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89화 (89/225)

089.

#인과 연 (2)

호남성 장사, 정무맹.

마사에 마차를 세워둔 뒤 정문을 통과한 세 사람이 걸음을 멈춰 섰다.

“진 소협, 염 소협, 두 분 다 그동안 수고 많았소.”

“부대주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운철산의 말에 진우선과 염지광이 대답했다.

세 사람은 보고와 복귀의 목적으로 무의대에서 정무맹까지 동행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각자의 얼굴에는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아쉬움도 묻어나왔다.

“막상 헤어지려니 아쉽군.”

“만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운철산의 말에서 여운을 느낀 진우선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보름 전쯤 흥안의 장원에서 무의대 인솔자로 온 운철산의 모습은 너무나 사납고 무서워 보였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차갑고 무뚝뚝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대화와 감정을 나누는 동료였다.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

이런 걸 보면 인연이란 건 참 신기했다.

“그래도 각자 갈 길 가야지 어쩌겠나. 나부터 이만 가야겠군.”

운철산이 멋쩍은지 얼른 상황을 마무리하는 말을 던졌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다음에 또 연이 닿으면 또 보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저도 무운을 빕니다. 살펴 가십시오.”

운철산이 진우선과 염지광의 인사를 받으며 숭의각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황산 가는 길은 이제 시작이었다.

***

호심당주의 집무실이 오래간만에 북적거리고 있었다. 호연강이 부당주들을 부른 까닭이었다.

사실 한동안 호심당은 꽤 한산했다. 치열하게 수련하며 열정을 뿜어내던 일결제자와 이결제자 대부분이 임무를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제 두 명의 제자가 돌아왔다. 복귀의 시작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이 가져온 소식으로 지금 호심당 수뇌부가 모여 있었다.

“부당주들도 보고서를 봐서 알겠지만, 우선이가 이번에도 큰 활약을 보였다고 하오.”

호연강이 운을 떼자 부당주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감상을 꺼냈다.

“두 제자 모두 임무를 잘 치르고 왔는데, 특히 우선이는 지난 임무에 이어 이번에도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저보다 낫군요.”

일결제자를 담당하는 석자풍이 호평을 늘어놓자, 청운무관에서 진우선을 데려왔던 유청인이 짤막하지만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을 덧붙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상당히 격한 어조로 불만을 토로했다.

“당주님. 저는 아직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마라혈인을 단숨에 제압하고, 무의대의 마라혈독을 해소하고, 구유마라종의 흑괴와 막상막하의 일전을 치렀다니요. 과장이 섞여 있지 않고서야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결제자를 맡은 부당주 엄초양은 당최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진우선이 마기독이라 알려졌던 마라혈독을 해소한 것에 대해서는 그래도 이전에 보여준 상황과 비슷하여 수긍하기로 했다.

하지만 흑괴와 공방을 벌이다가 벌이고, 끝내 패퇴시켰다는 말은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쓴 무의대 엄소백 대주는 이전에 구유칠괴 중 색괴의 목을 벤 사람이지. 그만큼 뛰어난 실력의 무인이 직접 보고 작성했다네. 자네가 그걸 못 믿는 건 좀 아쉽군.”

호연강이 고개를 갸웃하며 엄초양에게 의문을 드러냈다.

그러자 엄초양이 강하게 부정했다.

“제가 왜 엄 대주를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충분히 믿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흑백노괴의 흑괴입니다. 구유칠괴가 언행이 괴팍하여 구설에 자주 오른다지만, 그래도 혈독쌍괴와 흑백노괴는 음마삼괴 따위와는 천양지차의 실력을 갖췄습니다.”

석자풍은 슬그머니 올라오는 노기를 자제하며 엄초양에게 반박했다.

“엄소백 대주님이 쓰신 보고서라지 않습니까. 그분이 흑괴의 무공을 허투루 보셨겠습니까?”

“물론 석 부당주의 생각도 알겠으나, 흑백쌍괴 중 한 사람과 격전을 치른다면 나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어. 그런데 고작 일결제자가 가능할까?”

“고작 일결제자가 아닙니다. 엄 부당주님께서는 저희 십오행의 결과를 들으셨지요? 우선이는 다른 모든 일결제자들이 달라붙어도 상대할 수 없는 고수입니다.”

은연중에 진우선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엄초양에게, 석자풍이 시비 걸듯이 말을 이었다.

“아니, 우선이는 지금 호심당에서 비교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봅니다. 이결제자 중에 누가 흑괴와 동수를 이루겠습니까?”

“말이 심하잖아! 호심당 부당주라는 사람이 함부로 이결제자를 그렇게 무시해도 돼? 게다가 정확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말이야.”

