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서문영화 (2)
“오라버니.”
“영화! 기다리고 있었어!”
“대체 여기에 왜 왔어요?”
“너를 꼭 만나려고 왔어.”
서문영화가 등장한 순간, 탁운비는 옥소 연주를 멈추고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쌀쌀맞게 탁운비를 대하고 있었다.
“내가 한 말 잊었나요? 나를 잊고서 잘 살라고 했잖아요.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영화. 내가 어찌 그럴 수 있겠어?”
“하아-!”
얼굴이 잔뜩 굳은 서문영화가 아미를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 들어봐. 내가 맹에서 도움을 약속받았어. 맹은 전력으로 칠성홍옥대법을 막아낼 거고, 그 틈에 너도 구해낼 수 있어!”
“그래도 불가능해요.”
“아니야. 가능해.”
“오라버니. 내가 말했잖아요. 련주님과 호법님들이 모두 나섰다고요. 특히나 련주님은 이번에 극사를 넘어섰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잖아요. 천하제일인이에요.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어요.”
극사(極邪)는 사도의 무공으로써 인간이 익힐 수 있는 정점에 다다른 경지였다.
등봉조극이나 극마를 이루어야 극사경의 무인과 대적할 수 있었다. 그 경지에 올라서지 못했다면 열세를 면키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무인은 현재 강호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나마 정무맹주 의천무제 독고월이나 현재 천마교주인 절대천마만이 등봉조극, 극마의 경지이지 않을까 추측될 뿐이었다.
그런데 사도련주는 극사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앙천극사대법으로 극사경마저 넘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서문영화가 그를 천하제일인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며 두려워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천하제일인이라 해도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어!”
“아니에요. 오라버니가 련주님의 힘을 못 겪어봐서 그래요. 하남과 안휘의 문파들이 파괴되는 게 순식간이었어요. 손 한 번 휘저었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바로 몰살되었다고 하더군요.”
서문영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냉담하게 말했다.
“련주님은 이미 인간을 벗어났어요. 그러니 정무맹에서도 맹주님이 오시는 게 아니라면 어려울 거예요.”
“영화!”
그녀는 극도로 겁먹은 듯했다.
이래서는 서로 간에 대화의 간극을 좁힐 수 없을 듯했다.
그때, 진우선이 둘의 대화에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문 소저. 저는 탁 형과 함께 정무맹에서 온 진우선이라고 합니다.”
“아!”
서문영화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탁운비의 손님이 있는 걸 처음부터 알았으나, 흥분한 모습을 먼저 보인 까닭이었다.
“잠시 실례했습니다. 서문영화입니다.”
“괜찮습니다.”
서문영화가 금세 마음을 진정시키며 진우선에게 인사를 건넸다.
“진 대협. 영화는 나를 생각해서 화를 냈었던 거요. 이해해 주시오.”
“네, 저도 서문 소저께서 탁 형을 많이 걱정한다고 느꼈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서문영화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탁운비가 그런 서문영화에게 진우선을 소개했다.
“영화. 진 대협은 맹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로 천마교의 흑괴와 사도련의 사중효 등자경도 물리치신 분이야. 특별히 전담으로 우리를 도와주기로 하셨어.”
“아! 그 이야기는 살짝 들었습니다. 귀한 분이 오셨군요.”
서문영화는 얼마 전 칠사끼리 모인 장소에서 혁련패의 입을 통해 사중효 등자경이 내상 입은 이야 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진우선에게 곧장 자기 뜻을 밝혔다.
“진 대협, 초면에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참으로 죄송하나,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계획은 너무나 무모합니다.”
“왜 그러시는지요? 사도련주와 악중뇌 사마광후, 사중효 등자경 때문이라면, 저희도 위험하다는 걸 알고 대비하는 중입니다. 혹시 반대하시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은 진 대협과 정무맹의 고수들이 상대할 수 있다고 쳐도, 사도련주는 아무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정무맹주께서 오신다고 해도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 정도입니까?”
서문영화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무맹주가 온다면 대응할 수 있을 거란 듯이 표현했으나, 이제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오대사파가 사도련의 주축인데, 왜 사도련의 전권을 맡기면서 따르겠습니까? 사도에서 유서 깊은 저희 서문세가가 왜 아무런 말도 않겠습니까?”
“음!”
“련주님의 무공이 하늘에 닿았고, 하늘마저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거역하면 파멸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진 대협께 깊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서문 소저께서는 완고하시군요.”
