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백무원의 신입 (2)
만상각주 공야청과 대화를 마친 후, 이능운이 진우선을 데리고 만상각을 안내했다.
“특별히 알아야 할 건 삼층의 운중헌과 이층의 소요정이다.”
삼층에 있는 운중헌(雲中軒)은 백혜원의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고 회의하는 곳이다.
이층에 있는 소요정(逍遙亭)은 만상각 사람들이 편히 쉬다 가는 곳이다. 휴식을 취해도 되고, 차와 다과를 즐길 수도 있다.
“백혜원 사람들은 대부분 운중헌이나 소요정에 있을 거다. 그들은 항상 업무가 많아서 자리를 좀처럼 못 비우거든. 좀 충원하면 좋겠는데, 자격을 갖춘 이를 찾기 어렵다더군.”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들 중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는 이 두 곳부터 찾으면 된다.”
“네, 알겠습니다.”
이능운과 진우선은 삼층을 둘러보고 이층으로 내려온 상태였다.
“일층에는, 아까 봐서 알겠지만 대전(大殿)과 식당이 있다. 지하에는 장서고가 있는데, 여긴 백혜원에서 관리하니 지하에 내려갈 일은 없어.”
진우선이 이능운의 설명을 들으며 만상각의 구조를 바로 이해했다.
삼층에 만상각주, 백혜원주, 백무원주의 집무실이 있고, 운중헌도 있었다.
즉, 만상각의 업무는 삼층에서 대부분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능운이 이층에서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쪽을 봐.”
이능운이 가리킨 방향으로 진우선의 시선이 따라갔다.
소요정 반대편이었다.
“보이는 모든 방이 전부 숙소다. 남자는 이쪽, 여자는 저쪽.”
남자는 좌측 복도에 있는 방을 쓰고, 여자는 우측 복도에 있는 방을 쓰는 모양이었다. 가운데 서가를 쭉 설치해서 좌우를 나눠두고 있었다.
“백혜원은 대부분 여기서 잔다. 밖에 집이 있어도 다녀올 시간이 없다더군.”
“그럼 백무원 사람들은 안 그렇습니까?”
“어. 우리는 많이 안 쓴다. 만상각에서 근무를 설 때만 사용하지. 외부로 자주 임무를 나가서 매일 이곳에 있지는 않으니까. 지금도 대부분 임무 수행 중이고.”
“그렇군요.”
“그리고 작은 집이라도 하나 사는 경우가 많아. 그게 편하거든. 너 집 살 돈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실망하지 마. 우리는 임무를 할 때마다 생각보다 돈을 많이 준다. 생명수당을 좀 많이 주거든. 그걸 잘 모으면 집을 살 수 있지. 너도 집 사라. 내 집 마련해서 잠이라도 편히 자는 게 좋다.”
“아!”
생명수당이라는 말이 뇌리에 확 꽂혔다.
백무원의 역할에 대해 여태까지 설명 들었던 것보다 이 말 하나에 더 실감이 나고 있었다.
“그 말이 와 닿나 보군. 아까는 말 안 했지만, 백무원에서는 오늘 본 옆 사람을 내일 못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지난달에도 한 명이 돌아오지 못했지. 비도술이 기가 막히고 경공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친구였는데, 사도련 고수들의 협공을 못 버텨냈다. 아무튼, 그런 날이 왔을 때 당황하지 마라. 우리 일이 원래 그런 거니까.”
“……!”
이능운이 무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 가벼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걸 통해 생명수당이 지니는 고귀한 값어치를 말하고 있었다.
“뭘 놀라고 그러냐. 당연한 거지. 괜히 생명수당 주는 거 아니야. 우리의 목숨값인 거다. 세상은 돈 허투루 주지 않는다.”
“그건 맞습니다.”
진우선이 십분 공감했다. 돈을 버는 일 중에 쉬운 건 없었다.
“그리고 돈 모으면 그냥 집 사. 네가 흑괴보다 강할 거라고 각주님이 그러시던데, 그 정도 실력이면 큰돈 금방 모은다. 집이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곳에 써라. 주색잡기 하지 말고. 목숨 걸고 번 돈을 허랑방탕하게 쓰는 몇 명이 있는데 그들 따라가지 마. 다 날렸다.”
“잘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그래도 너는 보니까 돈 귀한 줄은 아는 거 같네. 다행이군.”
이능운이 진우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은 문득 이능운이 무뚝뚝해 보여도 꽤 다정하다는 걸 느꼈다.
사람을 빠르게 파악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어쩌면 그의 퉁명스러운 태도는 정을 안 주려는 생각의 발로인지도 몰랐다.
지난달에도 한 친구가 죽었다지 않은가.
그는 백무원에 있으면서 꽤 많은 사람을 떠나보낸 것 같았다.
