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대법은 과연? (1)
한편, 정무맹주와 사도련주가 신양현 북쪽의 평원에서 만나고 있는 그 시각.
신양현 남쪽의 대별산맥 초입에서도 정무맹과 사도련의 무인들이 마주치고 있었다.
사도련 무인들은 환히 웃고 있었다. 반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적과 만난 이 순간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중에 한 사내가 흥이 나서 외쳤다.
“정무맹 촌것들아. 너희들은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듣는군.”
현청각주 여문탁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에 커다란 덩치에 묵빛 장포와 장갑을 낀 중년인이 무리 뒤에서 걸어 나오며, 호기롭게 외쳤다.
“큭! 시답잖은 소리라. 그게 본 문주를 두고 한 소리인가?”
“파천문주군. 오랜만이오.”
“그래, 오랜만이구나, 여가 놈아!”
여문탁은 그간 강호를 동분서주하면서 파천문주 차북도를 만난 적이 몇 번 있었다.
서로 실력을 맞댄 적도 한 번 있었는데, 그때 여문탁의 검이 차북도의 묵천신권(墨天神拳)을 보기 좋게 꺾었었다.
“여기서 네놈을 만날 줄이야! 크크크. 예전에 방심하여 당했던 수모를 이제야 갚게 되었군.”
“그런 일이 있었나. 난 나에게 패한 자들은 바로 잊는 편이라서.”
여문탁이 차북도의 말에 차갑게 대꾸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냉담하게 말하니, 마치 상대를 무시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차북도는 흥분하지 않고, 계속 입을 벌린 채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그런 차북도의 옆으로 검을 든 한 중년인이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현청각주 여문탁, 정무맹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실력자라지? 당신의 낙일무정검이 꽤 유명하더군. 그래서 과연 어느 정도인지 내 검으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딱 좋군.”
“당신은 누구요?”
“막검해. 흑요궁의 주인이지.”
“아. 막 궁주였군. 나도 용사팔형이 재미있는 검법이라고 몇 번 들어봤지.”
용사팔형(龍蛇八形)은 흑요궁주 막검해를 대표하는 검공이었다.
그리고 흑요궁은 크게 환희극락원과 하오문과 녹림을 총괄하는 흑도방파의 구심점이었다.
막검해가 여문탁에 대해 아는 척한 건, 하오문을 통해 정무맹의 정보를 꿰고 있는 까닭이었다.
어쨌든, 막검해가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정무맹의 높으신 분이 내 무공까지 기억해주다니 고맙군그래.”
“어쩌면 오늘 황천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궁주의 무공 정도는 기억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여문탁이 싸늘하게 응수하며, 차북도와 막검해를 노려보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능히 감당하겠다는 기세를 뿜고 있었다.
[무원주. 여기는 우리가 맡을 테니, 자네는 임무를 하러 가보게.]
[알겠습니다.]
이능운이 여문탁과 전음으로 대화하며 주위를 살폈다.
현청각의 정예 백여 명이 여문탁을 따르고 있다.
반면 상대 진영에는 파천문의 무인 백여 명과 흑요궁의 흑도 무리 이삼백 명이 몰려 있었다.
비록 숫자는 사도련 측이 많으나, 현청각의 정예들은 위축됨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 정도는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이능운 자신을 포함한 백무원의 무인 열 명이 있었다.
‘열 명이라면 몸을 빼기 어렵지 않지.’
이능운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스읏-!
여문탁이 검을 뽑아 들고 전방으로 뛰어갔다.
그는 지금 검만이 아니라 온몸에서 싸늘한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러자 산자락의 널따란 길에 쫙 서 있던 현청각의 무인들이 한꺼번에 기세를 피워 올렸다.
우우웅-!
대기가 진동했다.
이어 정예들이 여문탁의 뒤를 따라 힘껏 앞으로 짓쳐들자 맹렬한 기파가 폭발하듯 뿜어졌다.
그때, 이능운이 백무원의 무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임무를 위해 이곳을 벗어난다!”
“알겠습니다.”
“그러죠.”
이능운을 제외한 백무원의 무인 아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능운과 이들의 임무는 악중뇌 사마광후가 펼칠 칠성홍옥대법을 막는 것이었다.
이능운이 아홉 무인들을 이끌고 전장을 이탈했다.
하지만 잠시 후.
채채챙-!
온갖 병장기의 충돌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스윽-.
백무원의 무인 중 한 명인 한효기가 도를 그어 내리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제길! 갈 길 바빠 죽겠는데.”
상대해야 할 사사천의 무인은 끝이 없었다.
