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인과 연 (3)
후욱-!
검노야의 현월검에서 무거운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신비로운 힘이 번져나갔다.
독행관 연공실의 널찍한 공간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채워지고 있었다.
‘광영무와는 완전 다르다!’
진우선이 검노야의 모습을 눈에 새기며 생각했다.
광영무는 강렬한 빛을 뿌리며 천지간의 이치인 빛과 그림자를 담아낸, 우아하면서도 강력한 무공이다. 가히 상승 무공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검노야가 보여주는 무공은 그렇지 않았다.
이 무공은 공수에 빈틈이 없거나 무학의 이치가 깊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일반적인 이치를 벗어나면서 탈속의 분위기를 풍기니, 난해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위력이 있었다. 보편적인 무공들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신비로운 위엄이 서려 있었다.
화아악-!
신묘한 기운이 다시 한 번 몰아쳤다.
그 기운이 진우선의 온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오감이 새롭게 열리고, 단전 속 오행진기가 온몸을 휘돌며 어디론가 나아가고 싶어 했다.
‘뭐지?’
심령이 육체를 벗어나며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세상의 것들을 초월하는 느낌이다.
천지간에 이런 기운이 있었을까.
‘……어쩌면!’
그때 머릿속에 번뜩이는 한 줄기 생각이 있었다.
검선 창궁자.
진우선은 검노야에게서 여태껏 검(劍)을 배웠으니, 이제는 선(仙)의 차례일 수 있었다.
선기(仙氣).
그리고 선기의 무공.
직감적으로 확신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한 초식이 끝난다고 느껴졌을 때, 돌연 검노야가 무공을 멈추었다.
[우선아. 네 짐작이 정확하다.]
‘스승님!’
초식을 마쳤을 뿐, 무공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아닌가.
하지만 검노야는 다 마쳤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우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 펼친 선무는 여기서 끝이구나. 나는 이 다음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끝이되 끝이 나지 않았지.]
“아-!”
진우선의 입에서 아쉬움이 짙게 밴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공이 무르익었다 싶을 때 끝나니 만족스럽지 못했다. 게다가 검노야의 음성에서 전해지는 허허로움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허허. 나는 괜찮다. 이걸 완성하는 게 내 평생의 숙원이었는데, 숙 원이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느냐? 오히려 목표가 있어 인생을 나아갈 수 있었으니, 나에게는 충분하구나.]
‘진심이시군요!’
[그렇지.]
진우선이 검노야의 마음을 이해했다.
검노야는 아마도 선무를 수련하는 자체만으로도 만족했으리라.
여태껏 함께 해왔고, 조문신의 기록을 통해 알게 된 검노야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그런 검노야가 물었다.
[우선아. 너는 선무를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스승님의 선무가 끝나기 직전에 천지를 초월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선기는 어떻게 느꼈느냐?]
‘육신과 심령을 새롭게 일깨우는 듯했습니다.’
검노야가 진우선의 답변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선무를 익힐 수 있는지 기본이 되는 질문이었다.
[잘 느꼈구나, 우선아. 너도 이미 깨닫고 있겠지만, 네 육신과 심령과 오행진기가 선기에 감응했으니 이미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음이니라.]
검노야가 인자한 눈으로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보다 더 깊고 그윽한 그의 눈에 진우선이 아로새겨졌다.
[이제 네가 펼치는 선무를 보고 싶구나. 구결을 전할 테니, 한 번 펼쳐보겠느냐?]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비장하게 대답했다.
검노야가 가르침을 전하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그의 말과 눈빛 하나하나에서 묘하게도 슬픔이 느껴졌다.
마치 떠날 사람 같았다.
하지만 검노야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진우선에게 구결만 전수했다.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진우선도 검을 잡았다.
스릉-!
무언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광륜검이 맑은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진우선이 담담히 검을 휘둘렀다.
검 끝에서 선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진우선의 선기는 검노야와 달리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광륜을 이룬 오행진기가 온몸을 휘돌며 선기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그렇게 육신과 심령과 오행진기가 예상했던 대로 함께 어우러지던 중.
금빛 기운이 솟아나더니 힘을 더하기 시작했다. 패왕금룡신공의 선천지기였다.
[허허! 놀랍구나.]
생각지 못한 현상에 검노야가 놀람을 터뜨렸다.
선무도 동공이라, 구결과 초식의 흐름을 따라 선기가 저절로 일어난다. 다만 선기의 바탕이 될 오행진기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런데 패왕금룡신공이 진우선에게 이어져 있었기에, 선천지기가 선무를 돕고 있었다.
선천지기는 순수한 하늘의 기운이라 그 자체만으로도 선기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었다.
즉, 광륜을 이룬 오행진기에 부족할 게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더 낫기도 했다.
[잘한 일이었구나.]
검노야가 속으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환히 웃었다.
그러면서 선무를 펼치고 있는 진우선에게 말을 전했다.
[우선아. 나는 어려서부터 검을 좋아했다. 어느 이름 없는 도관에서 검을 잡으며 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운이 좋게도 마흔에 도를 깨달았지. 그때 느낀 바를 담아 광영무를 보게 되었다. 나는 홀로 수련하며 살아왔기에 현월을 이루게 되더구나.]
‘……!’
진우선은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지극히 차분한 검노야의 음성을 들었다.
[도를 하나 이루고 나니, 나아갈 길이 보였다. 그래서 하산하여 천하를 둘러보며 깨달음을 나누기 시작했고, 마음이 통하는 친우 조문신을 만나 천하를 이롭게 하는 걸 생각했다. 그때 우리는 참 뜨거웠었지.]