“무원주님은 여기 계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후후. 내가 얼마나 벌었는지 궁금한가 보군. 나는 칠 년 됐다. 무인으로 삼 년, 무원주로 사 년 됐지. 그리고 무원주가 될 때쯤 장사에 장원을 샀다.”
대화의 목적이 서로 달랐지만, 진우선은 원하던 내용을 다 들었다.
“저도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래. 넌 가망 있어. 내 기록을 넘어서는 걸 목표로 삼아봐라.”
삼 년 안에 장사에 장원을 사라는 뜻이었다. 집보다 훨씬 비싼 장원을 말이다.
진우선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에 연공실은 없습니까?”
“아쉽게도 만상각에 그럴 장소는 없다. 지하에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건 좀 아쉽네요.”
“방에서 운기행공을 하거나, 심상 수련을 하는 수밖에 없지. 그런데 불편할 거다. 그러니 아까도 말했다시피, 돈 벌어서 집부터 사라. 빠르게 모으면 반년 만에도 장사 외곽에 작은 집 하나는 살 수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능운의 말을 들어보면, 무조건 집을 사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최근에 지인 중 누군가가 집을 안 사서 속을 썩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우선이 너는 당분간 이곳을 써야겠군. 그럼 내가 좋은 방 알려주지. 동선도 괜찮고, 창밖 시야도 괜찮아.”
“감사합니다.”
이능운이 자신이 생각하는 괜찮은 방으로 진우선을 안내했다.
“여기다. 아마도 마음에 들 거야. 그리고 혜원주가 내일부터 임무를 준다고 했거든. 처음 한 번은 내가 같이 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혹시 더 궁금한 거 있어?”
“일단은 없습니다.”
“그렇군. 그럼 내일 보자. 아침에 내 집무실로 올라오면 된다. 오늘은 쉬어. 딱히 할 게 없다면, 만상 각을 둘러보거나 근처에 다녀와도 상관없다.”
“네, 알겠습니다. 쉬십시오.”
대화를 마친 이능운이 방을 나갔다.
그가 소개해준 숙소 방은 꽤 좋았다. 호심당에서 쓰던 숙소의 두 배 크기에, 집기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진우선이 자신의 방에 짐을 풀었다.
그러고는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최근에 몰두 중이었던 금선무의 심상 수련을 시작했다.
검노야가 그런 진우선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창밖을 내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는 창궁관이 바로 보이는구나.]
창궁관이 우측 시야에 있었다.
햇빛을 받아 더욱 웅장하게 보였다.
[천도관은 뒤쪽에 있겠군.]
검노야가 그 위치도 대강 가늠해 보았다.
천도관은 창밖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검노야는 굳이 움직여서 그걸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
조문신의 거처였던 천도관은 기억 속에 있을 뿐, 지금은 당대 정무맹주가 있을 테니까.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고. 허허허.]
검노야의 시선은 현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진우선은 진시초(辰時初, 아침 7시경)에 만상각 삼층에 있는 백무원주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시간 맞춰 왔군. 잠은 잘 잤어?”
“네. 방이 편하고 좋았습니다.”
“그래. 그럼 잠깐 앉아 있어. 혜원주가 곧 올 테니까. 그녀가 임무를 설명해줄 거야.”
이능운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말했다.
그는 작은 막대기 하나를 세밀하게 다듬고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진우선에게 그 막대기를 건넸다.
“다 됐군. 이거 받아서 잘 챙겨.”
“이게 무엇입니까?”
“앞으로 네가 백무원에서 쓸 인장이다. 끝에 두툼한 부분을 잘 보면 선이 파여 있지. 선이 하나 파여 있는 쪽이 만상각의 문양이고, 반대편에 선이 두 줄인 쪽이 네 문양이다.”
“명패 같은 거군요.”
진우선이 인장을 받아들고 살폈다.
위쪽에는 만상각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아래쪽은 뭉툭했다.
“맞아. 명패라고 이해하면 편하지. 근데 일반적인 명패보다 훨씬 신경 쓴 물건이다. 보통 서찰로 임무가 하달되는데, 서로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서 특별한 문양 두 개를 찍는 거야. 일단 인장에 내공을 주입해봐.”
진우선이 집게손가락만 한 막대기에 내공을 밀어 넣었다.
인장에 은은한 광채가 어리더니, 뭉툭한 부분에 음각된 문양에 붉은 기운이 슬쩍 어렸다.
도드라지게 보였다.
“됐다. 각인됐군. 이제 너만 쓸 수 있다. 내공이 있어야만 음각이 살아나거든.”
“그런 게 됩니까?”
“내공에 특별하게 반응하는 철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처음 불어 넣은 내공만 계속 받아들이고, 다른 기운이 들어오면 부서진다더군.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남가철방의 남 대인께서 그리 설명해 주셨다.”
“오-!”
