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사도련의 은밀한 계획 (1)
“아까 슬쩍 들어보니, 합비에서 광검을 벤 흉수가 차가운 인상의 사내 한 명이라고 알려져 있더라.”
“그래요?”
“그렇더라. 근데 너는 차가워 보이지 않으니까 괜찮았나봐. 우리가 두 명이기도 하고.”
진우선과 목단화는 각자 정탐을 마친 뒤, 회남 한복판에 있는 전가객잔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회하강을 따라 상행하러 다니는 상인이 객잔에 많아 다소 시끄러웠는데, 그 소음이 둘의 조용한 대화를 가려주고 있었다.
“저는 사도련의 장원을 보고 왔습니다. 사사천 회남지부라고 하더군요. 원래는 회남에서 제일가던 안성장이었는데, 뺏었다고 합니다.”
“거기를 거점으로 삼을 셈이로군.”
사사천은 사도련 오대사파 중 하나로, 다섯 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컸다. 그들이 회남현을 맡기로 한 모양이었다.
“련주가 회남을 지나가면서 그곳은 찍은 모양이네.”
“그런가 봐요. 그리고 상단은 다 놔뒀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래야 돈이 많이 돌 테니.”
진우선의 말에 목단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단화 그녀가 겪은 사도련은 이해타산적이어서, 돈이 되는 일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들며 서로 간에도 양보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거기 열렸어?”
“네. 열렸습니다.”
“그래서였군.”
목단화가 자신의 추측에 대해 확신하는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일모레 개봉에서 중요한 사람이 온다고 하더라. 아마도 사사천의 인물이겠지.”
“아!”
사사천 회남지부가 빠르게 문을 열게 되니, 누군가 와서 확인하고 살펴볼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칠사라 부르며 존대하더라.”
“칠사요?”
“어. 나도 처음 들었어.”
“저도 금시초문입니다. 근데 정말 중요한 사람인가 보네요. 그렇게 부를 정도면 말이죠.”
“그렇겠지. 아무튼, 이것도 알아봐야 할 거 같아.”
목단화의 말에 진우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진우선이 목단화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선배님은 고작 한두 시진 만에도 상당한 정보를 파악하신 거 같아요. 덕분에 머릿속에 저들의 움직임이 체계적으로 그려집니다.”
“별거 아니야. 지금 회남에 들어 온 사파와 흑도들은 속으로 기뻐하고 있거든. 그럴 때 근처에 가면 이것저것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 기쁠 땐 조심을 별로 안 하니까, 저도 모르게 이것저것 말하는 거지. 이건 뭐 아주 간단한 이치야.”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단화는 간단하다고 말했으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사람을 여러모로 관찰해야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사실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녀의 설명은 무수한 경험이 없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는 확실히 소문을 듣고, 중요한 점을 모으는 일에 뛰어난 듯했다.
진우선이 이번에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배님, 혹시 도적떼가 어떤 마을을 불태워 버리거나 몰살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으십니까?”
“녹림 무리가 그렇게 하는지 묻는 거지?”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은 종종 그렇게 행동해. 그게 보통 그들의 습성이니까. 수틀리면 몰살시키고, 마을을 태워버리지. 모든 게 불타버리면 흉수로 추측을 할 수는 있지만 증거가 존재하지 않으니 잡아들일 수가 없거든.”
“그렇군요.”
진우선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사실 어릴 때 금채현의 남촌에 살았었는데, 도적떼에 의해 부모님과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마을도 다 불타버렸고요.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아!”
목단화는 진우선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던 이유를 깨달았다.
진우선은 부지불식간에 금채현을 대답하면서 원치 않게 그때의 기억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도적떼일 수도 있겠지만, 녹림일 가능성이 더 클 거 같아. 혹시 그들이 그랬을 이유가 될 만한 게 있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녹림 같은 흑도 무리는 특별한 이유 없이 그러기도 해. 하지만 살인한 후에 마을 전체를 불질렀다면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네.”
