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백무원의 신입 (1)
만상각(萬象閣)의 두 축을 이루는 곳이 바로 백무원(百武院)과 백혜원(慧院)이다.
백무원은 무력으로, 백혜원은 지혜로.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예설이는 호심당 제자일 때 백혜원에서 임무를 수행했었으니, 잘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어요.”
사예설의 대답에 이능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미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이능운은 만상각으로 가는 와중에 주로 진우선의 관점에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만상각은 기본적으로 천하의 소식이 가장 빠르게 모이는 곳이다. 때로는 전해지지 않는 진실을 직접 찾아와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정보를 지켜야 하는 순간도 있지. 그런 게 모두 백무원의 일이야.”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혼자서 많은 걸 해낼 능력이 있는 무인들이 대부분이다. 백혜원도 비슷해. 그들은 정보를 분류하고 분석하여 진실을 가려내지. 거짓이 꽤 많거든. 근데 다 해낸다. 종종 천재가 있다면 이렇겠다고 느꼈지.”
“그럼 저도 그렇죠? 천재?”
갑자기 사예설이 끼어들었다.
이능운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슬쩍 보았다.
“그건 혜원주에게 물어. 난 판단하지 않는다.”
“방금 사견을 말씀하셨잖아요.”
“포괄적인 설명이지. 우선이가 일단 분위기는 알아야 할 테니까.”
이능운이 사예설에게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그녀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진우선에게 곧장 말을 이었다.
“이제 백무원 소속은 나를 비롯해 우선이 너까지 모두 스무 명이다. 백혜원은 예설이까지 합쳐서 일곱 명이고.”
“인원이 생각보다 적군요. 소수 정예일 수밖에 없으니 그런가 봅니다.”
“정확해. 핵심을 바로 파악하는군.”
이능운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진우선의 말대로 만상각은 소수 정예의 방침을 유지하고 있었다.
큰 인원이 필요할 때엔 정무맹 산하 다른 오당오각에서 처리하면 된다.
만상각은 다른 오당오각에 임무를 하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니 급한 일, 중요한 일에 당장 나설 수 있는 인원만 있으면 되었다.
그게 백무원의 무인들이었다.
“일단 이 정도면 백무원이 어떤지는 알겠지? 들은 것 중에 궁금한 거 있어?”
“아니요. 다 이해됐습니다.”
“그래. 또 알아야 할 건 그때그때 알려주마.”
“네, 알겠습니다.”
진우선의 대답에 이능운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이 생각보다 대화가 통하니 크게 불편한 게 없는 까닭이었다.
그때, 사예설이 진우선에게 말을 걸었다.
“진 공자. 왜 백혜원이고 백무원인지 알아요?”
“글쎄요.”
“백(百)하고 백(百)이 만나면 만(萬)이 되거든요. 백이 백 번 있는 거죠.”
“아! 백혜와 백무가 만나서 만상이 되는군요.”
“그렇죠!”
진우선이 감탄을 흘렸다.
만상(萬象)은 온갖 존재와 현상을 말하니, 강호의 모든 대소사를 통칭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만상각의 일은 무력과 지혜가 서로 상승작용을 이뤄내어 해결하는 것일 테니, 백무원과 백혜원이 만나 만상각이 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었다.
이 순간 진우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능운은 생각이 달랐다.
“뭐야? 이런 농담에 왜 감탄하지?”
“하핫. 농담이었습니까?”
진우선이 당황하여 멋쩍게 웃었다.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진우선은 아직 감탄의 여운이 있었기에, 사예설에게 한마디 건넸다.
“사 소저, 재밌었습니다.”
“고마워요.”
진우선과 사예설의 대화를 들으며, 이능운은 둘의 관계가 서먹함을 눈치챘다.
“둘이 동갑이던데, 오늘 처음 이야기해?”
“네. 처음입니다.”
“친분이 있던 건 아니었군. 일결이든 이결이든 호심당 제자들끼리는 웬만큼 친한 줄 알았는데.”
이능운은 호심당 출신이 아니었기에 다소 착각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뭐, 상관없지. 만상각에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해질 테니까.”
이능운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사예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무언가 아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대화하는 사이, 창궁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다.
이능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왔군.”