그들은 얼핏 헤아려도 백 명이 넘어 보였다.
백무원의 무인 열 명은 하나같이 사사천 무인들의 실력을 웃돌았으나, 한꺼번에 덤벼오니 쉽사리 돌파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단숨에 베고 지나갈 수 있는 머릿수가 아니었다.
“하아-!”
한효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사천과의 조우는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백 명이 훌쩍 넘는 사사천의 무사들이 넓게 펼쳐져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능운과 백무원의 무인들이 쉽사리 피해갈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게.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한효기에게 사사천 무사 하나가 쇄도해 왔다.
그는 압도적인 형세를 등에 업고서 한효기의 어깻죽지를 겨냥해 베어 들어오며 외쳤다.
“죽어랏!”
스앗-.
한효기가 재빨리 전방을 베었다.
그 일격으로 달려들던 사사천 무사의 숨을 거두었다.
한효기는 빈틈 많고 허술해 보였으나,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으로 적을 쓰러뜨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격해오던 사사천 무사의 시선 아래로 몸을 숙였다가 일어서면서 일격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짜증나는 상황인데.
“빨리 가야 하는데!”
한효기는 마음이 급했다.
적을 베고 가는 건 나쁜 게 아니지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해야 월봉을 많이 받고 추가수당까지 두둑하게 챙길 수 있는 까닭이었다. 그래야 즐겁게 술을 마시고 뜨거운 밤을 보내기 좋았다.
물론 칠성홍옥대법을 저지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휘유-!”
한효기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원주 이능운을 찾았다. 그가 어떤 방침을 내릴지 궁금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기대를 안고서 시선을 돌렸을 때, 이능운은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탕! 타탕!
이능운의 검이 백발도객의 공격을 연거푸 튕겨냈다.
그들은 팽팽했다.
두 사람의 강맹한 기파가 사방으로 마구 튀어 땅이 푹푹 패일 정도였다. 주변의 무인들 역시 무차별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다.
“제길! 사사천주잖아!”
사사천주 혁련회.
그는 일흔의 노고수로 사도련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다. 아무리 백무원주 이능운이라 해도 쉽게 쓰러뜨리지 못할 터였다.
“제길, 내가 낄 판도 아니고.”
한효기가 땅거죽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사사천의 무사 하나가 날카로운 검을 뿌리며 다가왔다.
한효기가 본능적으로 상체를 비틀었다. 그리고 반동의 힘으로 도를 그어 올렸다.
파앗-.
사사천 무사의 전신이 쩍 갈라지며 핏줄기가 확 튀었다.
“제길! 대법을 막아야 하는데!”
한효기가 불평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데 그의 혼잣말은 비단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대법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이능운은 불평이 아니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칠성홍옥대법을 막아야만 한다.
그게 자신이 해내야만 하는 역할이었다.
‘우선아! 너는 어디지?’
이능운이 마음속으로 애타게 진우선을 찾았다.
사사천주를 만나 발이 붙잡혀서 움직일 수 없으니,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오직 진우선뿐이었다.
‘어쩌면 네가 해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능운의 마음에 미안함과 기대감이 반반씩 자리하고 있었다.
***
홍옥기로 만들어진 팔괘의 벽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칠대악인의 내력을 모두 합쳐 만들었기에 뿜어내는 힘이 너무나 거대하고 사악했다.
애초의 계획대로 칠사 일곱 명이 나눠 가져도 감당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악중뇌 사마광후는 그걸 자신의 온몸에 입었다.
“크흐흐흐! 흐흐!”
사마광후가 광기를 흘렸다.
그의 원한 서린 검붉은 안광은 수배나 더 짙어졌고, 악기가 마구 솟구쳤다.
‘악귀구나, 악귀!’
진우선이 그런 사마광후를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패왕금룡신공의 호심진기가 사방에 꽉꽉 들어찬 사기와 악기로부터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때, 사마광후가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팔괘의 벽은 그의 온몸에만 새겨진 게 아니라, 상단전으로도 파고들었다.
그러자 사마광후는 무엇이든 능히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마구 솟아났다.
절대적인 힘, 모든 걸 꿰뚫을 기운이 충만한 까닭이었다.
“이런 힘이 있었을 줄이야! 끝내주는군.”
힘에 취한 사마광후가 손을 뻗었다.
온몸에 각인된 팔괘가 붉게 빛나며, 사악한 기운이 덩어리째로 쏘아졌다.
촤앗-!
“……!”
진우선이 쏘아져오는 기운을 직시했다.
핏빛을 띠는 사기의 정수는 홍옥기나 다름없었다.
다만 아까보다 작으니 소홍옥기(小紅玉氣)라 할까.
