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98화 (98/225)

098.

#능력을 보이다 (3)

“헉! 헉!”

입에서 단내가 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지는 오래였다. 심장은 이미 터질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사흘째 계속 남쪽으로 방향만 잡은 채 도망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했다.

정무맹의 영역이 이리도 멀었을 줄이야.

‘졸리다. 힘들다. 사흘간 한숨도 못 자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멈추면 안 되었다.

멈추면 파천문 파멸대에 붙잡힐 터였다.

파멸대 뒤로도 추적해오는 이들이 많을 테니, 숨을 수도 없었다. 천중산을 잘 모르기도 했다.

잠시 몸 누일 곳을 찾을 틈도 없었다.

아니, 일단 파멸대를 따돌려야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나 혼자선 역부족이야. 어제 표식을 남겨놨는데, 누군가 지원을 올 수 있을까? 와야 하는데…….’

상념이 계속 교차했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럴 터였다.

‘여남지부에서 쉴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잠시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그리로 갔으면 여남에 들어가기도 전에 붙잡혔을 게 틀림없었다.

‘이제는 모르겠어. 버틸 힘도 없고. 오늘을 못 넘길 것 같군.’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못 다할 것 같은 임무도 떠올랐다.

‘아! 그 사실을 반드시 전해야 하는데…….’

바로 그때였다.

쌔액!

비검 하나가 바람을 가르고 허벅지에 꽂혔다.

“큭!”

쿵.

다리가 풀리며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허벅지가 너무 아팠다. 이래서는 경공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첩자가 쓰러졌다!”

파멸대 선두의 누군가가 외쳤다.

그가 비검을 날린 장본인이었다. 아직 두 개나 더 들고 있었다.

‘제길! 저 비검이 나한테 있었으면…….’

던질 힘도 별로 없지만, 아예 비검마저 없으니 더 무력감이 느껴졌다. 사흘간 아끼고 아낀다고 썼지만, 파멸대를 상대하며 다 던져 버린 탓이었다.

비검술과 경공이 가장 자랑이었는데, 지금 그 둘을 하나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이 아팠다. 햇빛이 뾰족하게 눈을 찌르고 있었다. 아직 날씨가 쌀쌀한데, 한낮이라 그런지 햇살이 너무 강렬했다.

‘그래도 햇볕 쬐면서 죽는 건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 순간!

“목단화, 맞습니까?”

누군가 햇살을 등지고 서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림자가 지자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적들의 기세마저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착각 같았지만 좋았다.

“맞는데, 당신은 누구죠?”

“진우선입니다. 백무원에서 왔습니다. 얼마 전에 들어왔어요.”

그가 인장을 꺼내 들어 내공을 불어넣으며 신원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

탄성이 나왔다.

다행이었다.

드디어 지원이 온 것이다.

이 순간만 잘 넘기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예상과 달랐다.

“일단 근방에는 저들뿐인 거 같으니, 얼른 처리하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그게 가능해요?”

“네. 될 거 같아요. 잠시만요.”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막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앳된 목소리인데도 말이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검 한 자루를 들고 파멸대로 달려가는 모습에서 일당백의 기세가 느껴지고 있었다.

‘비검!’

진우선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검을 본 순간, 재빨리 쳐냈다.

그러고는 발을 힘차게 굴렀다.

진우선의 신형이 쏘아졌다.

방향은 비검을 날렸던 선봉의 무사 쪽이었다. 그 속도가 전광석화 같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진우선이 곧장 검을 그어 올렸다.

“컥!”

비검을 던졌던 무사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단 한 수에 상반신이 비스듬히 베어지며 숨을 거두었다.

“헛!”

근처에 있던 무사 하나가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목격한 상황을 믿을 수 없는지 질겁하고 있었다.

휘릭-

진우선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그의 앞에 나타났다.

스걱!

검이 그를 베고 지나갔다.

