그래도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왜 그러죠? 이형은 평소에 예민했던 적이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더 불안해.”
해금파가 등자경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등자경은 천성이 느긋하고 자유로운 사람이라 심정이 크게 요동하는 때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위태로워 보였다.
“한 바퀴 돌아보고 와야겠어.”
“그렇게 하세요.”
해금파는 이럴 때 차라리 산책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등자경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등자경이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
신양현 북쪽의 평원.
세 고수가 한 차례 격전을 치르던 중, 사도련주 섭무악이 강력한 장법을 양쪽으로 펼쳐냈다.
양쪽에서 그걸 받아야 하는 이들은 독고월과 탁신이었다.
펑-! 퍼펑-!
정무맹주 독고월이 재빨리 주먹을 휘둘렀다. 태청무진신공의 내력으로 휘두르는 태청신권의 일초였다. 그에 섭무악의 장력이 펑-하고 터졌다.
숭의각주 탁신은 패도십팔절의 십삼절인 뇌격단천(雷擊斷天)의 초식으로 마주쳐갔다. 그러자 섭무악의 장력이 퍼펑-하고 터졌다.
그 소리만으로도 탁신의 대응이 독고월에 비해 약간 아쉽다는 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섭무악이 독고월과 탁신에게 장력을 뿌리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외쳤다.
“맹주. 잠깐!”
초식을 이어가려던 독고월과 탁신이 멈칫했다.
독고월이 물었다.
“갑자기 뭐요?”
“맹주. 내력이 왜 그렇지?”
“무슨 말이오, 그게?”
독고월이 속으로 놀람을 삼키며 되물었다.
“맹주의 내력은 일전에 겪어봐서 아는데, 웅대하며 맑은 힘이 있었지. 한데 지금은 내력이 한 곳에 온전히 힘을 싣지 못하더군. 무언가 흩어져 있어. 정심이 깨진 것 같은데…… 신단으로 막은 모양이고.”
섭무악은 마치 독고월의 단전을 직접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탁신이 놀란 눈으로 독고월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독고월은 무뚝뚝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싸우는 중에 별말을 다 하는군.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
“당연히 상관있지. 나는 적사안을 펼친 적이 없는데, 맹주에게 적사안의 흔적이 있으니까.”
적사안(赤邦眼)은 섭무악이 익히고 있는 사술로, 상대의 심령을 흔들어 정심을 깨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정심을 깨트리면 힘이 모이지 않고 흩어지며, 종국에는 심령의 그릇이 깨져 사람이 무너지고야 마는 무서운 술법이었다.
그 적사안이 강호에 이름을 알린 건 백 년 전의 절대고수 사황에 의해서였다.
사황은 정파의 무인들을 상대할 때마다 적사안을 펼쳤고, 어지간한 고수가 아닌 이상 픽픽 쓰러지기 일쑤였다.
이로 인해 사황의 악명이 하늘을 찔렀으니, 그 사악한 위력을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다만 익히는 것이 지극히 어려웠으며 펼치는 건 그보다 더 난해했다.
그래서 현재는 거의 실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실제로 사도련에서도 모든 사술에 통달했다는 섭무악만이 적사안을 익히고 있었다.
그 외에는 적사안의 존재 자체를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술법의 대가인 악중뇌 사마광후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정무맹주가 적사안에 당했다니!
자신이 적사안을 펼친 적이 없는데, 도대체 누가 펼쳤단 말인가.
“그랬군. 일단 섭무악 당신은 아니었어.”
“네놈도 자세히는 모르나 보군.”
하지만 독고월은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에 섭무악이 대충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탁신은 두 사람의 대화와 섭무악의 태도에서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어 넌지시 물었다.
“련주는 이 대결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가 보오.”
“그렇게 느꼈다면 잘 느꼈네. 감이 살아있군.”
섭무악은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지금 펼치는 대결을 반쯤은 승리할 목적으로, 반쯤은 한바탕 어우러지는 목적으로 임하고 있었다.
“치욕스럽군.”
“그리 생각하지 마. 둘 중의 한 명이라도 극에 오르면 전력으로 상대해줄 테니까.”
