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서문영화 (1)
승의각주 탁신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당주 냉군상이 들어왔다.
“공 각주가 왔다 갔다네. 운비의 일을 묻고 갔어.”
“알고 있습니다. 그가 나서기로 했지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탁신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묻자, 냉군상이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되물었다.
“안 말립니까?”
“나한테 부탁하지 않은 걸 어찌 말리겠나. 제 뜻이 그러한걸.”
“그렇다면 사지로 몰아넣으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탁 공자는 돌아오지 못할 테지요.”
“그럼 제 탓이지.”
“아들에게도 냉정하시군요.”
냉군상이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말했다.
탁신이 아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거 알고 있나? 운비는 아내를 많이 닮았어. 얼굴도, 성격도, 행동도 말이야. 그래서 나는 운비를 볼 때면 아내 생각이 난다네.”
“각주님! 그래도 막으셔야 합니다.”
냉군상은 탁신의 옛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재촉했다.
“아내를 생각할 때면 생전에 따뜻한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미안함이 있다네. 근데 운비를 보면 그게 생각나더군. 그래서 나는 운비를 더 엄하게 대했지.”
“그럼 엄하게 막으십시오!”
“그럴 수 없다네. 이 아비가 아니라, 만상각주에게 가서 부탁할 정도인데 어떻게 막으란 말인가. 단단히 마음먹은 거지. 그러면 물러서지 않을 거라네. 성격도 제 어미를 닮았거든.”
탁신이 체념한 듯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어떤 회한이 묻어나는 것도 같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물었다.
“만상각주는 어떻게 하기로 했는가?”
“칠성홍옥대법을 저지하는 임무는 백무원주가 맡았습니다. 백무원의 무인들을 여럿 데려갈 계획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탁 공자의 일은 진우선이 맡았습니다.”
“진우선? 진우선은 누구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호심당의 진결제자 진우선입니다. 흑괴보다도 강할지 모른다고 알려졌었죠. 근데 최근 두 달 사이에는 사중효 등자경도 쓰러뜨렸다고 하더군요. 기습이라지만 말입니다.”
냉군상의 말을 들은 탁신은 왜 그 이름이 익숙한지 깨달았다. 몇 달 전 천도관에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호오! 기습이면 어떤가. 사중효 정도의 무인이라면 어지간한 기습으로는 쓰러지지도 않을 텐데. 인제 보니 만상각주가 날카로운 칼 하나를 더 챙기고 있었어.”
“그건 그렇습니다.”
“그 칼을 운비에게 붙여주다니. 만상각주가 많이 챙겨줬군.”
“어차피 이능운이 있으니까요. 아쉬운 대로 초무량도 있구요.”
냉군상의 말에 탁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리며 느닷없이 꾸짖었다.
“자네는 왜 그런 인재를 안 데려오나?”
“우리도 있습니다.”
“저쪽은 셋이 되었는데, 우린 아직 둘밖에 없지 않나. 그리고 이능운만 한 고수도 없지.”
“그 정도의 고수를 바라신다면 각주님께서 직접 키우셔야 합니다.”
탁신의 불호령에도 냉군상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제 할 말을 다 내뱉었다.
둘의 대화는 그렇게 탁운비로 시작하여, 신정회로 흘러가고 있었다.
***
“탁운비요.”
“진우선입니다.”
둘은 장사의 포구에서 만났다.
배를 타고 무한으로 간 뒤, 말을 타고 신양으로 갈 계획이었다. 무한에서 신양까지는 한나절 거리였다.
“당신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소. 잘 부탁하오. 앞으로 나는 당신을 진 대협이라 부르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당신을 탁 공자라고 부르겠습니다.”
“탁 공자 말고, 탁 형은 어떻소? 나는 진 대협과 가까워지고 싶소.”
“그러지요. 탁 형.”
탁운비가 능청스럽게 말을 걸어온 덕분에 진우선은 그가 순식간에 편해졌다.
둘은 바로 배에 올라타서 선실에 짐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갑판에서 강바람을 맞았다.
“진 대협. 악인이 아니면 도와줄 거라고 들었소. 미리 고맙소.”
“악인은 돕지 않으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렸을 때 녹림에 마을이 불탄 이후,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진 대협의 뜻을 존중하오. 그리고 만나보면 알겠지만, 영화는 사람이 차분하고 음악을 벗 삼아 자연을 즐기며 주변 사람을 아낄 줄 안다오.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지.”
“그렇습니까?”
“그렇소. 꽃에 물을 줄 때면 웃고 있고, 낮잠을 잘 때면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소. 길거리의 아이를 볼 때면 환히 미소 짓는다오. 만나게 되면 진 대협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요.”
“잘 알겠습니다.”
탁운비의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공야청에게 이야기를 건네 들을 때에는 그런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랑이 있구나 싶었을 뿐이었다. 사연을 이해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탁운비는 무언가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어깨가 넓고 체격이 탄탄하며 눈이 부리부리하니 무게감이 절로 느껴지는 외모임에도, 사람이 가벼워 보였다.
‘걱정 때문일까?’
하지만 단순히 걱정이라고만 하기에는 열정이 넘쳐 보였다. 의욕이 대단하고, 상대에 대한 자랑도 잔뜩 늘어놓았다.
또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는 아무런 상관도 안 하는 듯했다. 그의 온 신경은 이곳에 없는 상대방에게 쏠려 있었다.
‘이게 사랑인가.’
탁운비는 서문영화의 사소한 것들까지도 기억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그는 확실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탁 형, 꽤 서두르시는 거 같네요.”