진우선이 감탄을 흘렸다.
조그마한 인장에 그런 능력이 깃들어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까닭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 대인이 얼마나 대단하신지는 너도 알겠네. 네 검을 거기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던데.”
“네.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지요.”
남회는 대장장이로서 타고난 능력에 수많은 지식과 경험까지 갖췄으니, 이런 기물을 만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때, 이능운이 자신의 인장을 꺼내 들어 내공을 불어넣었다.
“자. 이걸 잘 봐. 이건 내 건데, 양각되어 있다. 이걸로 종이에 찍으면…….”
종이에 문양이 찍혔다.
“여기에 네 껄 찍어봐.”
진우선이 내공을 넣어 종이에 인장을 찍었다. 그러자 종이의 문양이 떨어지며 구멍이 났다.
정확하게 문양만 뚫려 있었다.
“보다시피 문양이 이렇게 딱 생긴다. 이러면 진짜라는 거야. 만약 잘못된 거면 귀퉁이들이 다 뚫려서 종이에 문양이 아예 안 남는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인장은 정말 기물이었다.
“이렇게 양각된 게 만상각에 딱 세 개 있어. 각주님, 나, 혜원주. 그러니까 문양이 확인되면 그 세 사람 중 한 명이 보냈다고 생각하면 된다.”
“네.”
“그리고 봐서 알겠지만, 그거 비싼 거다. 잃어버리지 마라.”
이능운이 말을 마쳤다.
자신의 인장을 보던 진우선은 어제에 이어 다시 한 번 이능운이 꽤 친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는 여전히 쌀쌀맞고 차갑지만, 모든 걸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시원한 이목구비와 늘씬한 체형만큼이나 걸음걸이도 거침이 없었다.
“나는 혜원주 금청청이야. 진우선이지? 반가워.”
“처음 뵙겠습니다.”
혜원주 금청청이 바로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지금 좀 바빠서. 바로 임무부터 줄게.”
금청청이 서찰부터 건네자 이능운이 진우선에게 조언했다.
“우선아, 인장부터 한 번 확인해 봐.”
진우선이 서찰을 받고 인장을 바로 사용했다.
그러자 문양이 딱 뚫렸다.
정식 임무가 맞았다.
그러는 사이 금청청이 상당히 빠르게 말했다.
“살펴보니까, 드러난 실적이 몇 개뿐이지만 실력은 훌륭하더라. 수라객과 마라혈객을 베었고, 마라혈독에 중독됐던 형산파 대제자 맹두고는 제압했고, 흑괴는 패퇴시켰지. 어지간한 이삼십 명은 떼로 상대해도 어려워하지 않았고. 그만하면 실력으로 못 맡을 임무는 없을 거야.”
진우선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근데 아직 경험은 부족한 편이지. 약관도 안 됐으니 사실 그건 당연한 거고. 그래서 당분간은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경험을 쌓는 게 좋겠다 싶어. 너는 어때? 혹시 꺼리는 거 있어?”
“알겠습니다. 헤원주님의 말씀이 옳은 거 같고, 제가 딱히 꺼리는 건 없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청청의 의견이 타당한 까닭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일단 오늘 임무부터 간단히 알려줄게. 물론 이건 처음이니까 그런 거고, 나중에는 서찰로만 전해질 때가 많을 거야.”
“알겠습니다.”
진우선은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금청청의 말과 속도에 동조되는 것이리라.
“능운, 같이 갈 거지?”
“어.”
금청청이 이능운에게 확인하고서 설명을 이었다.
“그럼 전혀 어렵지 않겠네. 악양의 일송문에 사도련 쪽 인물들이 들어왔어. 일송문은 특별한 문제가 없던 곳인데, 요즘 행적이 수상해. 그걸 알아보고 오면 돼.”
“사도련 인물들과 일송문의 행적, 이 둘을 알아보면 되는 건가요? 아니면, 손도 써야 할까요?”
“서찰에도 써놨지만, 사도련 쪽은 확인이 되면 처단해. 일송문은 낌새가 어떤지만 보면 되는데, 만약 죽여서 입막음하려고 한다면 그대로 응대해줘야지. 일송문주의 실력은 대충 수라객 정도 될 거야. 뒷일은 악양지부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금청청의 설명이 명쾌했다.
“알겠습니다.”
그때 이능운이 물었다.
“사도련에선 누가 들어왔어?”
“청사겸(靑邪鎌) 백뇌혼.”
“그렇군.”
때마침 진우선이 서찰에 청사겸 백뇌혼이 적혀 있는 걸 보았다.
그를 포함하여 사파의 무리가 예닐곱 정도 더 있다는 내용도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서찰에 임무의 중요한 내용이 다 적혀 있었다.
“우선아. 이제 가보자.”
“네.”
백무원에서의 첫 번째 임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