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93화 (93/225)

093.

#진결제자 (3)

호심당 대정관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세 줄로 이루어진 부채꼴의 좌석에는 이결제자 스물다섯 명과 진결제자 한 명, 총 스물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뒤쪽과 옆쪽에는 무사부들이 쭉 도열해 있었다.

“……그동안 모두 수고했네. 이제 여러분은 정무맹 곳곳의 일원이 될 테고, 또한 호심당을 거쳐 간 정도(正道)의 후기지수가 될 것이네. 그간 옆의 제자들과 생사 고락을 함께했고, 무사부님들과 많은 성취를 얻었을 텐데, 그 경험과 힘을 맹의 발전에 보태주기 바라네. 비록……”

그리고 맨 앞에서 호심당주 호연강이 그 모두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자들을 환송하는 자리였다. 그들은 이 시간을 끝으로 호심당을 떠나게 될 테니까.

진결제자 진우선도 마찬가지였다.

진우선은 호연강의 말을 들으며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항상 곁에 있었던 만총과 우문혁은 진우선의 일을 제 일처럼 여기며 기뻐해 주었다.

첫 임무를 함께 했던 상관적과 민연하를 비롯해 십오행 중에 친해진 손중보, 그리고 가을에 함께 임무를 다녀온 염지광도 따로 시간을 내어 찾아와 축하와 아쉬움을 전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오가며 인사를 건넸다.

그들과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호심당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며 친분을 잘 나눴었구나.’

모든 제자와 가까워진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개인적인 소회를 마쳐갈 때쯤, 호연강의 이야기도 끝이 났다.

“……앞으로도 여러분 각자의 인생에 무운이 함께하길 빌겠네. 고마웠네.”

그 말을 끝으로 호연강이 몇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이결제자 몇몇이 크게 외쳤다. 그러자 다른 이결제자들도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부당주들과 무사부들께서 가장 수고 많이 하셨으니 박수를 받아 주시게.”

호연강의 말에 엄초양 부당주를 비롯한 여러 무사부가 제자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뜻깊은 시간이 흘렀다.

진우선만 빼고.

그때였다.

“우선아.”

“황 무사부님.”

무사부 황백이 진우선을 부르며 다가왔다.

“축하한다. 진결제자가 되어 일 년 만에 호심당을 떠나게 되었구나.”

“감사합니다.”

황백의 칭찬에 진우선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흐뭇함이 황백의 입가에도 어렸다.

“그리고 지광이를 잘 지도해줘서 고맙다. 임무를 다녀온 후 부쩍 늘었더구나.”

“염 형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다만 조언을 조금 했을 뿐입니다.”

“허허. 내 생각엔 임무가 더 길었다면 지광이 실력이 지금보다 더 늘었을 것 같은데?”

황백이 가볍게 웃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이 진지해졌다. 무언가 결심을 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도 고맙다. 너를 만난 덕분에 내 안에서 잠들어 있던 마음을 알 수 있었어.”

“어떤 마음이 있으셨습니까?”

“무사부를 그만두고, 강호에 돌아가기로 했다. 너를 보며 호승심이 깨어났고, 강함에 대한 열망과 검에 대한 애정도 되살아나더구나.”

“그럼 황 무사부님께도 제가 도움이 되었습니까?”

진우선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황백이 허허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 고맙다고 했지. 내 검이 녹슬었고, 마음이 녹슬었는데, 너로 인해 녹슨 시절에서 깨어날 수 있었어.”

무사부의 녹봉이 적지 않고, 염지광을 맡으며 후학 양성에도 애를 썼다.

하지만, 진우선과 일전을 치른 후에는 그것들이 큰 의미가 없었다. 뜨거운 마음, 무인의 열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진천검문 출신의 귀주검호다.”

황백이 나직하지만 흔들림 없이 말했다. 스스로 주문을 거는 듯했다.

“맞네. 황 무사부 자네는 귀주검호지.”

그때 석자풍이 다가오며 황백의 말을 받았다.

“부당주님.”

“오셨습니까?”

진우선과 황백이 차례대로 석자풍을 맞이했다.

“황 사부, 그간 수고 많았네.”

“별말씀을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고맙지. 자네는 무사부로서 훌륭하게 잘해주었네.”

석자풍이 황백에게 진심을 전했다.

황백이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더니 석자풍과 진우선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무운을 빌겠네.”

황백의 결심에 석자풍이 격려를 전했다.