탁신이 깊게 실망하자, 섭무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딴에는 강자의 아량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
갑자기 섭무악이 심각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천지에 동이 터오고 있는데, 하늘의 천기가 바뀌고 있었다.
‘사기가 흩어지고 있다고? 설마?’
오늘 하늘에 휘몰아치던 사기는 칠성홍옥대법의 기운이었다.
한데 소용돌이치며 몰려들던 사기가 역으로 풀리며 사방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상황이 달라졌군.”
섭무악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에게서 북풍 같은 싸늘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큭!”
탁신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섭무악이 뿜어낸 기세만으로도 일순간 내력이 휘청인 까닭이었다.
조금 전에 치욕스럽다고 느꼈는데, 인제 보니 그건 어쩌면 자만이었을지도 몰랐다.
독고월은 이를 악다물고 신음을 삼키며 섭무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섭무악은 그런 두 사람의 상황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하늘만 바라보며 탄성을 흘렸다.
“믿을 수 없군. 칠성홍옥대법은 당연히 성공하는 거였는데!”
그러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독고월과 탁신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섭무악의 눈동자가 공허했다.
독고월과 탁신은 그를 보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태청무진신공의 내력이 독고월의 심혼을 곧바로 일깨웠다.
“후후. 우리가 해냈나 보군.”
“그럴 리가 없는데…….”
독고월이 작게 미소 짓자, 섭무악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천기의 흐름에는 거짓이 존재하지 않았다. 천기를 보고 느낀 게 사실이리라.
섭무악이 한숨을 내쉬며 현상황을 받아들였다.
“직접 가봐야겠군. 원하던 대로 이 대결을 진심으로 임해주지.”
“크윽! 바라던 바요.”
탁신이 섭무악의 날카로운 기세를 받아내며, 씨익 웃었다.
언제 극을 넘어선 고수의 진정한 공격을 받아보겠는가.
탁신은 무에 대한 탐욕과 목숨을 건 승부욕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이제 섭무악의 진정한 공세가 펼쳐질 것이다. 그것에 심히 떨리는 한편, 상당히 기대되기도 했다.
바로 그 순간,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제가 한 손 거들어도 되겠습니까?”
“누구시오?”
독고월이 묻자, 단아하나 강단 있어 보이는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을 밝혔다.
“검각에서 온 모영영입니다.”
“그렇다면 검후?”
“감사하게도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독고월은 신양현으로 오면서 만상각주에게 검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과연 자세히 보니, 모영영의 왼쪽 손목에 파사불주가 걸려 있었다.
“알겠소. 고맙소.”
독고월이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참전을 허락했다.
“셋이군. 그래봤자 별다를 것 없는 사람 하나 더 늘어난 셈이겠지만.”
셋이면 뭐 어떨까. 검후 역시 극에 다다른 무인이 아닐진대.
섭무악은 오히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팔괘동에 얼른 가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즉시 힘을 끌어올려, 거침없이 맞부딪쳐갔다.
콰콰콰앙-!
한데 결투의 양상은 섭무악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검후가 참전하여 삼 대 일이 된 순간에 전력의 추가 엇비슷해졌는지, 그들의 대결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
스윽-!
“크윽.”
도가 표홀하게 적을 베었다.
탁운비가 무표정하게 적을 베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커다란 도는 양손으로 쥐어야 제 위력이 나오건만, 지금은 오직 한 손으로 몸을 날리며 베고 있었다.
등에 업은 소중한 사람, 서문영화 때문이었다.
“후우-. 후우-.”
탁운비가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거칠 만했다. 사도련의 무인들을 끊임없이 조우한 까닭이었다. 탁운비는 그때마다 일도필살의 기세로 적을 베었다.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지체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일도필살밖에 없었다.
길을 잘못 든 것도 아니었다. 동굴을 나와 진우선과 함께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뿐이었는데, 적들이 많았다.
어쩌면 걸음이 느려진 탓이리라. 첫 적을 마주친 뒤 하나둘 그를 쫓아오기 시작했으니 행적이 드러난 탓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회되지 않았다.
‘영화!’
등에 서문영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탁운비가 힘을 냈다.