“사안이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탁운비가 침음했고, 진우선도 서문영화가 완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운비 오라버니를 잘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이야기라도 하는 건 어떠십니까?”
“무슨 이야기를 더 한다는 말씀이시죠?”
“저는 서문 소저께서 탁 형께 마지막 통보를 하러 찾아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영화! 정말이야?”
탁운비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채 외쳤다. 진우선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서문영화의 마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서문영화가 애틋한 눈으로 탁운비를 한 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별채 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둥근 탁자에 품(品) 자로 앉은 세 사람 사이로 정적이 흐르는 까닭이었다.
탁운비의 소리 죽인 한숨.
서문영화의 말할 수 없는 슬픔.
‘너무 안타깝다!’
진우선은 그토록 사랑하던 연인이 서로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각자 최고의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끝은 행복이 아니었다.
‘비극적이네.’
상황이 참 모순적이었다.
어쨌거나,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기 위해 진우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문 소저. 칠성홍옥대법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물어보세요. 아는 한에서는 대답해 드릴게요.”
“대법이 열나흘 남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정확한 장소를 알려줄 수 있습니까?”
“날짜는 맞습니다. 하지만 장소는 저도 모르겠어요. 아마 사마 호법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
서문영화는 속이는 기색이 없었다. 정말로 사마광후가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다른 걸 물었다.
“서문 소저. 제가 듣기로 대법을 치르면 육신의 주인은 이지를 잃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혁련패와 막소소는 그걸 숫제 걱정하지 않고 대법의 결실만을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등자경도 비슷했고요. 도대체 어느 쪽이 진실인 겁니까?”
“그들은 대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대법으로 얻게 될 칠대악인의 내단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칠대악인이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내단을 남긴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죽음을 택하며 내단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대법을 치르고 나면 본성을 잃어버릴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칠대악인의 내단에는 그들의 염(念)이 담겨 있습니다. 혼을 태워 버리고도 남을 만큼 강렬한 의념이죠. 칠대악인은 사황의 맹신도로서 절대적으로 충성했습니다. 대법으로 내단이 깨어나면 의념도 깨어날 텐데, 그럼 사황을 찾겠지요. 저를 포함한 칠사는 그들의 염원을 이겨낼 만큼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황이요?”
진우선은 서문영화의 너무나도 상세한 설명에 감탄하다가, 난데없이 언급된 존재에 놀라서 물었다.
“그렇습니다. 물론 지금은 사황의 무학을 이었고, 아예 그를 넘어선 사도련주를 찾아가겠죠. 사실 사도련주는 이미 극사의 경지에 올라서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었는데, 왜 사황도 해내지 못했던 앙천극사대법을 시도했겠습니까?”
“아!”
옆에서 듣고 있던 탁운비도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칠성홍옥대법의 진실에 관해선 처음 듣는 모양이었다.
“앙천극사대법을 이뤘으니 백 년 전의 사황보다 뛰어나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앙천극사대법은 극사의 경지에 오른 극사지체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사황은 극사지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련주 섭무악은 극사지체였더군요.”
한마디로 섭무악은 사도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는 말이었다.
“…….”
장내가 적막에 잠겼다.
[허어-! 극사지체라니. 그래서 사황을 능가할 수 있었구나.]
가만히 듣고 있던 검노야마저 탄식을 흘렸다.
웬만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문 소저가 사도련주를 그렇게 두려워하신 이유를 이제야 완전히 알겠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조금 후련하긴 하네요.”
서문영화가 후련한 표정을 짓더니, 탁운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운비 오라버니. 그러니 이제는 제 말에 따라주세요. 진 대협과 돌아가세요. 그래야 오라버니라도 죽지 않을 수 있어요.”
“영화. 이게 다 진실이야?”
“맞아요. 전부 진실이에요. 당시 사황성의 삼대법왕이 칠대악인을 설득해 후대를 기약했는데, 제고 조부께서 삼대법왕 중 한 명인 월령법왕이셨습니다. 그분이 남기신 기록을 다 보았지요.”
“아!”
탁운비가 비통한 한숨을 흘렸다.
그는 그녀의 말을 하나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문세가의 선조가 언급되는 순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이 찢어질 듯이 아파왔다.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으으으-!”
탁운비가 고통에 신음했다. 하지만 풀어낼 곳이 없었다.
서문영화가 그런 탁운비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미안해요. 하지만 이번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어요.”