그 시절을 회고하는 검노야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한데 하늘의 이치가 신기하여 깨달음을 나누니, 오히려 깨달음이 더해지더구나. 검을 통해 지극한 도를 깨닫고 세상을 경험하여 다시 깨달음을 더하니, 오십이 되어서야 선도(仙道)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강호에서 검노야를 검선이라 부른 것이 이때쯤일 듯했다.
[하지만 세상을 경험했으되 잘 어울리지는 못했던 탓인지, 선도의 끝은 허락되지 않더구나. 선무를 시작했으나 끝은 보지 못했다. 또한, 천마와 사황을 쓰러뜨렸으나 회복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내게는 더 이상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더구나.]
결국 검선 창궁자의 삶은 반선(半仙)의 경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우선아. 어쩌면 나는 네게 너무 큰 숙원을 물려주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내 하나뿐인 제자이니, 너에게는 전하고 싶었다.]
검노야가 어렵게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그러자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영혼의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기까지 수없이 망설였는데, 인제 보니 왜 그랬는지 허탈할 정도였다.
그때, 진우선이 당혹한 음성으로 말했다.
‘스승님. 제 검이 스승님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게 아니야. 나와는 다르지만 틀리지 않았어. 네 뜻이 이끄는 대로 계속 가봤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진우선의 선무는 어느 순간부터 원형과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틀리지 않았다. 잘못되지 않았다.
진우선의 선무에서 느껴지는 선기가 흐트러지거나 그릇됨이 없으니, 지금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이었다.
[허허.]
검노야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던 중, 진우선이 미완성인 선무의 마지막 초식에 접어들었을 때!
[……!]
검노야가 눈을 부릅떴다.
진우선의 검초가 원형과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옅은 금빛의 선기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으니 틀렸다 할 수는 없겠으나, 전혀 생각지 못했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야?]
검노야가 속으로 놀람을 삼켰다.
진우선의 검이 다음 초식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선무의 완성에 다가갈 새로운 조각이었다.
그 한 초식을 다 펼쳐낸 진우선이 선무를 멈추며, 고개를 갸웃했다.
‘스승님. 마지막 두 초식은 너무 달랐지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제 뜻에 따라 펼쳐보긴 했는데, 잘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훌륭했다. 정말 잘했어.]
‘그럼 제가 한 게 맞습니까?’
[그래. 너에게 딱 맞는구나.]
검노야가 진우선의 질문에 확신 있게 대답해주었다. 그러더니 환한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허허허허.]
얼굴이 홀가분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나조차도 매여 있었어!]
검노야는 진우선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비우고 나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에 진우선이 어렵게 웃었다.
선도의 끝이 허락되지 않았던 검노야에게 깨달음이 찾아왔으니, 우화등선만이 남았을 터였다.
독행관에 올 때부터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그 순간이 코앞에 닥치자 막막한 마음이 먼저 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온갖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검노야는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무공만이 아니라 인생까지 이끌어준 진정한 스승님이었다.
‘감축드립니다.’
진우선이 어색하게 웃으며 마음을 전했다.
그렇다고 검노야의 깨달음을 훼방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이었을까.
제자로서 해야 할 건 방해가 아니라 경축이었다.
그런데, 검노야의 말은 예상과 달랐다.
[우선아. 느끼고 있었구나. 사실 나는 선무를 네게 전함으로써 떠나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방금 깨달았다.]
‘아…… 그렇다면…….’
[허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지. 나야말로 답보 상태였어. 너를 가르치며 나를 알아갔을 뿐인데, 나를 다 알게 된 순간부터 끝을 생각하고 있었어. 아직 떠날 때가 아니거늘.]
‘…….’
진우선이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사이, 검노야가 허심탄회하게 결론을 말했다.
[비워야만 깨달을 수 있었으니, 살아서 하지 못했구나. 이렇게야 깨달았어…… 허허허!]
“아-!”
진우선이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
그날 밤.
곤히 잠든 진우선을 뒤로하고, 검노야가 창궁관 지붕 위에 올라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허허허. 검노야로 있는 동안 옛 기억이 없어, 옛 성정도 잊었었구나. 그래서 현월을 전하지 않을 수 있었고, 마음을 비워낼 수 있었어.]
검노야가 자신을 성찰했다.
낮에 크게 깨닫고 난 후, 자신의 삶을 꿰뚫듯이 돌아보았다.
지금 주어진 검노야로서의 상황이 아니었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으리라.
[허허허. 천하가 정말 넓디넓구나. 내 천명이 가야 할 길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고 있어.]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살아서 선도를 깨닫고 싶었으나 결국 이루지 못했는데, 죽어서야 깨닫고 있으니 궤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검노야는 지금 뛸 듯이 기뻤다.
바로 그때였다.
고오오오-
바람이 스산하게 사방에서 불어온다.
어디선가 비구름이 순식간에 몰려오기 시작하고, 갑작스럽게 광풍도 몰아쳤다.
우르르-콰쾅-!
비가 내리면서 천둥번개가 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검노야는 날벼락이 자신에게 향한 것일지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기가 번쩍이는 눈으로 하늘의 기운을 계속 살폈다.
그러던 중, 검노야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 혼천(混天)이구나. 역천(逆天)의 기운이 하늘의 눈을 가려 사마(邪魔)가 창궐하고 있었어!]
천기를 헤아리는 검노야의 눈에 극사(極邪)와 극마(極魔)의 기운이 미쳐 날뛰는 게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역천만이 아니라, 혼돈(混池)의 기운마저도 태동하고 있었구나. 허허…….]
대환란의 시대가 닥쳐오고 있었단 말인가.
천기가 너무나 어지러웠다.
검노야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안타까웠다.
[그랬구나, 그랬어! 그래서 내가…….]
검노야가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천명도 깨달았다.
정(正).
자신이 한 것은 천하를 바로 세울 가치를 깨우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