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칠성홍옥 (2)
개봉.
아주 넓은 장원이 있었다.
담벼락이 매우 높고 두꺼워 흡사 성곽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장원 한복판에 십층 전각이 우뚝 서 있었다.
전각의 십 층에선 개봉이 한눈에 들어왔고, 누렇게 흐르는 황하강도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있는 두 사람은 풍광을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그 아이들이라면 아직 철이 없으니 큰코다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네가 당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대형,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다. 이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니까.”
대형이라 불린 독수리눈의 사내, 악중뇌 사마광후는 등자경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그런 놈이 있다는 걸 미리 알게 되어 다행이지. 대법을 훼방하려 들었으면 꽤 골치 아팠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파사불주를 빼앗겼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 파사불주가 귀하긴 하지만, 대체할 게 없는 건 아니니까. 이미 생각해둔 게 있으니 너는 신경 쓸 거 없다.”
사마광후는 계획이 다 있었다.
또한 대법이 치러질 날까지는 아직 한 달가량의 여유가 있었다. 그때까지 새로운 기물을 구하면 된다. 이 일은 그저 작은 소란에 불과했다.
그는 오히려 등자경을 단숨에 쓰러뜨린 고수에게 관심이 갔다.
“그보다 너를 쓰러뜨린 건 어떤 놈이었지? 젊은 협객이라고만 보고가 올라오더군. 누군지가 궁금한데 말이야.”
“대형,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검법이나 보신경에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내공에서도 현기가 가득 묻어나더군요. 그리고…….”
등자경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벽사의 기운이 묻어났습니다. 제 내공이 몇 차례 끊어지고 진탕됐습니다.”
“네가 단숨에 내상을 입은 게 그래서였군.”
사마광후는 그제야 큰 의문 하나가 해결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파사불주를 썼더냐?”
“아닙니다.”
“그럼 벽사의 내공을 익혔거나, 벽사의 신검을 사용했겠군. 널 내상 입힐 정도면 그 정도쯤은 되어야겠지.”
“가벼운 내상이었습니다!”
“어쨌든.”
파사불주의 능력을 잠시라도 빌려서 썼다면, 도가의 내공을 타고 벽사의 효과가 났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뛰어난 벽사의 내력을 익혔다는 말이 되었다.
적어도 검 정도의 크기에는 깃들어 있어야 했다. 벽사의 기운이 작은 기물에 담겨 있었다면, 그 힘이 미약하니 등자경이 상대하지 못했을 리 없는 까닭이었다.
“신경 쓰이는 놈이 나타났어. 정도맹주는 제자를 들이지 않았는데, 누가 그런 고수를 키워낸 것일까.”
“저도 궁금합니다.”
“낭중지추라, 그 정도 실력이면 곧 이름이 드러날 거다.”
이름을 안다면 신원을 특정할 수 있어 행적을 파악하기 쉬울 텐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강호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면 피해갈 수 있으련만…… 그게 아쉽구나.”
한숨을 삼킨 사마광후가 품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얼른 회복하고 여기를 다녀오거라. 그걸 가져오면 대법을 치르는 건 문제없다.”
“알겠습니다, 대형!”
등자경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대법이 이루어지면, 칠사로 뽑힌 아이들이 쓸 만해지겠지. 그들은 련주님이 만드실 천하의 반석이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사마광후의 말에 등자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대법이 잘 이루어진다면, 절대고수의 숫자가 부족한 사도련에 큰 힘이 될 터였다.
“련주님께서는 어떠십니까?”
“내가 련주님을 모신 이후로 그렇게 크게 웃으시는 건 처음 봤다. 기대해라. 사도의 천하가 열릴 테니까. 련주님께서 열어주실 것이다.”
“아!”
등자경이 탄성을 터뜨리는 사이, 사마광후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태양의 뜨거운 빛이 개봉을 넘어 천하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련주님의 광명이 천하를 비추는 것 같군!’
사마광후는 한동안 계속 창밖을 보았다.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
그 시각.
정무맹에 복귀한 진우선과 목단화는 곧장 만상각으로 향했다.
공야청과 금청청이 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네가 탈취한 염주부터 볼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혁련패와 막소소에게서 탈취한 비단 주머니를 바로 열었다.
상서로운 기운을 흘리는 염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파사불주(破邪佛珠)가 맞았군.”
“염주의 이름이 파사불주였군요.”
“그렇다네. 보타암의 신물이지. 자네들의 보고서를 받고 조사해보니, 등자경의 행적이 보타산에 이어져 있었네.”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리며 파사불주를 다시 살폈다.
파사불주에는 손때가 많이 묻어 있었는데, 인제 보니 보타암의 법력 높은 스님이 오랫동안 착용하여 신물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걸 되찾고자 검각(劍閣)에서 사람이 나왔다네.”
“검각에서요?”
공야청의 말에 진우선이 의문을 던졌다.
보타암의 신물인데, 왜 검각에서 사람이 나온단 말인가.
그때 진우선이 무엇을 모르는지 파악한 금청청이 설명을 덧붙였다.
“우선아. 검각은 보타암을 지키는 곳이야.”
등자경이 다녀온 남해 보타산은 관세음보살의 연이 닿은 곳으로, 보타암과 검각이 있었다.
보타암은 불도를 닦는 비구니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검각 역시 여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검을 통해 수행하면서 보타암을 지키는 역할도 맡았다.
그렇기에 파사불주를 되찾으러 강호에 나온 사람은 당연히 검각 출신이었다.
