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96화 (96/225)

096.

#능력을 보이다 (1)

악양은 발전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길게 이어진 장강과 거대한 동정호가 딱 만나는 지점에 있었으니, 오가는 사람과 물자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까닭이었다.

일송문(一松門)은 이런 악양에서 뿌리가 깊은 문파였다.

오랜 시간 쌓아온 명성이 있고, 인맥도 있었다. 그 명성과 인맥으로 돈도 많이 벌었다.

또한, 장사에 터를 잡은 정무맹과도 수십 년째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일대에서 일송문을 막을 곳은 없어 보였다.

실제로 몸집을 키워가는 몇몇 세력이 있었으나, 일송문에는 비할 바도 못 되었다.

“그런데도 일송문에 청사겸이 왔군.”

“그렇습니다.”

이능운이 말하자 악양지부장이 대답했다.

악양에 도착한 진우선과 이능운은 정무맹 악양지부에서 정보를 얻고 있었다.

“일송문의 전망은 어때?”

“재산을 지키고 불려 나가는 일은 지장이 없습니다. 문주가 그쪽으로 능력이 있고, 그가 있는 한 딱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만 일송문에 걱정이 있다면 세 아들이 칠칠치 못하다는 점입니다. 세인들도 다들 일송문의 후계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평범한 집이군.”

악양지부장의 말을 들은 이능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송문의 기록을 들춰보고 있던 진우선에게 물었다.

“뭐 좀 찾았어?”

“네. 이상한 부분이 몇 가지 보입니다.”

“뭔데?”

“일단 가장 이상하다 느껴지는 게…… 문주가 첫째 며느리와 너무 친밀하다는 점입니다. 근데 첫 째 며느리인 엽초희가 수상쩍은 면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데?”

“문주가 아들들에게는 모질기로 유명한데, 첫째 며느리의 말은 곧잘 듣는답니다. 며느리 때문에 크게 손해를 본 적이 몇 번 있었는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하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그녀가 청사겸과 친분이 있어 보인다고 합니다.”

“호오!”

이능운이 탄성을 흘렸다.

진우선이 언급한 내용에서 뭔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능운이 악양지부장에게 물었다.

“저 내용은 뭐지?”

“아, 그게. 저도 가끔 의문이 들긴 했지만…… 사실 첫째 며느리가 아주 요염합니다. 첫째 아들이 첫눈에 반했다는데, 화를 내려다가도 얼굴을 보면 화가 삭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문주도 화를 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악양지부장의 말이 나름대로 타당했다.

“그럼 청사겸과의 친분은?”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확인을 못 했습니다…….”

청사겸과 관계된 질문에서, 악양 지부장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악양의 거대문파인 일송문의 일인데 지부장이 모른다고 말하려니, 자신의 능력 부족을 시인하는 모양새였다. 그게 너무 창피했다.

하지만 이능운은 그를 탓하지 않고, 곧장 진우선에게 물었다.

“우선아, 네 생각은 어때?”

“일단 그는 재산을 지키고 불려 나가는 능력이 있는데, 굳이 손해를 감수했을 리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그리고 청사겸과의 친분은 가서 하루 이틀 살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진우선의 추리도 꽤 타당했다.

이능운이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래. 일단 네 생각대로 가보자.”

“알겠습니다.”

이능운은 먼저 파악해볼 일로 진우선의 의견을 택했다.

문제가 생겨서 온 것이니, 문제가 되는 걸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진우선이 만상각의 임무에 적응하는 과정이니, 그의 뜻을 따라가 보려는 생각도 있었다.

“근데 책 읽는 모습이 썩 잘 어울린다. 원래 책 좀 봤나 보군.”

이능운이 무신경한 어조로 말했다.

“작년까지 고서점에서 일해서 그런가 봅니다.”

“그랬군.”

한 줄로 스쳐 갔던 진우선의 고서점 이력이 이능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열 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다던 기록이었다.

“아무튼, 정보 잘 봤네. 한 번 살펴보고 오지.”

“알겠습니다.”

정무맹 악양지부장이 이능운에게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

일송문주 송원교.

그는 열흘에 한 번씩 간담이 서늘하면서도 짜릿한 하루를 보낸다.

그날에는 새벽부터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종일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모든 신경이 밤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 그랬다.

열흘에 한 번 오는 날이 오늘이었다.

아침부터 가슴을 졸이던 송원교는 세상에 밤이 깊이 찾아오자 기척조차 숨긴 채 움직였다.

송원교가 뒤뜰의 별채에 들어갔다.

이내 불이 다 꺼진 별채의 방 안에서 두 사람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희야.”

“아이. 왜 이제야 오셨어요?”

“허허허.”

송원교의 작은 웃음소리가 마치 정신 놓은 사람의 그것 같다.

하지만 그런 작은 소리가 몇 차례 들리는 듯하더니, 차단되었다.

잠시 후.

별채 앞으로 이능운과 진우선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이런 더러운 연놈들.”

“밀회를 즐기고 있군요.”

“밀회? 둘이서 붙어먹은 거지, 뭘.”

이능운과 진우선이 작게 속삭였다.