전방의 삼층 전각에 걸린 ‘만상각’이란 현판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는 정무맹주가 머문다는 천도관도 언뜻 보였다.
“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두 사람 모두 따라오도록. 오늘부터 정식으로 소속됐으니, 예설 너도 절차를 밟아야 해.”
“네, 알겠습니다.”
“네.”
진우선과 사예설이 만상각 삼층에 있는 각주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반갑군. 공야청이네.”
차를 준비하며 신입 두 사람을 맞이하는 쥐 상의 중년인, 그가 만상각주 공야청이었다.
“진우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사예설입니다.”
“그렇군. 여기로 와서 앉게.”
공야청이 두 사람을 탁자로 안내했다. 진우선과 사예설이 자리에 앉자, 각자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쪼르륵 따라주었다.
차의 은은한 향기가 주위에 퍼졌다.
“아침에 차를 한 잔 마시면 심신이 편안해지지.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공야청이 사람 좋은 미소로 말하며 차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진우선과 사예설이 뒤따라 찻잔을 들었다.
공야청이 그들의 모습을 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만상각에 온 걸 환영하네. 일결제자들 중 많은 수가 자네를 진 소협이라고 부른다지? 인망이 꽤 두텁더군. 그래서 한번 보고 싶었다네.”
“감사합니다.”
공야청이 기대감 어린 눈으로 진우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호심당에서 치른 시험 결과나 임무에서 보여준 실력은 놀라웠어. 다른 모든 일결제자와 상대해서 이긴 것도 대단한데, 흑괴와 상대해서도 승기를 점한 거 같더군. 그렇지?”
“흑괴의 흑살마장은 강한 독기가 어려 있어서 까다롭고 어려웠습니다. 주변에 무의대 분들이 계셔서 더욱 조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제 무공에 항마의 능력이 깃들어 있어 그를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진우선이 자신의 느낌과 견해를 말했다.
무의대주 엄소백이 정확하게 보고했겠지만, 그가 자신의 심정까지 전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자 공야청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그런가? 내가 보고서를 읽으면서 유추해봤는데, 만약 자네가 흑괴와 단둘이 승부를 겨뤘다면 십중팔구는 패하지 않았을 거 같더군. 뭐, 내 예상이지만 말이야.”
“……!”
사예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진우선을 쳐다보았다.
정말 저런 확률이었을까?
십중팔구로 패하지 않는다는 건, 진우선이 흑괴와 동수이거나 더 뛰어나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아…….”
잠시 생각하던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아마도 공야청의 말대로 흑괴와 단둘이 맞붙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식은 처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줄이야…….’
[허허. 재미있구나. 만상각주는 세상을 이렇게 보고 있었구나.]
검노야도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찾아가서 싸우라는 건 아니네. 그저 만상각과 백혜원에서 이렇게 말할 때가 있을 텐데, 미리 알아서 당황하지 말라는 뜻이었네. 예설아. 그렇지?”
“그렇긴 해요. 그런데 진 공자가 정말 흑괴와 비등한 게 아니라 승기가 있었던 건가요?”
“본인이 여기에 있는데, 나한테 묻는 건 실례일 수 있다.”
사예설이 공야청에게 묻자, 공야청이 진우선에게로 답변을 돌렸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주변에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없었다면 어땠을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건 답이 되질 않는데……. 혹시 진 공자의 무위만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을까요? 흑살마장을 상대하는 데 항마의 능력이 어느 정도나 영향을 끼쳤을까요?”
사예설이 눈을 반짝이며 계속 물었다.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 듯했다.
“글쎄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진우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야청이 사예설을 제지했다.
“그만하거라. 예가 아니구나.”
“……네. 알겠습니다.”
다소 아쉬운 기색을 보이며 사예설이 의문을 잠시 접어두었다.
“아무튼, 반갑네. 만약 이런 경우가 생긴다면 굳이 꼭 대답할 필요는 없으니, 자네가 적당히 잘 처신하게.”
“네. 그러겠습니다.”
진우선이 공야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만상각에서의 첫날을 크게 느꼈다.
‘확실히 만상각 사람들은 머리가 뛰어나구나.’
지혜롭고 학식이 풍부한 것도 있겠지만, 화술과 계략도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능운이 아침에 왜 사예설의 말을 적당히 흘렸는지 알 것 같았다.