갈비뼈가 종잇장처럼 썰렸다. 검에 어린 기운이 강력해서 무엇이든 스치면 잘리고 있었다.

“다들 조심해!”

한 사람이 소리치며 수비할 태세를 취했다.

스륵!

검이 그를 베고 지나갔다. 수비하려는 자세가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휙- 휙-

불이 번쩍거리듯 진우선의 신형이 사라졌다 나타날 때마다, 파멸대 무인들이 하나둘씩 픽픽 쓰러져 나갔다.

한 초식도 막아내는 자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뒤에서 전 대원들을 통솔하며 오던 파멸대주 적고성이 아연실색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파멸대의 실력은 그가 잘 알고 있는데, 이렇게 볏단처럼 푹푹 쓰러질 무인들이 아니었다.

파멸대원 스물이면 정무맹의 어느 공격대와 맞부딪쳐도 승산이 칠 할은 되었다.

몇 년간 싸워봤기에 그럼 힘의 저울추를 잘 알고 알았다.

하지만 상대에게 그런 상식은 통용되지 않았다.

그는 무시무시한 고수였다.

“웬 놈이냐-!”

콰앙!

적고성이 고함을 치며 얼른 두 주먹을 뻗었다.

강맹한 기운이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파멸대원 절반을 이미 저승으로 보낸 진우선이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스윽!

적고성이 쏘아낸 기운이 진우선의 검에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묵천신권이 이리 간단히 소멸됐다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적고성이 감히 믿지 못하고 의문을 드러냈다.

방금 펼친 묵천신권은 위력을 배가시키기 위해 칠 할의 내력을 유형화시켜 쏘아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그의 힘을 단숨에 멸했다.

묵천신권은 파천문에서도 내로라 하는 권법으로 패도적인 힘이 그 상징인데, 상대에게는 마치 어린아이 무공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너, 너는 도대체!”

파멸대주 적고성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더듬었다.

그때, 진우선이 입을 열었다.

“방금 보여주신 게 전부는 아니죠?”

진우선이 상대를 자극했다.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목단화를 위해서도 그게 나았다.

“당연하지! 묵천신권이 고작 그 정도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럼 한 번 전력으로 와 보시죠.”

“이익!”

적고성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진우선이 격장지계를 펼치는 것임을 알았지만, 너무도 분하여 화를 달랠 수가 없었다.

적고성의 두 주먹에 전신의 내력이 쏠렸다. 묵천신권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생각하는 까닭이었다.

온몸의 핏줄이 바짝 서고, 얼굴도 시뻘게지더니, 온 힘을 한 방에 쏟아냈다.

콰콰쾅-!

상당히 파괴적인 힘이 거친 파공성을 내며 진우선에게로 쏘아졌다.

그때, 진우선이 광영무의 한 초식을 펼쳐냈다.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빛이 뿌려졌다.

그 빛이 열 가닥의 기운으로 화하더니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솨솨솨솨!

빛줄기 하나가 적고성이 펼친 묵천신권의 내력을 꿰뚫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묵천신권이 와해되었다.

그러고도 빛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곧장 적고성이 심장을 관통했다.

적고성의 눈에 다른 빛줄기들이 보였다.

마치 화살처럼 보이는 그 빛줄기들이 거의 동시에 파멸대원들에게 꽂혔다.

“컥!”

“끅!”

“윽!”

이건 몰살이었다. 파멸대원들이 일거에 모두 숨을 거두고 있었으니까.

적고성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 말도 안 돼…….”

적고성이 힘겹게 중얼거렸다.

가슴이 뻥 뚫려서 피가 줄줄 흘렀다. 이미 핏기가 확 가신 얼굴은 백지장보다 창백했다.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도 적고성은 믿지 못하고 있었다.

진우선이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적고성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적고성이 물었다.

“너는 누구지?”

“진우선.”

“처음 듣는군.”

“그래서 죽기 전에 이름은 알려 드려야 할 거 같았어요.”