방 안에 있는 송원교가 기막을 펼쳤기에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진우선과 이능운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다 느끼고 있었다.

“이제 끝내자.”

“알겠습니다.”

이능운이 진저리를 치며 결정을 내렸다.

사실 둘은 지난 닷새간 일송문을 살피며, 엽초희와 청사겸 백뇌혼의 정체를 알아챈 상태였다.

-제 치마폭에 거의 다 넘어왔어요. 그러니 조금만 참으세요.

-크크크. 알았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는데 그걸 못 기다릴까.

청사겸 백뇌혼은 일송문의 빈객으로 와 있으나, 그 이전에 엽초희의 호위였다.

또한, 일송문을 같이 집어삼키기로 한 동업자이기도 했다.

계획은 엽초희가 만들었고.

“저 인간 말종들은 내가 처리하마. 청사겸이 오면 네가 맡아.”

“네, 알겠습니다.”

이능운이 진우선에게 청사겸 백뇌혼의 처리를 맡겼다.

만약 엽초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청사겸이 반드시 나타날 게 틀림없었다.

콰앙!

이능운이 별채의 문을 뜯어내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꺅!”

“웨, 웬 놈이냐?”

엽초희와 송원교의 당황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미친놈, 요망한 년.”

쐐애액.

이능운은 그들을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 보듯 내려다보며, 검을 휘둘렀다.

파팍!

“헉!”

송원교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급히 무공을 펼친 모양이지만, 이능운에게 역부족이었을 테니까.

퍼퍼퍽.

무공이 몇 초식 오가는 소리도 났다.

그러다가 이능운이 격노한 음성으로 일갈을 터뜨렸다.

“미혼향까지 피워두고 난리를 쳤구나!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

미혼향(迷魂香)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향으로, 방안을 살짝 덥힌 이 정도 양이면 흥분을 배가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대협께선 누구시오? 어찌 오셨소?”

송원교가 어떻게든 대화를 붙이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옷가지를 걸친 엽초희가 뾰족하게 소리 질렀다.

“이 색마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어디긴. 일송문주가 배덕한 곳이지.”

“뭐라고? 말이면 다야?”

엽초희가 신경질적으로 나오며 성질을 부렸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야! 내가 누군 줄 알아? 아냐고! 네가 이러고도 감히 무사할 것 같아?”

“꼭 죄 많은 것들이 그렇게 말하더라.”

이능운이 엽초희의 말을 대차게 까버렸다.

엽초희가 더욱 골이 나서 대꾸했다.

“흥! 어리석은 놈. 입만 살아서는…… 넌 이제 죽음 목숨이야!”

“무슨 수가 있소?”

늙수그레한 송원교의 음성에서 걱정이 묻어나왔다. 그는 이미 겁을 먹었는지 대화의 주도권에서 물러나 있었다.

반면에 엽초희는 자신만만했다.

“이 정도면 일송문의 빈객이 오지 않겠어요?”

그녀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래서 눈앞의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일송문의 빈객과 상대가 될지 안 될지 아무것도 가늠하지 못했다.

그런 송원교와 엽초희를 보며 이능운이 피식 웃었다.

“맞아. 슬슬 나타날 때가 된 거 같은데.”

“……설마?”

엽초희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는지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쩌면 이능운은 일부러 대화를 맞받아치며 시간을 끈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진우선의 음성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여럿이 오는군요. 근데 청송겸과 비슷한 수준의 고수가 한 명 더 느껴집니다.”

“하나 더?”

“그렇긴 한데,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능운이 묻자 진우선이 담담하게 답했다.

“뭐야? 너도 한 명 더 있었어?”

“청송겸만이 아니었소?”

엽초희와 송원교가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엽초희는 이능운에게로, 송원교는 엽초희에게로.

하지만 이능운은 이제 엽초희에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송 문주. 흉하니까, 일단 옷부터 입어.”

“……!”

이능운이 싸늘하게 말을 내뱉자 송원교의 얼굴에 수치심이 어렸다.

그렇게 별채의 방 안에서 대화가 진행되는 사이에, 진우선의 앞으로 일단의 무리가 도착했다.

“웬 놈이냐?”

“청사겸 백뇌혼. 죽을 자리로 알아서 왔군.”

“하! 이놈 봐라. 새파랗게 어린놈이 천지 분간을 못 하는구나.”

답을 하는 이가 청사겸 백뇌혼이었다.

그의 무기를 보고 알았다.

창대에 뾰족한 창머리가 아니라 길쭉한 낫을 매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대낫이 바로 무기인 겸(鎌)이었다.

“상황 파악 못 하는 건 네놈들이겠지.”

진우선이 짧게 대꾸하더니, 곧장 검을 들고 짓쳐 들었다.

“이 어린놈아. 네놈이야말로 조그만 검 하나 들고 죽을 곳으로 뛰어들면서 입만 살아있구나! 크크크.”

청사겸 백뇌혼이 진우선을 비웃었다.

겸의 범위는 크다. 창대가 길고 창대 끝에 달린 날도 긴 까닭이었다.

검이 자신에게 닿기 전에, 겸이 그를 벨 것이다.

