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진결제자 (1)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호심당은 임무를 떠났던 제자들 상당수가 복귀하며 활기를 찾았다.
그들은 임무 간에 느꼈던 경험을 기억에 새기고, 부족했던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여름처럼 열정을 다해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우선도 마찬가지였다.
날마다 독행관 연공실에 들어가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보여주신 선무와 제가 펼치는 선무가 펼칠수록 달라집니다. 구결은 같은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선기의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너의 선무가 틀린 것이 아니다.]
검노야가 엄정하게 대답했다.
선도의 길은 검노야 역시 평생을 매달려왔으나 끝을 보지 못했기에, 말 하나 전하는 것에도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웠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라. 내가 펼친 선무 하나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선도에서 멀어질 수도 있음을 명심했으면 하는 구나.]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검노야의 말을 곱씹으며 기억했다.
도를 도라 하는 순간 도가 아니니, 어떤 형식에 가둬버리는 순간 도는 참되지 않다는 뜻이리라.
또한,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이름으로 존재를 국한하니, 이름은 존재의 본질을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검노야가 자신이 펼친 선무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는 진심이 거기에 있었다.
진우선이 선무에 얽매여서, 진정한 선도를 깨닫지 못할까봐 우려하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그저 선무라고만 부르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선도로 향하는 깨달음들을 포용하되 구별 짓고자 하니, 이름 속에서 의미가 제한되지 않도록 그렇게 부르셨군요.’
[허허. 맞다. 그렇게 생각했지.]
검노야가 웃음을 흘렸다. 진우선의 통찰력에 절로 감탄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선의 생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승님의 선무를 선무(仙舞)라 하고, 제가 펼치는 건 금선무(金仙舞)라고 부르며 이름을 달리 해야겠습니다. 그러면 펼칠수록 달라져도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우선이 복잡한 문제에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금선무라는 이름도 특별하게 지은 게 아니라, 단순히 금빛 광채가 더해졌기 때문에 나온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금선무를 포용하되 구별짓고자 했던 검노야의 의도와도 부합하는 이름이었다.
[그렇구나. 좋은 생각이다. 금선무라…… 괜찮구나.]
존재가 달라지니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저 본질, 즉 선도로 나아가고 있는지만 살피면 될 일이었다.
진우선이 불안감을 훌훌 날려버리며 다시 검을 들었다.
이제 금선무가 흐르는 대로, 구결을 놓치지 않고 가면 된다.
후욱-.
광륜검이 휘둘러지자 선기를 머금은 바람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뜻이 일자 검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렀다. 금선무를 펼치며 마음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왠지 기분이 좋다.’
진우선은 지금 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어찌 보면 금선무는 자신만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미완성의 금선무를 궁구하기 시작했다.
***
며칠 후.
진우선이 독행관을 나온 밤이었다.
석자풍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당주님.”
“오랜만이군.”
“네, 오랜만입니다.”
석자풍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진우선을 마주했다.
둘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
“봄에도 여기서 너를 만났었는데, 벌써 가을이 다 지나가고 있군. 시간이 참 빨라.”
“그렇네요.”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네. 처음엔 자네의 실력이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 해를 지나고 보니 과장된 적이 없었어. 오히려 매사에 열심히 수련하며 한 번도 과시하지 않았지.”
“아!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수련하는 게 즐겁다 보니 매진했을 뿐입니다. 그 말씀은 과찬이십니다.”
“그런가? 아무튼, 무공 자체를 즐거워하는 게 다 느껴졌다네. 좋은 모습이지.”
석자풍이 진심을 전하며 그간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이제 와 보니 진우선은 행동이 올바르고, 순수한 열정으로 무공을 대하는 제자였다.
“이번에 흑괴와 막상막하의 실력을 보였다더군. 마라혈인도 단숨에 제압했고 말이야. 특히 엄소백 대주님은 자네의 항마공이 매우 강력하여 흑괴도 쩔쩔맸다고 하셨네. 정말 대단한 실력이야.”
“감사합니다.”
석자풍의 칭찬에 진우선이 슬쩍 웃었다.
“사실 흑백노괴는 천마교에서 상당한 지위와 실력을 갖추고 있어, 나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네. 그래서 자네가 너무나 궁금해. 계속 호심당에서 지켜보고 싶고.”
석자풍의 이야기가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당주님께서는 자네를 맹으로 보내기로 하셨네. 십오행을 마쳤을 때 결정하셨지. 호심당에서 더 배울 게 없다고 하시면서.”
