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빙화곡 (4)
한없이 굳건하다!
만년괴암의 신령스러운 금기는 진우선이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도도하게 빙화곡을 흐르고 있었다.
넓고 깊고 길게 펼쳐진 빙화곡을 채우고도 넘쳤다.
그래서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항상 곁에 존재했기에 무의식중에 당연하게 여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집중해보니 달랐다.
이건 특별한 힘이었다.
[위무불굴(威武不屈)이라. 그 무엇에도 굴복하거나 꺾이지 않는구나. 그게 바로 만년을 족히 버텨온 저력이니.]
검노야의 음성이 마음속에 퍼져 나갔다.
그 순간 진우선은 이 상서로운 힘에 어울리는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철벽(鐵壁).’
금기가 여태껏 보여준 굳건한 힘은 바로 불굴의 의지요, 무너지지 않는 불괴의 벽이었다.
[허허. 좋구나, 그 이름.]
검노야는 진우선이 철벽이라 한 기운을 더 설명하려다 말았다. 조금 다를 뿐이지, 틀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만년괴암의 금기가 빙화를 버티게 한 이면에는 이 철벽의 능력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마문광이 이 년 전쯤에 마라혈독을 가져와서 뿌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빙화는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무려 이 년 정도를 빙화는 꿋꿋하게 이 자리에 있었다.
금생수의 이치에 철벽의 능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만년괴암이 지탱하고 철벽의 능력이 도와 버텼다고 하지만, 가장 대단한 건 빙화가 굽히지 않았고 꺾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괜히 영초라 불리는 게 아니었구나.]
‘그렇습니다, 스승님.’
진우선이 빙화의 의지에 몹시 감탄하며, 눈을 감은 채 연결된 기운으로 빙화를 관조했다.
빙화가 파르르 떨고 있다.
금생수의 이치로, 막대한 금기가 진우선이 흘려보낸 수기를 온전히 생하게 하고, 그 수기는 바로 빙기로 화하여 빙화의 영기를 보충한다.
또한, 만년괴암에서 출발한 철벽의 능력이 거대한 기운의 흐름에 실려 있었다.
진우선은 수기를 운용하며 일으킨 항마의 능력을 그 흐름에 더했다.
쿠쿠쿠쿠쿵-!
수많은 도움을 받으며 빙화의 영기가 전력으로 마라혈독을 때렸다.
빙화는 이전처럼 외롭거나 위태롭지 않기에, 자신에게 전해지는 엄청난 기운을 마구 퍼부었다. 스스로 해내는 것이다.
빙화는 왜 자신이 영초인지 보여 주고 있었다.
마라혈독이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빙화의 영기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빙화는 그러나, 쉬지 않고 마라혈독을 밀어내며 깨부쉈다.
콰콰콰콰쾅-!
진우선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니, 천둥소리가 마음속을 가득 흔들었다.
빙화의 영기가 가차 없이 몰아치자, 마라혈독이 마구 터져나갔다. 이 년 간 단단히 자리를 잡았으나, 더는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순백의 빙화가 자신에게 더럽게 드리워진 핏빛을 지워나갔다.
이윽고 모조리 쫓아냈다.
그때, 검노야가 외쳤다.
[우선아. 검을 떠올리거라!]
‘네!’
스앗!
진우선이 검을 떠올려 허공으로 빠져나온 마라혈독의 기운을 바로 베었다.
진우선도 빠져나온 마라혈독의 기운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검노야와 마음이 통한 바였다.
한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이화라면!’
진우선은 문득 떠오른 판단에 재빨리 힘을 쏟았다.
화아악!
그러자 반으로 슥 잘려버린 마라혈독이 허공에서 순식간에 소멸했다.
[허허. 좋구나. 이화로써 정화(淨化)하니,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었구나.]
검노야가 진우선의 번뜩이는 기지에 감탄했다.
이화가 가진 척사항마의 능력은 수기나 목기가 가진 고유능력보다 아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정화의 능력 하나만으로도 이화는 능히 귀하게 쓰일 수 있었다.
[허허. 놀랍구나, 놀라워.]
검노야가 진우선에게 연신 감탄했다.
그때였다.
온전해진 빙화에서 신선한 빙기가 전해져왔다.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잘 이겨냈다!’
진우선이 그리 뜻을 전하며 눈을 떴다.
빙화가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햇살도 눈에 부셨다. 밤이 지났나 보다.
“진 공자!”
그리고 감격하여 외치는 벽소군의 음성도 들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진 공자가 다 한 거죠! 정말 고마워요!”
“진 소협, 수고했네. 고맙네.”
벽소군과 막유수가 뜨거운 감사를 건넸다.
그들의 염원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
별채에 돌아오자마자 깊이 잠들어버렸던 진우선이 눈을 떴다.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며 어제를 떠올렸다.