“허…….”

적고성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나왔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멎었다.

진우선의 뒷모습을 저 멀리서 보고 있던 목단화가 화들짝 놀랐다.

“……말도 안 돼.”

그녀는 자신이 적고성과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는 걸 모를 것이다.

하지만 둘은 심정이 같았다.

‘엄청나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수를 보았다.

“하-!”

목단화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런 고수와 함께라면, 사도련의 추격을 따돌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리라.

갑자기 잠이 몰려왔다. 편안히 잠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만상각주의 집무실.

공야청이 서찰을 쓰고 있었다.

-……너무나 늦어서 미안합니다. 일 년이 좀 지났군요. 이제야 귀곡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만상각에 진우선이라는 무인이 있습니다. 항마의 능력이 뛰어나고 내력이 정심하여, 흑괴의 강력한 흑살마장도 그를 침범하지 못하니……

이건 빙화곡으로 갈 서찰이었다.

빙화곡 사람들이 일 년 전쯤에 왔었는데, 그때 공야청은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 채 돌려보냈었다.

하지만 진우선이 백무원에 속하게 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그때였다.

“각주님!”

금청청이 집무실로 급히 들어오며 외쳤다.

공야청이 지필묵을 한쪽으로 밀어두면서 물었다.

“혜원주, 무슨 일인가?”

“목단화의 보고서에서 꼭 보셔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들의 보고서가 올라왔나 보군. 이리 줘 보게.”

공야청이 금청청에게서 서찰을 건네받았다.

서찰을 살펴보니 금청청이 놀랐을 부분이 한 곳 있었다.

-얼마 전, 파천문의 금지(禁地)에서 사도련주가 앙천극사대법(映天極邪大法)에 성공했습니다.

“……!”

공야청이 눈을 부릅떴다.

“앙천극사대법이라니! 이건 백 년 전에 사황도 실패했던 대법인데!”

“맞습니다. 그걸 성공했다고 합니다.”

“허!”

공야청이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연이어 내쉬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각주님. 그런데 혹시 앙천극사대법이 정확히 어떤 건지 아십니까?”

금청청은 앙천극사대법이 사황과 관련 있다고만 알 뿐,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만학수사 공야청은 앙천극사대법에 대해 언젠가 한 번 본 기억이 있었다.

“앙천극사대법으로 상단전을 강제로 확장해 열 수 있다더군. 그러면 인간으로서는 넘볼 수 없었던 사도무공의 극한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했네.”

“헛!”

금청청이 탄식을 흘렸다. 그녀도 이내 공야청처럼 한숨만 연신 내쉬었다.

사도의 극한까지 다다른다니.

사도련주는 안 그래도 능력이 너무나 출중하여 곤란한 인물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사파의 무인들은 몇 차례나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었다. 서로의 이해타산이 너무나 안 맞는 탓이었다.

그런 사파 무리를 십 년 전에 하나로 모은 절대자가 바로 사도련주였다.

그런데 절대자인 사도련주의 무공이 더 나아갈 길이 열렸다.

두려운 일이었다.

“지난 몇 년간 사도련주가 거기 숨어 있었구나!”

공야청이 아까보다 더 깊은 탄식을 흘렸다.

이제 사도련주는 강호의 전면에 나설 것이다.

반면, 정무맹은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금청청도 생각이 같았는지 그걸 아주 작게 물었다.

“맹주님은 어떠십니까?”

공야청이 잠시 이마를 찌푸리다가 정말 작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회복 중이시네.”

“아직도요?”

끄덕.

“아……!”

금청청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절대자의 존재라는 게 응당 그러했다.

절대자는 그 어떤 무인이 오더라도 이기기 어려웠다. 그들의 수준이 하늘에 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도련주는 더 강해질 것이다. 정무맹주는 여전히 회복 중일 뿐이고.

“천하가 어찌 되려는 걸까?”

“그러게요.”

두 사람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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