“아!”
진우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흘렸다.
원래 호심당의 제자들은 이 년을 수학하고 난 뒤에 정무맹으로 가는 게 방침이었다.
일 년 만에 호심당을 마치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 규칙이 존재하는지조차도 금시초문이었다.
“그래서 맹에 정식으로 안건이 올라갔고, 어제 통과되었다네.”
석자풍이 오늘 방문한 까닭이 바로 이 사실을 알리는 데 있었다.
“축하하네. 자네는 호심당 역사상 처음으로 일 년 만에 수련을 마친 진결제자(進結弟子)가 되었네. 참고로 진결제자라는 신분도 자네 덕분에 이번에 생겼지.”
“진결제자요?”
“일결제자, 이결제자의 시절을 빠르게 올랐으니, 진결이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나한테 하지 말고, 후에 당주님께 직접 하면 좋아하실 것이네.”
“알겠습니다.”
진결제자라는 신분을 만들어 진우선이 호심당을 마치게 한 데에는 호연강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석자풍은 그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래도 정식으로 마치는 건, 이결제자들과 함께 하게 되겠지. 이제 한 달 정도 남았군.”
“한 달이군요.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자네가 어디로 가게 될지는 그때 알려주겠네. 아직 조율할 게 남아 있어.”
“네.”
석자풍은 이후 진우선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더니, 대화를 마쳤다.
“그럼 이만 가 보겠네. 앞으로도 무운을 비네.”
***
석자풍과 대화를 하고서 사흘이 흘렀다. 그날 만총이 임무를 마치고 호심당에 복귀했다.
진우선은 다음 날 아침에 만총의 숙소로 찾아갔다.
“총아. 잘 다녀왔어?”
“어. 어제부로 완전히 끝났다. 너는 일찍 와 있었네?”
“우리는 보름 정도 만에 끝났거든.”
“그럼 아마도 제일 빨랐겠군. 나는 사도련 환사문(幻邪門)을 상대하느라 쉽지 않았다. 얼마나 감쪽 같이 흔적을 지우고 달아나는지, 추적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
“진짜 수고 많았네. 네 목소리만 들어도 고생한 게 확 느껴진다.”
“다 고생했지, 뭐.”
진우선의 격려에 만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의 성격다운 반응이었다.
“그보다 우선아.”
만총이 진우선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너 이번에 진결제자가 되어 맹에 바로 간다며? 축하한다.”
“하하. 들었어?”
“그래. 어제 오자마자 소문이 들리더라. 다들 신기해했지. 근데 진결제자라는 게 있었어? 처음 들었다.”
“석 부당주님이 이번에 생겼다고 하시더라.”
“역시. 네가 만든 거나 다름없군.”
석자풍에게 들은 지 사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호심당에 벌써 소문이 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만총의 말에 진우선이 멋쩍게 웃었다.
“하핫. 그게 그렇게 되나?”
“그렇지. 다들 이견이 없어. 이번 임무에서 흑괴를 물리쳤다며. 그럼 그냥 인정할 수밖에 없지.”
만총의 설명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괴와 싸운 것까지 알려진 거면, 석자풍이 전해준 내용이 얼추 다 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총이 진우선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지난봄에 호심당에 온 뒤로, 네가 이렇게 먼저 찾아온 게 오늘이 처음인데. 너 무슨 일 있어?”
“헛? 내가 그랬어?”
진우선이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내게 벗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떠올려보니, 네 얼굴이 생각나더라고.”
“아! 그걸 이제 알았어?”
만총이 피식 웃었다.
진우선은 이 순간이 참으로 정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심당에 오기 전 청운무관에 있을 땐, 만총의 청풍재에 찾아가 즐겁게 대화하지 않았던가.
진우선은 새삼 만총과 편안함을 느끼는 이 순간이 즐거웠다.
운철산과 철우인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었을 테지.
진우선은 그들의 모습에서 느낀 게 많았다. 그래서 만총의 복귀를 기다리고, 도착하자마자 직접 찾아온 상황이었다.
“혁이는 아직 안 왔더라.”
“많이 늦네. 내가 거의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엄청 힘든 임무를 맡았나 보군.”
우문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진우선은 운철산과 철우인의 마지막 순간을 직접 보고 겪었기 때문인지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석 부당주님이 따로 언급하신 건 없지?”
“별말씀은 없으셨어.”
“그러면 그저 임무가 길어지는 거겠네. 나보다 조금 더 늦는 거겠지.”