얼른 발을 놀렸다. 멈춰 있을수록 적이 몰려들게 할 뿐이었다.
서문영화를 받치는 왼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적을 조우했다.
“웬 놈이냐?”
슈악-!
탁운비는 말을 하지 않았다. 멈칫하지도 않았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도를 그어 적을 베었다.
그리고 또 전진했다.
또 적을 만났다.
사도련은 대별산맥에 꽤 촘촘하게 무인들을 세워놨는지, 일 각에 서너 번씩 적들과 조우하고 있었다.
스걱! 스윽-!
탁운비의 도가 또다시 번쩍였다.
그가 연거푸 거대한 도를 휘두르며 적을 베었다.
다행인 건 내력이 아직 적지 않게 있어 적들을 베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일도필살의 기세로 나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조건이었다.
“후우-! 후우-!”
하지만 숨이 가쁜 건 어쩔 수 없었다.
탁운비가 두 사람을 벤 뒤, 또 잠시 숨을 골랐다.
‘나는 정말 강하지 않았구나. 이제 반 시진쯤 왔을 뿐인데, 지쳐버렸어.’
잠시 아득한 생각이 들었다.
발이 끌리고 허리가 굽어졌다. 몸이 전체적으로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는 절대 여기서 멈출 순 없어!’
탁운비가 마음을 다잡았다.
문득 땀내가 나는 것 같았다. 등도 축축히 젖은 느낌이 들었다.
‘영화가 불편하겠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
잠시 혼절에서 깨어난 서문영화가 작게 불렀다.
“응, 나야.”
“나를 대법에서 빼냈구나.”
“진 대협이 대법을 부쉈을 거야.”
“아!”
서문영화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와중에도, 상황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나 힘이 없어.”
“알고 있어.”
둘이 담백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고마워.”
“아니야. 이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멀리 왔네.”
“멀리?”
“응, 저기 신양이 보이잖아.”
서문영화의 말에 탁운비가 전방을 보니, 아침이 찾아온 신양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네. 다 왔구나. 조금만 참아. 우리 영역에 들어서면 지금보단 안전할 테니.”
바로 그때였다.
사기를 풀풀 뿜어대는 한 사내가 시야에 들어섰다.
사중효 등자경이었다.
그가 탁운비와 서문영화를 보았다. 정확히는 서문영화를 알아보았다.
“네가 어떻게!”
그리고 깨달았다.
“그렇다면…….”
대법은 일부 실패, 혹은 완전 실패이리라.
지금 한창 대법에 임하고 있어야 할 서문영화가 눈앞에 있으니, 그리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였구나! 찝찝했던 이유가.”
등자경은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던 불길함의 원인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네놈들-!”
등자경이 크게 소리치며 강력한 권격을 날렸다.
그 순간, 탁운비가 곧장 도를 휘둘렀다.
카앙-!
마치 쇠끼리 부딪친 소리가 났다. 그만큼 권격에 실린 힘이 강력했다는 증거였다.
‘크윽!’
탁운비가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겉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손아귀도 살짝 찢어져 피가 새어나왔으나,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쿵쿵쿵-!
등자경이 땅을 힘차게 밟으며 돌진했다.
그에 탁운비가 손아귀에 억지로 힘을 주며 기운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평소라면 상대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강자이지만, 지금은 상대해야만 했다.
신양이 눈앞에 보이는데 여기서 멈춰 설 순 없었다.
퍼억-!
등자경이 무쇠 같은 주먹으로 도를 후려치고, 탁운비의 장심을 때렸다.
“쿠억!”
탁운비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단박에 스무 걸음이나 뒷걸음질했다.
강력한 일격이었다.
‘내상도 입었다!’
입가로 선혈이 흐르고, 기혈도 엉켰다. 탁운비는 조금 전에 공격을 허용한 탓에 힘을 거의 잃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지.’
탁운비가 이를 악물고 상체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왼손으로 등에 업은 서문영화를 받치고, 오른손으로 도를 쥐고 있었다.
이제는 손아귀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아…….”
서문영화의 힘겨운 한숨이 귀에 닿았다.
탁운비는 주저앉을 수 없었다.
이 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바로 그때였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탁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