진우선도 인사를 건넸다.

“강호에서 뵙겠습니다. 황 대협.”

끄덕.

황백이 진우선을 보고 피식 웃으며 고갯짓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쭉 가로질러서 대정관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석자풍과 진우선이 고개를 돌려 마주보며 대화를 이었다.

“진결제자 진우선, 한 해 동안 수고 많았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호심당에서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석자풍이 그렇게 따스한 인사로 대화를 열며, 진우선에게 중요한 용건을 꺼냈다.

“우선아. 네가 가게 된 곳은 만상각의 백무원이더구나. 혹시 들어 본 적 있느냐?”

“만상각은 들어봤지만, 백무원은 처음 듣습니다.”

“그렇군. 들었으니 알겠지만, 만상각은 천하의 온갖 소식이 모이는 곳으로 맹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 백무원은 그런 만상각을 지키는 방패이며, 동시에 적을 베는 검이기도 하다. 만상각의 일이 화급을 다툴 때가 많은 만큼, 백무원의 일이 쉽지 않겠지만 말이야.”

진우선이 가만히 들었다.

정리해보니 백무원은 만상각 직속의 무력이며 힘이었다. 여태 경험해본 광명각, 숭의각 등의 역할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평범한 곳은 아니군요.”

“그렇지. 그래서 능력이 출중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게 네가 뽑힌 이유일 테고. 특히나 만상각주께서 직접 너를 택하셨다고 하더구나.”

“아!”

진우선은 만상각주가 자신을 왜 뽑았는지 이해되었다.

임무의 결과만 봐도 수라객과 마라혈인을 베어 넘기고, 흑괴와 대등하게 싸웠지 않은가.

무력이 출중한 사람을 발탁해야 한다면, 진우선을 뽑을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우선이 너라면 잘 해내리라 생각한다. 나도 그렇고 당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잘 적응해보겠습니다.”

진우선의 대답에 석자풍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만상각에서 내일 아침에 인솔할 사람이 올 거라고 들었다. 호심당 앞에서 출발하면 되겠구나.”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럼 무운을 비마.”

진우선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던 석자풍이 마지막 말을 건네고 대정관을 먼저 나섰다.

홀로 남은 진우선이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일결제자들과 함께 강론을 듣던 대정관이 눈에 들어오고, 환호하는 이결제자들이 보였다.

‘내가 드디어 호심당을 마쳤구나. 이제 본격적으로 강호에 뛰어들게 되었어.’

기분이 좋은데, 생각보다 덤덤하기도 했다. 부모님을 여린 이후로 항상 바라던 것들이 이제 시작되려는 참인데도 말이다.

문득, 어렸을 적에 고서점 주인 황호에게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나중에 정무맹에 가서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울 겁니다!

그때의 모습이 떠오르자 코끝이 찡해졌다. 이제야 실감이 나는 듯했다.

그 순간, 검노야가 진우선을 격려했다.

[우선아.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잠시 후, 진우선이 대정관을 나섰을 때였다.

한 무리 속에서 자신감 있게 이야기하고 있던 천무결이 급히 대화를 마치고 진우선에게로 다가왔다.

“우선. 여기서 너를 보니 정말로 대단하긴 하다는 생각이 든다.”

“천 형.”

진우선은 천무결과 비무를 한 후, 그와 말문을 튼 상태였다. 나이는 천무결이 진우선보다 한 살 더 많았다.

“나는 현청각으로 간다. 너는 어디로 가게 됐어?”

“저는 백무원으로 갑니다.”

“오! 빡빡한 곳으로 가는군. 거긴 혼자서 임무를 해결한다고 들었거든.”

“그런가요? 그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긴, 나를 쓰러뜨린 너인데, 그 정도쯤은 충분할 테지.”

천무결의 말에 진우선이 싱긋 웃었다.

이건 그의 칭찬이기 때문이다. 그의 화법은 뭔가 이상한 듯하면서도, 그를 중심으로 보면 간단하게 알 수 있었다.

“아무튼, 건강하고 잘 지내라. 어차피 맹 내에 있으면 언젠가는 마주치겠지. 나중에 내가 한 단계 올라서면 그때 또 한 판 붙자. 연락할게.”

“알겠습니다. 또 봬요.”

“그래.”

천무결이 소식을 간단히 묻더니, 다시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그러자 곧이어 한 여인이 다가왔다.

정연서였다.