목단화도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검후(劍后)가 내려왔군요.”
“그렇다네.”
공야청이 목단화의 말을 확인시켜 주었다.
검각 역시 보타암처럼 수행을 통해 열반에 드는 걸 목표로 하기에 천하의 정세에는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강호에 나가야 할 일이 생긴다면, 자신들의 원칙에 따라 오직 한 여인을 내려 보냈다.
강호인들은 그녀를 검후라 불렀다. 막강한 검공을 펼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파사불주를 우리가 돌려줘도 되겠나? 지금 사도련의 대법에 맞서 한 사람의 고수라도 더 손을 빌리고 싶다네.”
공야청은 파사불주를 돌려주면서 검후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고맙네.”
진우선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이걸 빼앗은 게 대법을 무산시키지는 못한 모양이군요.”
대법에 맞서야 한다는 말의 속뜻을 진우선이 알아챈 것이다.
“그렇다네. 자네로서는 아쉬울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고 있어.”
“왜 그렇습니까?”
“특별히 파사불주가 필요한 거라면 모르겠지만, 보통 대법을 펼칠 때는 그 기운만이 필요하지. 즉, 대체할 수 있다는 말이네.”
공야청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마 이 일을 꾸민 건 악중뇌 사마광후일 거라네. 그는 사도련주의 심복으로, 사도련의 머리이며 술법의 대가지. 사실 파사의 기물이 강호에 희귀하기는 하다지만 더 없는 게 아니니, 그라면 대책을 세웠을 게 틀림없을 거네. 그렇기에 우리가 대법을 막았다고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하는 것이고.”
“아…….”
진우선의 한숨에서 아쉬움이 가득 느껴졌다.
그 마음을 이해한 공야청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는 말게. 사도련의 대법을 지연시킨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주 고마워하고 있네. 자네가 기지를 발휘해준 덕분에 우리에게 시간이 생겼어.”
진우선이 한 일이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
그날 밤.
숨 가쁘게 일과를 마친 사예설이 소호정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백혜원의 선배들은 장사에 집이 있거나 가족이 있어서 돌아간지라, 밤의 소호정은 오롯이 그녀의 차지였다.
그녀는 이 시간에 혼자서 차를 마시는 게 참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즐거움이 오래 가지 않았다. 손님이 찾아온 까닭이었다.
“사 소저. 오늘도 여기 있군요.”
“진 공자. 반가워요. 오랜만이네요.”
손님은 진우선이었다.
사예설이 밝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오늘 돌아오셨다고 들었어요. 이번에도 공을 많이 세우셨더라고요. 다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어요.”
“감사합니다.”
사예설은 진우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잔뜩 있었다.
어디 그녀뿐일까. 백혜원의 사람들이라면 저마다 해소하고 싶은 의문이 한가득일 터였다.
그런데 눈앞에 당사자가 나타났으니 사예설은 절로 말이 많아졌다.
“근데 어떻게 그럴 생각을 다 했어요? 광검 좌무경을 쓰러뜨린 것도 그렇고, 혁련패와 막소소에게서 파사불주를 뺏을 땐 심지어 사중효 등자경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껴서 그랬습니다. 저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너무 싫거든요.”
“이것저것 생각한 건 없었어요? 특히 등자경 같은 고수는 기세도 남달랐을 텐데, 걱정이나 고민 같은 건 안 했나요?”
진우선이 잠시 사예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사 소저는 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군요.”
“아! 너무 급하게 물었네요. 미안해요. 아직 잘 쉬지도 못했을 텐데.”
“괜찮습니다. 그리고 파사불주를 챙긴 건 대법을 막아야 한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등자경이 고수라고 느껴졌지만, 그를 상대하는 것이 어렵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대법을 막을 방법으로 어떤 게 좋을지만 고민했던 거 같네요.”
“아, 그랬군요!”
진우선의 설명에 사예설이 탄성을 흘렸다.
그는 등자경과의 일전을 무인 간의 실력대결로 여긴 게 아니었다. 대법을 막아야 한다는 의협심에서 행동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쉽게 됐네요.”
“그건 어쩔 수 없죠.”
이번에는 진우선이 물었다.
“사 소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해보세요.”
“혹시 칠 년 전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제 고향이 안휘성 금채현인데, 그때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큰 사건이요? 정확히 어떤 사건이었나요? 무언가 중요한 사정이 더 있다면 장서고에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어요.”
사예설이 진우선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가 찾아온 목적이 이것인 듯싶었다.
그에 진우선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전했다.
열 살 무렵에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했고, 도적 떼가 방화를 저질렀다고.
사예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슬퍼졌다.
“그럼 그 후로는 혼자 살아온 건가요?”
“뭐, 그렇죠. 그래도 좋은 인연이 많아서 괜찮았습니다.”
진우선에게서 더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보였다.
“다행이네요. 알겠어요.”
사예설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진우선의 부탁에 대해 정리했다.
“그러니까 원흉은 녹림으로 예상되고, 안휘성 금채현 남촌이며, 몰살 후 마을을 불태웠다는 거죠?”
“맞습니다.”
“알겠어요. 한 번 찾아볼게요. 녹림이라면 무언가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도 사도련은 골칫덩어리였거든요.”
“사 소저. 고맙습니다.”
사예설의 긍정적인 답변에 진우선이 감사를 전했다.
하지만 사예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그러지 말고, 내가 무언가 찾아오면 그때 고맙다고 말해줘요. 지금 그걸 받으면 나중에 들을 인사가 작아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