‘보름이 지났을 줄이야!’
상상치 못한 긴 시간이 흘러가 있었다.
[허허. 세 개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함께 어우러졌는데, 어찌 짧은 시간에 다 이루어지겠느냐? 그 가운데서 모든 과정을 살피느라 정말 수고했구나.]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기운들의 움직임에 집중해 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진우선은 관조의 순간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때는 찰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열닷새나 흘렀다니, 당황스러웠다.
‘그렇다면 벽 소저와 막 장로님도 빙화 앞에서 열닷새를 보낸 것입니까?’
[그렇지. 두 사람이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살피더구나. 가끔 번갈아가며 눈을 붙였지만, 거의 못 잤지. 빙화가 시시각각 변하고, 우선이 네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랬지 않겠느냐?]
‘아!’
벽소군과 막유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없이 기다렸을 터였다.
어제 그들 두 사람, 그리고 빙화곡의 식구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던 게 떠올랐다. 빙화곡의 모두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아마 빙화 곁에 있을 듯 싶었다.
진우선이 방을 나섰다.
그러면서 검노야에게 말했다.
‘스승님. 이미 아시겠지만, 만년 괴암이 저에게도 기운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렇더구나. 철벽의 능력이 네 금기에도 깃들었지. 네 오행진기가 이미 광륜을 이루었으나, 금기가 서로 교류하며 철벽의 능력이 네게로 스며들었어.]
‘맞습니다. 금기가 한없이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철벽이 남았더군요. 만년괴암이 두고 갔습니다.’
[허허. 만년을 버텨온 거암이 아낌없이 주었구나. 우선이 너에게도, 빙화에게도.]
진우선과 검노야가 한령지에 접근하며, 빙화의 뒤편에 천장단애처럼 치솟은 만년괴암을 바라보았다.
진우선의 눈빛이 아련해 보였다.
지난 보름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벽소군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 공자. 잘 잤어요? 푹 쉬었나요?”
“네. 저는 잘 쉬었습니다. 그런데 벽 소저도 보름간 쉬지 못했을 텐데, 잘 쉬셨는지요?”
“덕분에 어제는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어요.”
벽소군이 화사하게 웃으며 답해 왔다.
활짝 웃으니 사방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마음속에도 온기가 충만해진 듯했다.
벽소군의 새하얗고 맑은 얼굴이 햇살을 머금으며 청초하게 빛났다.
‘어찌 사람이 이럴까?’
반할 수밖에 없는 미소였다. 그저 감탄만 나왔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고 있었나?’
고결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안에 진우선의 모습이 이미 새겨져 있었다.
찰나 간에 정적이 흘렀다.
진우선이 얼른 입을 열어 분위기를 깨트렸다.
“음. 벽 소저, 빙화는 어떤가요?”
“빙화는 매우 아름다워요. 살아오면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을 정도예요!”
벽소군이 마구 들떠서 이야기했다.
진우선이 잠깐 두근거렸던 마음을 재빨리 진정시키며 빙화를 살펴보았다.
빙화는 생기를 찾았다. 그냥 찾은 게 아니라, 매우 힘차게 영롱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한 점 티도 없는 순백의 꽃봉오리에서는 신령한 느낌마저 흘렀다.
“벽 소저 말대로네요. 와!”
진우선은 빙화에게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벽소군이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날 오후.
진우선은 만상각에 전할 보고서를 작성한 후 한령지로 올랐다.
벽소군이 빙화 뒤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듯했다. 그렇게 빙공을 연성하는 모양이었다.
‘벽 소저의 빙공이 상당하구나.’
진우선이 벽소군의 빙공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느꼈던 소무강의 빙공과도 느낌은 비슷했으나, 벽소군의 성취가 훨씬 높았다.
막유수가 그런 진우선의 앞을 막아섰다.
“진 대협, 오셨습니까?”
“대협이요?”
“이제 진 대협이라 부를 것입니다. 우리 빙화곡은 진 대협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공에게 대협이라고 부르는 게 마땅하지요.”
“아,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대협이라 불릴 줄은 생각도 못 했고, 막유수에게 존대 받는 것도 어색했다.
막유수는 진우선이 당황한 기색을 보았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진 대협, 무슨 용무로 이곳을 찾으셨습니까?”
“며칠 더 묵었다 가려고 합니다. 빙화곡의 기운으로 수련하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래서 허락을 받고자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진 대협은 신령스러운 기운과 교통하셨었지요. 잘 알겠습니다. 저희는 당연히 괜찮으니 편히 머무르십시오. 곡주님과 식구들에게도 제가 말해두지요.”
극진한 막유수의 태도에 진우선은 쉽게 적응될 것 같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좌측으로 꺾어 들어갔
한령지로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만년괴암은 거대하여 한령지 주변의 어지간한 곳에서도 손을 짚을 수 있었다.