만총이 차분하게 결론 내렸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진우선도 첫 임무 때 연속임무를 맡아서 늦게 복귀했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문혁은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긴 임무를 맡은 모양이었다.
그때, 만총이 조심스럽게 진우선을 불렀다.
“우선아.”
“어.”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
“내 무공을 한 번 봐줄 수 있겠어? 호심당을 떠나기 전에 언제든.”
“그건 지금도 바로 가능해. 어때?”
만총이 진지하게 묻자 진우선이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바로 준비할 태세였다.
“그러면 더 좋지.”
만총의 눈이 열정적으로 빛났다.
잠시 후.
호심당의 어느 인적 없는 연무장에서, 진우선이 사방을 한 번 살피며 준비하는 만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 우문혁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총이도 창궁관을 간절히 바라면서 준비하고 있을 거요.
수련에 어려움을 겪던 만총이 춘추관에서는 답을 얻지 못해, 창궁관에 들어가기를 기대한다고 했었다.
‘창궁관에서 잘 해결됐을까?’
진우선이 그걸 궁금해 하고 있을 때, 준비를 마친 만총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우선아. 이제 시작할게.”
“알았어. 근데 비무가 아니어도 괜찮겠어? 내가 창법에는 조예가 깊지 않아.”
“괜찮아. 네 안목으로 내 초식들의 흐름을 한 번 살펴봐 줘. 그거면 된다.”
만총이 피식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자세를 잡았다.
꽉 잡은 묵창에 강렬한 기운이 어리더니.
퍼억-!
허공을 크게 꿰뚫으며 창술이 시작되었다.
창은 시종일관 강맹했다.
창대에 어린 기운에서 저릿함이 느껴지는데, 만총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초식을 마구 이어나갔다.
‘스승님. 파사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렇구나. 불문의 영향을 받았던 모양이다.]
파사(破邪)는 벽사(辟邪)와 비슷하게 사기(邪氣)를 깨트리는 힘이 있었다. 다만 유래가 달라서 뿜어내는 향기에 약간 다른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예전과 꽤 달라졌어.’
지난봄에 만총과 비무를 했을 때만 해도 볼 수 없었던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아마도 새로 익힌 무공이리라.
초식을 펼치는 것에는 크게 흠잡을 게 없었다. 벌써 능숙하게 펼치는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면서 미묘하게 어색함도 느꼈다.
아무튼, 진우선이 그런 만총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며 심도 있게 살폈다.
그렇게 일 각 정도 지나고 나서야 만총의 무공이 끝났다.
“우선아. 어떻게 느꼈어? 가감 없이 말해줘.”
“그래? 그렇다면, 너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진우선이 자신의 감상을 솔직하게 전하자, 만총이 귀 기울여 들었다.
파사의 힘과 능숙함과 약간의 이질감.
진우선이 말하는 바에서 그것들이 핵심이었는데, 이는 충분히 예상한 범주였다.
다행이었다.
사실 만총은 만금전장에서 뇌정일기신공(雷靈一氣神功)을 본 뒤, 그 강렬한 매력에 빠져 무공에 입문했다.
그 후 뇌정일기신공을 효율적으로 펼치기 위해 벽력신창 탁무위를 초빙하여 혼원벽력창을 배웠다. 혼원벽력창은 예상대로 뇌정일기신공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초빙하여 배우다 보니 모든 걸 가르침 받지 못했고, 최근에는 답보 상태였다.
그러던 중 창궁관에 갔을 때 불문의 한 속가지파에서 유래된 낙뢰창법(落雷槍法) 도해(圖解)를 얻었다.
뇌정일기신공과 통하는 면이 있는 데다가, 도해가 있어 수련이 어렵지 않아 좋았다.
그리고 진우선에게 검증 받아보니, 예상했던 대로 무공이 조화롭게 안착하고 있었다.
“듣고 나니 머릿속이 명확해졌다. 다행이야. 우려했던 것보다 잘 녹여낸 거 같다.”
“그럼 다행이네. 나쁘지 않았어. 창궁관에서 좋은 인연을 얻었구나.”
“어. 혼원벽력창의 수련이 어려웠던 찰나에, 창궁관에서 낙뢰 법을 얻었어. 도해가 있어서 그런지 할 만하더라고. 그 덕에 막혔던 수련에 진전을 본 거 같다.”
“정말 축하한다.”
“고맙다.”
만총과 진우선이 흐뭇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