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칠성홍옥 (4)
별채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공야청은 말이 없었고, 탁운비는 그런 공야청이 어떤 말이라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공야청의 입이 열렸다.
“탁 공자의 마음은 잘 알겠소. 하지만 공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제 아버지가 신정회에 계시니, 각주님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제 말은 모든 게 진실입니다. 증명을 해 보이겠습니다.”
탁운비는 미리 이런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옥소(玉簫)였다.
“그녀가 제게 준 옥소입니다. 옥소에 서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확인해보십시오.”
탁운비가 공야청에게 옥소를 건넸다.
한데 탁운비의 행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뒤편에서 커다란 목함 하나를 가져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서신이 가득했다.
“이건 그동안 주고받았던 서신들입니다. 쉽게 믿지 않으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탁 공자, 진심이셨구려.”
“그렇습니다.”
공야청이 옥소에 쓰인 두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목함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서신 중 서너 장을 집어 들어 확인해보았다.
두 사람의 연서가 맞았다.
“그럼 탁 공자도 준 게 있소?”
“저는 칠현금을 주었습니다. 거기에도 서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정도면 그의 말은 사실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믿어버릴 수도 없었다.
“혹시 탁 각주도 알고 있는 사실이오?”
“저는 들키지 않으려 했지만, 아마도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좋소. 그건 내가 직접 확인해보리다.”
“음…… 네. 알겠습니다.”
탁운비가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사실 아버지 몰래 서문영화를 만났고,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아버지에게 간 게 아니라 만상각주에게 왔다.
그런데 만상각주가 아버지를 만난다고 하니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상황을 입증하려면 그 수밖에 없으리라.
“일단 그 문제는 넘어갑시다.”
“알겠습니다. 그럼 칠성홍옥에 관해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이 급한 탁운비가 대화를 빠르게 이어가고자 말을 쏟아냈다.
“영화는 원래 조용한 성격이라 사도련 내에서 친분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악기 연주를 좋아하여, 제가 남양에 갈 때면 그녀도 남양으로 와서 함께 합주하며 날을 지새우곤 했습니다.”
공야청이 탁운비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영화는 드러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선녀처럼 예쁘다는 소문 때문에 이름이 알려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쯤에 칠사에 뽑혔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선녀라는 별호가 십 년 가까이 된 듯했다.
공야청이 기억하기로 서문영화는 올해 스물이 되었으니, 그녀의 미모는 열 살 무렵에 이미 빛이 났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가야만 한다고 하더군요. 사도련주의 무공이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거절하면 서문세가가 멸문할 거라고 했습니다.”
사도련에는 그걸 가문의 안위와 사도의 번영을 위한 영광으로 여기며 제 한 몸 던지는 사람이 꽤 있었으나, 서문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칠사가 된 것도, 칠성홍옥대법으로 칠대악인의 내단을 물려받는 것도, 영광된 일이 아니라 원치 않는 희생일 뿐이었다.
“그러니 각주님께서 구해주십시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소? 사도련주를 이길 수가 없는데.”
“각주님은 만학수사이시니, 묘책이 있지 않겠습니까?”
“허-!”
공야청이 답답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탁운비의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공야청이 물었다.
“서문영화는 이걸 알고 있소?”
“아니요. 그녀는 모릅니다. 그녀는 이미 떠났고, 저 혼자서 각주님을 찾아왔습니다.”
“허어-!”
공야청이 또 한숨을 쉬었다.
오죽 마음이 급해서 이럴까마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서문영화를 구하는 일도 답이 쉬이 보이지 않거늘, 진정으로 그녀를 구하려면 마음의 짐이 될 수 있는 서문세가의 안위도 챙겨야 했다.
“어렵소. 너무 어렵소. 만에 하나도 될까 말까요.”
“각주님!”
“공자도 분명 우리가 칠성홍옥대법을 어떻게든 저지할 거라 생각해서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오. 하지만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걸 알아내는 것마저도 쉽지 않소.”
“신양입니다, 신양!”