탁운비는 마치 진우선에게 무엇이든지 증명하려는 듯, 잔뜩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조급함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그게…… 신양에 가서 그녀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오. 그녀는 나더러 자신을 잊어달라고 말하며 떠났소. 그래서 그녀는 우리가 가는 걸 모를 거요.”
탁운비가 눈을 찡그렸다. 강바람이 불어와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목소리도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진우선은 의문이 들어 물었다.
“그럼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하지만 신양인 건 확실하오. 그리고 생각해둔 방법이 있고, 그곳에 머물 장소도 이미 다 잡아두었소.”
탁운비는 만반의 준비를 다 해둔 상태였다.
서문영화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것만 빼고는.
“탁 형, 애가 많이 탔나 보네요.”
“허허. 맞소.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가니, 나는 더 잊지 못했소. 오히려 더 미치겠더군.”
탁운비가 애써 목소리를 누르며 눈을 부릅뜨는 게 느껴졌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탁 형. 딱히 볼 것도 없는데, 그만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긴. 그게 좋겠소.”
둘은 함께 선실로 내려왔다.
탁운비는 선실로 들어오자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진우선에게 물었다.
“진 대협, 혹시 역용술 익혔소?”
“역용술요? 그런 건 익힌 적이 없습니다.”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챙겨온 게 있소.”
탁운비가 자신의 짐을 뒤지더니 비급 하나를 내밀었다.
“일원삼면기공(一元三面氣功)이오. 세 가지 얼굴뿐이긴 하지만, 흔한 역용술과 달리 내공을 써서 변화시킬 수 있어서 면구보다 자연스럽지. 진 대협은 뛰어난 고수이니 금방 익힐 수 있을 거요.”
진우선은 떨떠름하여 받지 않았다.
탁운비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그의 마음이 다급한 것까지는 어찌어찌 이해했으나, 이런 행동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사도련 몰래 잠입하려면 필요할 것이오.”
탁운비가 진우선에게 비급을 쥐여주려고 했다.
진우선이 고개를 저었다.
“탁 형, 진정하시오.”
“진 대협, 나는 지금 흥분하지 않았소. 진심이라오. 내 마음이 절박해서 그렇소. 공 각주님이 만에 하나도 될까 말까 하다고 하셨소. 나는 그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싶은 거요. 그리고 만에 둘이 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상관없소!”
만에 하나의 확률이면 매우 희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만에 둘이라고 다를까.
하지만 탁운비는 그걸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행하고 있었다.
진우선은 여전히 탁운비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어떤 마음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일원삼면기공의 비급을 붙잡으며 물었다.
“탁 형은 익혔습니까?”
“당연히 나도 익혔소. 애초에 내가 익히려고 어렵게 구한 거요.”
“언제 익혔습니까?”
“그녀를 만나기 시작하고서 익혔소. 사도련에 종종 들어가야 하니까 말이오. 얼굴이 들켜서 아버지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소?”
탁운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좀 전까진 심각했다가 갑자기 웃고 있었다.
설마 서문영화와 관계된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는 거라면, 된통 미쳤구나 싶었다.
하지만 진우선의 이런 생각을 알 리 없는 탁운비는 민망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사실은 아버지께 그녀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없소. 그러니 들키지 않아야 했다오. 물론 이제 와 생각해보면 다 알고 계셨을 거 같지만.”
“탁 형이 이 정도였다면, 다 알고 계셨을 겁니다.”
진우선이 탁운비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배는 빠르게 무한으로 나아갔다.
진우선은 배에서 일원삼면기공을 익혔다.
***
진우선과 탁운비가 어느새 신양현에 도착했다.
“진 대협, 여기요.”
탁운비는 곧장 사하객잔으로 진우선을 안내했다.
사하객잔은 신양현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별채도 따로 있어 번잡하지 않은 게 장점이었다.
탁운비는 당연히 별채를 잡아두었다.
진우선과 탁운비는 각기 다른 방에 짐을 풀었다.
“진 대협. 편히 쉬시오. 아직 대법이 펼쳐지려면 스무 날은 남아 있소.”
“그분이 다 알려주셨군요.”
“다는 아니오. 장소는 잘 모르오. 오면서 본 산속 어딘가라고만 들었소.”
신양현 남쪽에는 대별산맥이 있었다. 그 어디가 대법의 장소인 모양이었다.
진우선은 그의 계획을 물었다.
“탁 형. 이제 알려주십시오. 어떻게 그분을 찾을 생각입니까?”
“나는 밤마다 이 옥소를 불 거요. 그럼 그녀가 듣고 올 거라 믿소.”
탁운비가 소매에서 옥소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네?”
진우선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을 부릅뜬 채 탁운비만 쳐다보았다.
하지만 탁운비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분명 올 거요.”
“탁 형,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양에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진우선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에 탁운비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진 대협. 사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소. 하지만 반드시 그녀는 올 거요. 그런 믿음이 있소. 그녀가 나를 잊지 않은 한 말이오.”
탁운비의 말에 진우선은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거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그때, 별채 마당에 홀로 선 탁운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추억을 떠올리는지 눈빛이 참으로 아련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 정인(情人)을 만나길 가장 바라는 건 탁 형일 텐데…….’
그의 눈동자에 어린 그리움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
휘이이- 휘리리- 휠릴리이이리이이-
맑은 옥소 소리가 왠지 구슬펐다. 애간장을 끊을 듯이 힘겹게 이어지는 듯했다.
탁운비는 밤마다 옥소를 불었다.
하지만 서문영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이쯤이면 다른 방법을 찾을 만하건만, 탁운비는 옥소만 불었다.
그리고 엿새째 되는 날.
휘이이-
옥소 소리를 타고 한 여인이 별채 마당에 사뿐히 내려섰다.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