‘여기면 되겠구나.’
진우선은 길가에서 적당히 떨어지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바닥에서 금기가 느껴졌다. 바닥도 만년괴암이었다.
‘철벽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우선이 만년괴암을 바라보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오행진기를 운기하니, 심상 속에서 광륜이 마구 휘돌았다.
화아아-!
광륜의 찬란한 빛이 온몸을 잠식했다.
그중에 금기를 뻗었다.
금기가 만년괴암에 닿자, 소통하기 시작했다.
이어 토기를 뻗어 만년괴암의 금기를 자극했다.
토생금의 이치가 저절로 일어났다.
오행진기 속 토기는 만년괴암의 금기보다 매우매우 작았다.
하지만 광륜은 상생상극의 고리이며, 천지간의 기운과 소통하니. 토기는 다만 크기가 작을 뿐이며 부족할 게 없었다. 지난 세월의 깊이가 다르나 어울리지 못할 것이 없었다.
콰아아아아!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지듯 온몸의 내력이 거친 급류가 되어 흘렀다.
광륜을 이룬 오행진기가 천지간의 기운을 부르고, 만년괴암의 금기가 연결되어 서로 하나로 엉켜 들더니 마구 휘몰아쳤다.
‘아아-!’
온몸에서 희열이 터져 나온다.
진우선은 대자연의 기운이 주는 쾌감에 온몸을 맡겼다.
***
나흘이 지났다.
진우선이 떠나기로 한 전날 밤이었다.
온종일 수련을 마친 벽소군이 시간을 청했다.
“진 공자, 내일 떠나신다고 하여 늦은 시각이지만 모셨어요.”
“괜찮습니다. 벽 소저.”
진우선이 탁자에 앉아 은은한 차 향을 맡으며 대답했다.
벽소군이 작은 목함을 하나 꺼내어 진우선에게로 내밀었다.
“빙화보심단(氷花保心丹)이에요. 각주님께 드리면 될 거예요.”
“아…… 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멀뚱멀뚱한 눈빛으로 목함을 건네받자, 벽소군이 그 이유를 바로 알아챘다.
“이건 모르고 오셨군요.”
“네, 지금 처음 들었습니다.”
“저희의 일이 잘 해결되면 드리기로 약속되어 있었어요. 빙화의 꽃잎이 떨어질 때만 만들 수 있는 신단이에요.”
“아! 그렇다면 귀한 보물이군요. 각주님께 잘 전달해드리는 것까지가 제 역할이겠습니다.”
진우선의 눈빛에 정광이 깃들었다.
벽소군이 그걸 보며 안심했다.
“진 공자에게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은혜는 잊지 못할 거예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잘 해결되어서 다행입니다.”
진우선이 담담히 대답하자, 벽소군은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강조하기 시작했다.
“빙화를 살리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어요. 빙화가 있어야만 빙공을 대성하고, 빚을 갚을 수 있거든요.”
“빚이 있었습니까?”
“십 년 전에 본 곡에 마교도가 쳐들어왔어요. 천마오종 가운데 가장 강하다는 혈련수라종이었는데, 아버지께서 그 종주였던 혈불과 백여 초를 겨루고 패퇴시키셨어요.”
“아-.”
진우선이 장탄식을 흘렸다.
천마교의 악행이 세상 곳곳에 뿌려져 있어 화가 나면서, 동시에 막유수에게 들었던 전대 곡주의 사망이 이와 관련되었음을 직감한 까닭이었다.
“상처가 위중하셨던 아버지는 빙화의 영기로 내상을 다스리셨지만, 결국 돌아가셨어요. 반면에 혈불은 기사회생했다고 하더군요. 너무 화가 났어요. 그때 빙화의 영기가 크게 상했는데, 오라버니는 여기서 기다리다간 복수할 수 없다며 곡을 뛰쳐나갔죠.”
“…….”
담담히 비사를 전하는 벽소군에게 진우선은 위로의 말조차 쉽게 할 수 없었다.
빙화곡이 십 년 전에 세가 기울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벽소군의 오라버니가 뛰쳐나간 이유도.
“그런데 진 공자 덕분에 빙화의 영기가 예전보다 더욱 충만해졌어요. 대성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요!”
벽소군의 말에 힘이 있었다. 그녀에게서 희망과 열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천마교에 복수하고, 가족을 찾으시려는 거군요.”
“맞아요. 그래서 빙화곡은 당분간 수련에 집중하려고 해요. 그 후 강호에 내려가면 진 공자를 찾아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천마교를 상대할 때 제가 도울 게 있다면 돕겠습니다.”
벽소군이 잠시 진우선의 두 눈을 직시했다.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진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