탁운비는 공야청이 묻자마자 아는 바를 대답했다. 그만큼 서문영화를 구하기 위해 마음이 달아올라 있었다.
공야청은 그런 탁운비를 보다가, 문득 서문영화에 대해서도 깨달았다.
‘그녀도 탁 공자를 열렬하게 사랑했구나!’
탁운비만 열정적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서문영화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도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알려주었지 않은가.
심지어 칠성홍옥대법까지도 말이다.
이 정도라면 서문영화의 마음이 지금 탁운비의 진심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이 사랑은 정사지간에 피어난 한 송이 뜨거운 꽃이었다.
공야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탁 공자. 하나만 물읍시다. 왜 부친인 탁 각주에게 가지 않고, 나를 찾았소?”
“아버지는 그녀를 구해주실 분이 아니니까요.”
“그럼 나는 구해줄 사람이오?”
“아버지는 공 각주님을 종종 인의(仁義)를 아는 현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맹주님의 의협심에 감화되어 정무맹을 잘 이끈다고 하셨지요.”
공야청은 자신에 대한 탁신의 평가를 지금 처음 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탁운비가 자신을 찾아온 게 이해되었다.
그러다 문득 냉군상에 대한 평가가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냉군상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시었소?”
“아! 냉 당주님은…… 철혈의 책략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강호에는 나보다 철혈의 냉 당주가 필요하다고 보신 모양이구려.”
그에 탁운비가 손사래를 쳤다.
“아!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탁 공자의 마음은 잘 알고 있소. 나는 다만 탁 각주의 생각이 궁금했을 뿐이오.”
또한, 탁운비의 부탁도 들어줄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이 나 있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만상각주로서 거절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해야 한다면, 차라리 이번 일로 탁 각주에게 빚을 지워야겠군.’
공야청은 탁신을 만나서 할 말들을 잠시 떠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탁운비를 보았다.
“허허.”
공야청이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지금 당장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칠성홍옥대법을 막아내는 동시에 서문영화를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서문세가도 살려야 하는데.’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묘책이 쉬이 떠오를 것 같지 않았다.
또한 묘책이 떠오른다고 완벽히 해낼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대체 이 일을 누가…….’
그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공야청의 뇌리에 떠올랐다.
***
만상각 삼 층으로 올라온 진우선이 각주의 집무실에 기별한 후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왔구만. 이쪽으로 앉게.”
공야청이 진우선을 탁자로 안내했다.
탁자에는 백무원주 이능운이 이미 앉아 있었다.
“자네도 차 한잔하지.”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차를 받았다.
이능운이 가볍게 말을 건넸다.
“우선아. 천천히 마셔.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으니까.”
공야청이 이능운을 보며 농담 반 진담 반의 어조로 말했다.
“능운, 미리 엄포 놓지 말게.”
“알겠습니다.”
이능운이 생글 웃었다. 어차피 진우선에게 말을 건넨 목적은 이룬 까닭이었다.
공야청이 진우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나는 자네가 사중효 등자경을 일격에 쓰러뜨릴 줄을 몰랐네. 사중효라면 사도련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인데 말이야.”
“그땐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다시 하라면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진우선이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공야청은 다시 해도 똑같은 결과가 벌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선의 말은 그저 겸양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공야청이 슬슬 본론을 꺼냈다.
“이렇게 자네를 부른 건, 다름 아닌 임무 때문이라네. 이번 임무는 자네의 이해를 먼저 구해야 하거든.”
“어떤 임무이기에 그렇습니까?”
“일단 정무맹은 사도련의 칠성홍옥대법을 어떻게든 막아낼 생각이네.”
“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일이 하나 더해졌네. 자네가 숭의각주 탁신 대협을 아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그에게 탁운비라는 아들이 있는데, 그가 부탁을 해왔지. 무원주는 그걸 듣더니 자네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
공야청은 이미 이능운과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부탁이요?”