목단화가 조심스레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하던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백혜원에 한 번 물어보는 건 어때? 어쩌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 그래야겠습니다. 돌아가면 한 번 물어봐야겠어요.”
진우선은 뜻하지 않게 마음속에 응어리진 기억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얻었다.
그때, 목단화가 음식들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근데 이야기하다 보니 음식이 다 식었네. 너도 밥은 다 먹은 거 같은데, 술이나 한 잔 할래?”
“괜찮습니다. 술은 안 마셔봤어요.”
“허! 이 좋은 걸 안 마셔봤어? 여태껏 인생의 낙을 하나 몰랐었구나.”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목단화도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임무 중인 까닭이었다.
***
이틀 후.
회남현의 포구에 배 한 척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귀티가 흐르는 일남일녀가 땅으로 내려오고, 뒤이어 일단의 무리가 하선했다.
“공자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다 준비되어 있으니, 이쪽으로 오시지요.”
“황 장로, 수고했네.”
사사천의 공자 혁련패가 내리자 회남지부의 관리를 맡은 장로 황일사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넸다.
혁련패가 황일사에게 곁에 있는 여인을 소개했다.
“이분은 흑요궁의 소궁주이시니 부족함 없이 모시도록.”
“알겠습니다.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나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우리 식구들도 많이 있으니까.”
흑요궁의 소궁주 막소소가 그들의 호의를 거절했다.
회남현에는 흑요궁 소속인 흑림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막소소는 그들과 함께 지낼 계획이었다.
“막 소저. 흑요궁은 이곳에 아직 터를 못 잡은 거 같은데, 우리 회남지부가 편하지 않겠소?”
“당신네 회남지부라서 편하지 않네요.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맙지만, 이후로는 각자 알아서 했으면 좋겠어요.”
막소소가 혁련패의 제안을 계속 거절했다.
그녀의 언행을 보면, 혁련패와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하는 거로 보였다.
“허! 막 소저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이따가 만날 곳을 알려 주시오. 내가 찾아가겠소.”
“하아. 그건 사람을 보내드리죠.”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막소소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녀의 가냘프면서도 교태로운 얼굴에 짜증과 불만이 어려 있었다.
“그럼 내일 봐요. 이만.”
“살펴 가시오, 막 소저.”
혁련패가 언짢은 기분을 애써 참으며 막소소를 보냈다.
그러고는 황일사를 따라 사사천 회남지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황 장로. 술부터 가져와.”
“공자님!”
“제가 년이 소궁주면 다야? 아주 매번 나를 눈 밑으로 내려다보는데, 더럽게 재수 없군.”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혁련패가 허공에 대고 화풀이하니, 황일사가 자신이 할 일을 바로 찾았다.
사실 원래부터 혁련패가 막소소를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관계였다. 하지만 막소소는 혁련패를 좋아하지 않아서 늘 이런 식으로 쌀쌀맞게 대했다.
황일사는 어쩌면 그게 신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사도련 오대사파의 핵심인물이지만, 각자의 위치가 다른 까닭이었다.
막소소는 이미 흑요궁의 유일한 소궁주였다. 반면에 혁련패는 사사천주의 여러 손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물론 손자들 가운데서는 혁련패가 가장 강했지만 말이다.
“근데 좌 숙부는 어쩌다 그렇게 됐지? 아버지께서 화를 잔뜩 내셔서 다들 진땀 뺐어.”
좌 숙부란 광검 좌무경이었다.
그는 혁련패의 아버지 혁련대붕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래서 혁련대붕이 노발대발했던 모양이었다.
“련주께서 다녀가신 후 봉문한 곳에 가서, 땅을 팔아서라도 돈을 더 내놓으라고 하며 칼부림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협객을 만나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협객? 좌 숙부를 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약관 정도의 협객이라고 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좌 숙부보다 강하다고? 말도 안 돼. 소문이 잘못 됐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혁련패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약관의 나이라면 자신과 동년배인데, 십대빈객인 광검 좌무경을 능가하는 실력자라니.