“진 공자. 진결제자가 된 걸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천 공자와 비무를 했다고 들었는데, 친해졌나 보네요.”

정연서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천무결을 아는 이결제자라면 당연히 갖는 의문이었다.

“다소 별나긴 하지만, 해코지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정연서가 톡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화사한 아름다움이 잠깐 번졌다.

“맞아요. 알고 나면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죠.”

정연서도 천무결에 대해 맞장구쳤다. 그러더니 진우선에게 궁금했던 본심을 꺼냈다.

“진 공자, 예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그거 알아요?”

“제가요? 어떻게요?”

정연서의 물음에 진우선이 되물었다.

예전과 달라지긴 했을 텐데, 어떤 것을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 정연서가 설명을 덧붙였다.

“예전에는 나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고, 잔잔한 호수를 마주하는 느낌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연서는 자신의 느낌을 형용키 어려워 잠시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내음이 나다가 호수를 보는 것도 같고, 뜨겁다가도 꼿꼿이 선 암벽에서 바람을 맞는 거 같아요. 진 공자가 대자연 속에 있는 걸까요? 어찌 사람이 자연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을까요?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정연서가 몇 번이나 고개를 까딱이며 횡설수설 말했다.

얼마나 놀라면 이럴까?

지금 그녀에게선 평소의 이지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

어쨌거나, 진우선은 정연서의 말 뜻을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정연서는 진우선이 목기를 수련할 때만 몇 번 대화했고, 그 후에는 마주친 적이 없었다.

지금은 오행진기를 완성하여 광륜을 이루었으니, 그 사이의 괴리감이 상당하리라.

하지만 정연서가 어떻게 오행진기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허허. 참 특별하구나. 본질을 느낄 수 있다니.]

‘스승님 말씀을 듣고 보니 딱 그렇습니다. 마치 오행진기의 향기를 느낀 것 같습니다.’

만총과 우문혁을 비롯해 많은 이들은 진우선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정도였다. 이처럼 세세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검노야의 말처럼 정연서가 특별한 게 틀림없었다.

“제가 크게 달라져서 그런 거 같습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 역시!”

진우선의 말에 정연서가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됐는지도 곧장 깨달았다.

“진 공자, 대성하신 걸 정말 축하 드려요.”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고마워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 소저는 어디로 가십니까?”

“진양각으로 가게 됐어요. 진 공자는 백무원이라면서요? 그러고 보니 이결제자 중에서도 만상각에 가는 제자가 한 명 있던 거 같은데…….”

정연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예설이었던 거 같아요. 사예설.”

“아! 감사합니다. 저 혼자만은 아니었네요.”

진우선의 말에 정연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무운을 빌어요.”

“감사합니다. 정 소저에게도 무운을 빕니다.”

진우선이 정연서와 대화를 마친 후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한 번 마주쳤던 제갈영이나 서호처럼 흘깃흘깃 쳐다보는 사람은 있어도, 직접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걸어가던 중.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진우선이 그쪽을 휙 살폈다.

연녹빛의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이 방금 전까지 향했던 거 같은데, 어느새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분인 것 같은데…… 누구지?’

하지만 그녀는 진우선이 잠시 쳐다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으니 잠시 헷갈렸었나 보군.’

진우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숙소로 향했다.

***

다음 날 아침.

호심당 앞에 서로 이름을 모르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진우선이었다.

다른 한 명은 이결제자인 어떤 여인이었다.

‘그분이 맞구나!’

오늘은 남색 옷을 입었으나, 딱 봐도 어제 잠시 신경 쓰였던 연녹빛 옷의 여인이었다.

그때 여인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진우선이라고 들었어요. 나는 사예설이에요.”

“아,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사예설, 그녀는 정연서가 언급했던 사람이었다.

그 순간, 호심당 내에서 나오던 한 사내도 덩달아 인사해왔다.

“서로 인사하던 참이군. 반갑다. 나는 이능운이라고 한다. 만상각에서 백무원주를 맡고 있지.”

“처음 뵙겠습니다. 진우선입니다.”

“사예설이에요.”

다소 냉소적으로 보이는 사내 이능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미 들었겠지만 우선이는 백무원 소속이고, 예설이는 백혜원 소속이다. 그럼 바로 가자. 궁금한 건 가면서 대답해주지.”

이능운이 두 사람을 이끌었다.

백무원주 이능운.

진우선이 그의 모습을 기억에 새겼다.

이제 백무원 소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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