백뇌혼은 눈앞에 있는 애송이의 미래가 벌써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함께 온 무리도 백뇌혼을 뒤따라 웃었다. 아주 잠시만.

스악!

진우선이 뛰어들며 검을 그어 올렸다.

그 순간 검에서 뻗어 나간 빛줄기가 백뇌혼의 겸을 갈랐다.

투두둥-.

겸이 세 조각 나서 떨어졌다.

백뇌혼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그는 무얼 할 틈이 없었다.

진우선이 달려드는 속도 그대로 그를 베고 지나갔으니까.

툭.

백뇌혼의 움직임이 멎었다.

청사겸 백뇌혼이라 불릴 정도로 상당한 실력을 지녔으나, 더 강한 고수 앞에서 방심한 순간 그의 목숨은 이미 없었다.

“뭐, 뭐야?”

웃는 인상의 중년인이 주춤 물러서며 말을 흘렸다. 그가 청송겸만 한 고수였다.

진우선은 중년인의 놀람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다시 들었을 뿐이다.

잠시 후.

일단의 무리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바닥에 누웠다.

그들은 아무도 진우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날, 일송문의 빈객은 모두 숨을 거두었다.

이 모든 일의 주동자였던 엽초희는 목이 잘려 놀라서 눈만 부릅뜬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도의 무리였다는 죄목이었다.

***

“……엽초희는 흑요궁(黑妖宮) 출신이었다. 무공은 할 줄 몰랐으니, 말단에 불과했겠지만.”

“청사겸과 소면최심(笑面摧心)은 사사천(死邪天)의 빈객이었으니, 흑요궁과 사사천 두 곳이 연합한 거였군.”

이능운의 말을 들은 금청청이 상황을 정리했다.

흑요궁과 사사천은 사도련(邪道聯)으로 뭉친 다섯 집단 중 두 곳이었다.

“아들이 셋인데 모두가 개차반에 무공이나 학문과는 담을 쌓아서 일찍 혼인시켰다더니, 그게 화근이었네. 화근이었어!”

금청청이 독설을 내뱉었다.

그녀는 백혜원주로서 만상각주를 도우며 정도의 많은 문파를 살피기도 했는데, 이런 일을 접할 때면 속에서 욕지기가 마구 치솟았다.

“일송문주 송원교, 그는 이제 맹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거야. 후원도 더 많이 하겠다고 하더군.”

이능운도 금청청처럼 화가 났었으나, 송원교의 목숨은 거두지 않았다.

어쨌거나 사도련의 인물들을 처리하는 게 목표였고, 정도맹에 속한 문파의 피해는 최소화하는 게 원칙인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많은 걸 얻어낼 수 있었다.

“저 혼자 똑똑한 척 다하면서 수전노처럼 악착같이 남의 눈물 콧물 다 빼먹었는데, 팍팍 내놓아야지. 인과응보야, 인과응보. 그래도 싸.”

이능운은 금청청의 말에서 분노가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그래서 잠시 기다린 후,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진우선에 대해 전할 말이 좀 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력은 초무량에 버금간다.”

“초무량에? 정말로?”

초무량은 백무원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였다. 물론 백무원주 이능운은 예외로 쳤을 때 말이다.

한데 이능운은 단 한 번 같이 다녀온 진우선을 그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청사겸이 일격에 죽었고, 소면최심도 죽어서야 그가 누구였는지 확인했다. 번쩍! 하는 순간에 끝나 버렸지. 그들은 아예 상대되지 않았어. 격이 다르다.”

“정말 그 실력이었네.”

“그래. 아마 흑괴에 대해서도 각주님의 생각이 맞을 거 같다.”

만상각주는 진우선을 평가하며, 흑괴와 단둘이 붙었어도 십중팔구 지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 당시 둘은 판단을 유보했었다.

진우선은 신입이니, 첫 임무 때 같이 나가 살펴보면 유추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확히 알 수 있을 테니까.

“와-! 백무원에 대단한 인재가 들어왔네.”

“맞아. 그리고 기초는 다 전했다. 금세 알아듣더군.”

이능운은 열흘 간 악양을 다녀오면서 진우선에게 임무 수행 시 필요한 기본 정보들을 알려줬었다.

만상각의 일원으로서 표식을 읽거나 남기는 법이라든지. 임무 중에 얼마만큼 결정을 내리고, 어느 정도의 권한을 쓸 수 있는지. 임무 후에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려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게 있어. 항마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벽사의 능력도 뛰어나다.”

“뭐? 거짓말 아니고?”

“특히 사기를 물리치는 데 효과가 큰 것만이 아니라, 감각마저도 예민해져서 흔적까지 느낄 수 있더군.”

“와-! 말도 안 돼! 미쳤네. 그게 진짜라고?”

금청청이 연신 감탄만 흘렸다. 나오는 건 헛웃음뿐이었다. 놀람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감정을 우악스럽게라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천마교와 사도련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다 갖춘 거잖아!”

금청청의 말투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한가득 묻어나왔다.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리는 신산(神算) 금청청조차 허탈한 모양이었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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