그런 사람은 존재할 리 없다. 잘못된 정보일 게 틀림없었다. 적어도 혁련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지지리도 운이 없었군. 은거기인을 만난 모양이니.”
혁련패가 황천길로 떠난 좌무경을 떠올리며 혀끝을 찼다.
“에이! 기분 좋은 소식이 하나도 없어, 하나도! 짜증만 나네.”
“그래도 공자님이 칠사에 뽑히셨지 않습니까? 다른 형제들은 모두 실력 미달로련주님 눈 밖에 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뭐해.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사사천주 자리가 내게 오려나 모르겠어.”
“힘내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사천은 공자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황일사가 열심히 혁련패의 기분을 살피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둘은 그렇게 대화를 하며 사사천 회남지부로 들어갔다.
한편, 이들을 몰래 뒤따르던 진우선과 목단화는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도련은 끈끈하지는 않은 연합이네요.”
“맞아. 그래서 그들에게는 틈이 있어. 원래 중요한 이야기는 듣기 어려운데, 우리에게는 다행인 셈이지. 아무튼, 우리는 내일 그들이 만나는 장소 근처로 숨어들면 될 거야.”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단화의 말이 충분히 이해된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지난번에 파천문의 비밀도 들을 수 있었으리라.
“혁련패가련주가 직접 뽑은 칠사였나 봅니다.”
“그러게. 하긴 그들은 사도련주의 명령만 따르니까. 사도련주만이 그들을 규합할 수 있고, 그들은 련주를 위해서만 모이더군.”
목단화의 말을 들으며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흑요궁의 소궁주도 칠사일 거 같아요.”
“막소소? 아마 그럴 거야. 사도련에서 실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니까.”
진우선은 그들의 기운을 가늠하며 추측했었는데, 실제로도 이름이 알려진 모양이었다.
“아무튼, 내일 중요한 이야기들이 오갈 거 같습니다.”
“그래.”
진우선과 목단화가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며 전가객잔으로 돌아 갔다.
***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까?’
목단화가 다관에 앉아서, 맞은편의 팔상루를 바라보며 진우선을 떠올렸다.
오늘 혁련패와 막소소가 만나는 곳은 팔상루의 최고층인 팔층이었다.
창밖으로는 사방이 뻥 뚫려 있고, 근처에는 어디 숨을 곳도 없었다.
이런 장소라면 그녀의 실력으로는 사도련의 고수들에게 기척을 들키기 십상이었다.
파천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과감하게 시도했다가 죽도록 쫓기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번에는 진우선이 자신만 다녀오겠다고 한 터였다.
‘잘 듣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팔상루의 팔층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예 그곳에서 누가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목단화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보니, 걱정밖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두 사람은 모종의 임무를 받고 온 모양입니다.”
“어?”
진우선이 인기척도 없이 목단화의 옆에 불쑥 나타나서 말했다.
팔공루 주변이나 허공에 무언가 보인 것도 없었는데,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마치 바람 같았다.
“사도련은 무언가 준비 중인 것 같았습니다. 혁련패와 막소소는 내일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을 모양입니다.”
“그래?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갔는데?”
진우선의 말에서 대강의 핵심을 파악한 목단화가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에 진우선이 차분하게 조금 전에 들은 대화를 떠올렸다.
-련주님이 대법을 마치신 후, 가장 먼저 챙기신 게 칠성홍옥이라더군.
-흥! 누구의 공이 가장 클까? 비서(秘書)를 얻고 해석한 건 우리인데.
-내일 도착하시면 내가 챙겨서 가기로 하지.
-그러든지. 대신 잘 챙겨갈 책임도 네게 있는 거야.
-근데 정무맹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가 너무 빈약해. 하오문의 저력이 좀 아쉬운데.
-흥! 그럼 직접 알아보든지.
혁련패와 막소소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말을 놓는 사이였다.
어쨌거나, 진우선이 그들의 대화를 목단화에게 전달했다.
그러고 나서 신중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제 느낌엔 저들이 어떤 대법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