진우선은 그 소홍옥기가 너무나 불길하여 얼른 패왕금룡신공에 집중했다.
소홍옥기가 금빛 기막에 부딪쳤다.
지직- 지지직-
호신강기의 둥근 막에서 핏빛 불꽃이 튀었다.
소홍옥기는 송곳처럼 뾰족하게 날을 세워 직진하며 뚫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치도 파고들지 못했다. 오히려 잠시 후 파삭- 소리 내며 소멸해버렸다.
“뭐야!”
촤촤촤촤앗-!
사마광후가 기운을 마구 쏘아댔다.
소홍옥기가 암기처럼 빠르게 날아왔다.
치지지직- 치지직-
그러나 패왕금룡신공의 호신강기는 변함없었다. 소홍옥기들을 단 하나도, 단 한 치도 허락하지 않았다.
파슷! 파슷!
부서지며 튕겨 나간 소홍옥기의 작은 조각들이 바닥에 있는 수미금강령의 파편에 닿아 파란 불꽃이 되어 타오르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사마광후가 절규하며 악기를 줄기줄기 뻗쳐냈다.
더욱 크고, 더욱 뾰족한 핏빛 창들이 쏘아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진우선이 호신강기와 호심진기로 무장한 채,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뎠다.
푸슥- 푸스슥-
살의 가득한 홍옥기의 핏빛 창날들이 호신강기에 닿자, 지글지글 끓어오르더니 사라졌다.
소가 아니라 중으로, 중이 아니라 대홍옥기라 부를 정도로 기운이 커져도 소멸하는 건 변함없었다.
“이익-!”
사마광후가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하지만 진우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한 걸음 내디뎠다.
광기를 흘리던 사마광후의 얼굴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 얼굴에 두려움이 어리고 있었다.
촤촤촤촤악-!
그르르-! 그르르-!
사마광후가 발악하듯이 기운들을 쏘아냈다. 진우선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팔괘의 벽에 어린 칠성홍옥의 기운은 여전히 짙어 아직도 여력이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사마광후의 앞에 도착했다.
“저리 가! 다가오지 마-!”
여전히 팔괘의 석판에 앉아 있던 사마광후가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 질렀다.
“팔괘의 벽이 당신을 무너뜨리고 있소. 아시오?”
“그래서 뭘 어쨌다고?”
“칠성홍옥대법은 역시나 너무 위험했소. 그 기운을 아무도 감당하지 못했을 거요.”
“네놈 때문이다! 다 네놈 때문이야! 내가 어떻게 준비했는데!”
사마광후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제 눈이 찢어지고 흉악했으며, 입술이 녹아서 흘러내려 시뻘건 기운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진정 악귀의 모습이었다. 이제 사마광후의 멀쩡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 덕분이오. 세상에 내놓지 않게 되었으니까.”
진우선이 단호하게 말하며 검을 들었다.
그리고 광륜의 오행진기를 한없이 끌어올려 검에 담았다.
검에 빛이 어렸다. 광륜의 기운이 극도로 모여 유형화되고 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그 힘을 느낀 사마광후가 벌벌 떨며 목이 찢어지게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안 된다고!”
슥-!
진우선이 사마광후를 베었다.
팔괘의 벽을 잘랐으며, 실타래 엉킨 듯이 온몸에 휘감겨 있던 칠성홍옥의 기운도 절단했다.
그러자 사마광후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그와 동시에 홍옥기가 수십 조각으로 나뉘더니 사방으로 마구 튕겨 나갔다.
벽에 닿으면 벽을 녹이고, 바닥에 닿으면 바닥을 녹였다. 돌벽이든 무엇이든 지르르 녹여버리고 있었다.
원혼마저 태워버릴 기세였다.
광장에 널려 있던 여섯 구의 시체도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심지어 시체에서 흘러나오던 혈수마저 증발시켜 버렸다.
그때, 검노야가 경고했다.
[우선아. 동굴이 곧 무너지겠구나. 얼른 나가거라.]
‘알겠습니다.’
이는 진우선도 생각하던 바여서, 얼른 몸을 날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동굴을 마구 붕괴시키는 사기들이 진우선의 호신강기는 뚫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패왕금룡신공의 위용이었다.
잠시 후.
쿠르르릉-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후우-.”
진우선이 구멍조차 남지 않은 동굴 입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아. 정말 수고했다.]
검노야가 진우선을 칭찬하며 하늘을 보았다.
바로 머리 위에서 휘몰아치던 사기의 소용돌이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때마침 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로 인해 천지간에 빛이 들면서 사기가 물러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