“그렇다네. 일단 우리의 임무는 아까 말했던 칠성홍옥대법을 저지하는 것이지.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공야청이 한 번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탁운비는 칠사의 한 명인 사선녀와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며, 그녀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선녀를 말입니까?”
진우선이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대화가 너무나 느닷없었다.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하겠군.”
공야청이 탁운비와 나눴던 이야기를 진우선에게 전했다. 진우선에게 부탁해야 하니만큼 진실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래서 부탁이라 말씀하신 거군요.”
“그렇지.”
공야청이 짧게 대답한 뒤, 진우선의 말을 기다렸다.
진우선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꺼냈다.
“만약 해내려고 한다면, 그녀가 죽은 것처럼 위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게 아니고서는 사도련주를 죽이는 방법밖에 없으니.”
사도련주가 서문세가의 멸문을 언급했으니, 아무런 탈도 생기지 않으려면 흔적이 없어야 했다.
결국,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서문영화의 죽음을 위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말인가?”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일단 직접 가서 봐야겠지만, 사선녀가 악인이 아니라면 돕겠습니다.”
“아!”
공야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이 결심하는 기준을 조금 알게 된 느낌이었다.
이능운도 공야청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알겠네. 그 정도는 탁 공자도 이해할 거네. 워낙 조용히 지냈었다고 자신하기도 했고.”
“제 뜻을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이건 부탁이니, 자네에게 결정권이 있는 게 맞지.”
공야청은 권한을 남용하지 않았다. 묻고 가야 하는 것들은 정확히 정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사도련주가 그 자리에 나타날지 아닐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칠성홍옥대법이 중대한 만큼, 그 자리에 나타날 가능성이 클 거야.”
“음…… 사도련주가 나타나 상황이 꼬이면 구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알고 있네. 그건 내가 최대한 수를 마련하지. 하지만 가능하다면 대법을 치르기 전에 해결하고 싶군. 우선이 자네도 대법이 이루어지기 전에 해결할 수 있는지 살펴 봐주게.”
공야청이 솔직하게 말했다.
사도련주가 나타나면 어찌 될지는 자신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혹시 그녀를 구하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도와줄 사람도 있을까요?”
“일단 임무를 함께하는 사람은 없다네. 혜원주, 무원주와도 이야기를 해봤는데, 결론은 탁 공자와 자네 둘이서 가는 게 낫겠다고 의견이 모였다네. 극비로 해야 하는 일인 만큼 인원이 많으면 아무래도 들키기 쉬울 테니까.”
만상각의 중심이 되는 세 사람이 회의한 결과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능운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도울 사람이 없는 건 아니야. 대법을 저지하는 임무의 지휘를 내가 맡기로 했다. 나도 신양에 가 있겠지. 그러니 네 지원은 내가 맡는다. 필요한 게 있다면 나한테 요청하면 된다. 퇴로도 살펴봐주마.”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든 그림이 이해되었다.
칠성홍옥대법을 막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만상각에서는 무원주 이능운이 직접 나섰다. 그래서 진우선에게는 구출하는 임무가 주어진 모양이었다.
공야청이 한마디 덧붙였다.
“나 역시 그때는 근방에 있을 것이네.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하니 말일세. 그러니 가까운 곳에서 자네에게도 계책을 전하겠네. 또한, 지금 남양지부로 상비 전력이 많이 가 있다네. 표식을 남기면 그들이 지원을 나갈 거야.”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믿음직하게 대답했다.
그에 공야청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 고민이 많았네. 만상각에 들어온 지 이제 두 달쯤 되어가는 자네에게 너무 막중한 임무를 맡기는 것 같았어. 자네는 아직 다양한 경험을 쌓는 중이지 않은가.”
공야청의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사도련에 깊숙하게 들어가서도 누가 살아나올 수 있을지 생각해보니, 자네밖에 없었네. 혜원주와 무원주도 자네를 추천했지.”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만상각의 중추인 세 사람이 진우선을 뽑은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번 임무를 맡아줘서 고맙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네가 더 중요해.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거든 탁 공자와 함께 돌아오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거든 자네 혼자라도 돌아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