진우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공야청이 사예설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예설이는 얼마 전에도 봤지만, 이제 확실히 우리 식구가 되었구나. 반가워.”
공야청이 그렇게 한마디 하고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차를 음미하는지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예설이 공야청에게 물었다.
“각주님. 저는 그게 끝인가요?”
“네 총명함은 이미 충분히 들었고, 또 겪어서 잘 알고 있지. 혜원주가 너 오면 바로 보내 달라고 할 정도더구나.”
“원주님이요? 바로요?”
사예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잔뜩 어렸다.
“그렇더구나. 그래서 내가 일다경(一茶煩, 차 한 잔 마실 시간으로 약 15분)만 달라고 했지.”
“그거 말고는요?”
“이번에 백혜원에 올 만한 후보는 너와 제갈영이었는데, 혜원주는 제갈 소저의 지혜가 너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더구나. 지식은 많으나 지혜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더군.”
“정말 혜원주님이 그러셨어요?”
“그럼 내가 없는 말을 하겠느냐?”
“아하!”
사예설이 환하게 웃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녀는 공야청이 하는 말의 저의를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칭찬받는 건 기분이 좋았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벌써 일다경이 된 건가? 아쉽군.”
“각주님께서는 이미 시간을 알고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해요.”
“허허. 그럴 리가 있겠나? 아무튼, 예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혜원주도 잘 챙겨주고.”
“네.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뵈어요.”
사예설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공야청이 진우선을 붙잡았다.
“우선, 자네는 나와 잠깐만 이야기를 더 하면 좋겠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진 공자도 나중에 뵈어요.”
사예설이 진우선에게 인사를 건네고 공야청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공야청이 진우선에게 물었다.
“무원주에게서 백무원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자네에 대한 기록을 다 읽었네. 어디서 왔는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다 알겠더군. 성실하고 뛰어난 자네의 모습에 감탄했네.”
공야청이 칭찬하는 말로 새로운 화제를 열었다.
진우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더 중요한 질문이 이어지리라.
그것이 진우선이 짧은 시간 동안 파악해낸 공야청의 화술이었다.
“하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었네. 자네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지.”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자네의 무공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가? 물론 여태껏 비밀로 해온 이유가 있을 테니, 나만 알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나는 만상각주로서 맹의 대소사를 처리하는데, 내가 자네를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도록 꼭 알려주었으면 하네.”
공야청의 질문이 진우선의 심장을 묵직하게 때렸다.
여태껏 진우선이 만나온 사람들은 그에게 사승을 직접 묻는 경우가 없었다.
무인은 무공에 의지해 강호를 산다. 그렇기에 무공의 이름과 연원이 많이 알려질수록 약점을 노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우선을 보며 적당히 은거기인의 제자로 여겨왔다.
진우선도 눈치가 있기에 그런 상황을 알았다.
하지만 공야청의 질문은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예전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알고 있었다.
스승님의 존함을.
“저는 창궁진인께 검을 배웠습니다.”
“창궁진인? 내가 견문이 짧아 처음 듣는 것 같군. 혹시 누구신지 설명해주겠나?”
“저도 스승님에 대해 완전히는 모릅니다. 다만 무한에서 인연이 닿았고, 가난하여 더 배우지 못했던 저를 인자하게 이끌어주셨습니다. 스승님은 어느 이름 없는 도관에서 검을 잡았으며, 마흔에 도를 깨달아 하산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선도를 찾고 계십니다. 저는 스승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배웠습니다.”
“허! 그랬군.”
지극히 공손한 진우선의 태도에 공야청이 탄성을 흘렸다.
창궁진인이 누구인지 모르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경외감이 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인께 어떤 무공을 사사했는가?”
“광영무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천지간의 이치를 담은 검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
공야청이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탄식을 터뜨렸다.
광영무도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까닭이었다.
그는 만학수사(萬學秀士)라는 별호가 무색하게 느껴졌다.
세상의 수많은 지식에 통달했다. 하여 그렇게 불렸으나, 지금 창궁진인이 누구인지, 광영무는 어떤 무공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한편, 일련의 대화를 듣던 검노야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검노야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