그 말과 동시에 서문영화가 역용을 풀었다.
“영화!”
“오라버니. 나를 보세요. 오라버니가 나를 애타게 찾았듯이, 나도 오라버니를 잊을 수 없었어요. 그러니 내 얼굴을 잘 기억해주세요.”
서문영화가 눈부시게 맑은 얼굴로 탁운비를 바라보았다.
괜히 사선녀라 불리는 게 아닌 듯, 기품 있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선한 눈망울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탁운비는 그녀보다 더하여, 아예 울먹이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오라버니와 연주할 때 가장 행복했고, 오라버니는 내가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에요. 내 마음 알죠?”
“영화. 다른 방법은 없어? 고조부께서 막을 방법은 안 남겨두셨어?”
“없어요. 그런 게 있다 한들 사황성을 사랑하셨던 고조부께서 남겨 두셨겠어요? 그리고 아버지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셨어요.”
또르륵.
서문영화는 애써 감정을 누르고 있었으나, 결국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녀가 재빨리 소매로 눈물을 훔치더니,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진 대협. 또 궁금한 거 있으세요? 칠성홍옥대법에 관해선 거의 다 알려드린 거 같은데요.”
“대법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서문 소저는 왜 사공을 익히지 않았습니까? 소저에게서 사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진우선은 서문영화에게서 사기를 느낄 수 없었다. 흑도의 탁한 기운도 아니었다. 사도련에 속해 있으면 사파나 흑도일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서문영화의 기운은 맑은 편에 속했다. 사람 자체가 맑은 느낌이었다.
진우선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진 대협, 그건 아마 아버지 때문인 것 같아요. 아버지는 사파와 흑도가 각자도생하던 시절에, 왜 우리가 오욕칠정에 넘어져서 수많은 분쟁을 일으키는지 고민하셨어요. 가문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성정이 불같이 변하는 것도 의아해하셨죠.”
서문영화의 음성에서 아버지에 대한 깊은 존경의 감정이 묻어나왔다.
“아버지는 사도의 무공과 술법이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고, 도리와 이치를 벗어나게 한다는 걸 깨달으셨어요. 그래서 서문세가가 사도를 벗어나도록 이끄셨죠. 그때부터 비학상단을 시작하셨고, 금세 커졌어요.”
“그랬군요.”
“네, 아버지가 현명하셨죠. 돈이 많아지니 사황성이 무너지고 사도련이 결성되었을 때에도 여전한 영향력이 있었거든요. 다만 고조부의 술법을 깊이 익히지 않아 중용되지 않았을 뿐이죠. 아무튼 서문세가는 사도 무공이나 술법 대신에 비학검문의 무공을 익혔어요. 어머니가 비학검문의 금지옥엽이셨거든요.”
“아! 그래서 탁 형이 서문 소저는 사도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셨군요.”
“그럴지도 모르죠. 이 정도면 답변이 잘 되었나요?”
“네. 잘 이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고 싶습니다. 소저는 만약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나게 된다면 이름을 버리고 살 수 있습니까?”
“만약 살아날 수 있다면…… 가문에 별일이 없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애초에 목숨을 내놓고 가는데 그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우선과의 대화가 끝나자, 서문 영화가 탁운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운비 오라버니.”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는지, 탁운비에게 뭐라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항상 밥 잘 챙겨 먹어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영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서문영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진우선과 탁운비가 곧바로 뒤쫓아 나갔다.
“영화……. 왜 이렇게 서둘러?”
“이별의 순간은 짧을수록 좋은 거예요.”
“아무리 그렇다지만, 나는 별말도 못 했다고.”
“답이 없는데 말해봤자 길어지기만 할 뿐이에요. 그러니 이게 나아요. 오라버니, 잘 돌아가세요. 꼭!”
서문영화가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바로 떠나지는 못하겠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탁운비가 곧장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서문영화가 탁운비의 넓은 품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비 오라버니. 가끔은 나를 기억해줘요.”
그러고는 탁운비를 살짝 밀치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안 돼-!”
그녀가 떠난 허공을 바라보며, 탁운비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진 대협. 나를 데리고 돌아갈 겁니까?”
“탁 형은 돌아갈 마음이 있습니까?”
“나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 대협께 물어본 겁니다.”
“나도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부터 칠성홍옥대법을 막는 게 내 기본 임무이고, 거기에 서문 소저도 구하는 게 특별 임무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