엄초양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그는 무언가 이 상황에 대한 압박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호연강이 그걸 알아챘다.

“두 사람 다 그만하게.”

“당주님!”

“알겠습니다.”

엄초양과 석자풍이 다소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호연강이 명명백백히 답을 내렸다.

“엄 부당주. 나는 무의대주의 보고서가 과장되지 않았다고 보네. 그가 자신의 실책을 드러내면서까지 이렇게 과장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러니 우선이의 실적을 의심하지 말게.”

“당주님, 그렇지만…….”

“그리고 우리가 일결제자와 이결제자 중에서 누가 낫고 아니고를 따질 필요 있나? 제자라면 누가 되었든 뛰어난 실력을 갖추어 협의를 펼치는 게 중요한 건데 말이야.”

“그건 맞습니다.”

호연강은 엄초양이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엄초양의 의견은 반론을 가장한 불평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호연강은 자신의 의견을 다 밝힌 후, 무엇이 불만인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엄 부당주.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나? 자네의 생각을 말해보게.”

“네, 그러죠. 저도 당주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보고서가 있다면, 당주님께서 계획하셨던 대로 진우선이 이번에 호심당을 마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요.”

엄초양이 퉁명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이결제자들은 지난여름부터 오당오각과 긴밀하게 상의하며 진로를 결정짓고 있었습니다. 곳곳마다 뛰어난 무인들이 있어서 그 과정이 쉽지 않았으나, 어렵게 완수해냈습니다.”

괜히 석자풍을 한 차례 노려본 엄초양이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실력과 실적이 매우 뛰어나다고는 하나, 이런 식으로 어디론가 가게 된다면, 그건 곧 누군가의 자리를 가져가게 되는 셈이 아닙니까. 그러면 이결제자들을 살피며 준비해온 시간이 무색해질 것입니다.”

“허허. 자네는 별걱정을 다 하고 있었군.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진즉에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결국 엄초양은 갑자기 나타난 진우선이 이결제자의 자리를 뺏을까 우려했던 것에 불과했다.

물론 진우선이 이결제자보다 나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테지만, 그건 열등감일 뿐이었다.

두 가지 이유 모두 호연강의 생각을 막을 충분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엄초양의 긴 불평을 호연강이 웃으며 받아냈다.

“우선이가 갈 곳은 이미 정해진 자리가 아니라, 따로 준비하셨다고 들었네. 때마침 뛰어난 인재가 필요했다고 하시더군.”

“오당오각에 인재들이 즐비한데, 그게 가능합니까? 대체 누가…….”

“만상각주님께서 확답을 주셨다네.”

“……설마!”

엄초양이 화들짝 놀랐다.

만상각주의 확답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챈 까닭이었다.

만상각은 천하의 모든 정보를 다루는 곳이기에, 그만큼 급박하고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정무맹에 중요하지 않은 기관이 어디 있겠냐만, 만상각만큼 한 사람에게 많은 능력을 요구하는 곳도 없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만상각은 기피의 대상이었다. 한데 만상각이라니.

“설마가 맞을 거네. 각주님이 우선이에 대해 들으시더니 백무원(百武院)에서 실력을 발휘하면 좋겠다고 하시더군.”

엄초양이 보고서에 다시 눈을 돌렸다.

이 보고서가 정식으로 올라간다면, 진우선이 백무원으로 가는 건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나도 동의했다네. 우선이가 얼마나 잘 해낼지 기대가 돼.”

호연강이 신뢰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석자풍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진우선은 정문 근처에 있는 태화관(太和館)에 와 있었다.

어제 정무맹에 복귀하면서 본 삼 층 건물로, 오가는 무인들이 차와 다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장소였다.

진우선은 삼층 창가의 구석진 곳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운 부대주님은 지금쯤 황산으로 잘 가고 계시겠지.’

진우선은 태화관으로 오던 중에 마사에 들렀었다. 운철산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면, 잠시 이야기라도 나눌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착해서 알게 된 사실은 그 마차가 아침 일찍 출발했다는 것뿐이었다.

“…….”

진우선이 멍하니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사흘 전에 운철산이 조용히 부탁했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진 소협. 우인이 했던 말은 비밀로 해주시오. 진 소협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으나, 그래도 조심하셔야 하오.

철혈객의 말.

그건 바로 철가장의 멸문에 대한 비사였다.

그는 분명 철가장이 천마교와 결탁했다는 누명을 썼다고 했다. 다름 아닌 정무맹에 의해서.

철가장은 정무맹이 시작될 때부터 백 년간 함께해온 우방이었다.

‘만약 철혈객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무맹이 왜 그랬을까?’

흑괴가 덤벼오던 순간에는 싸우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깊이 생각할 수 없었으나, 근래에 계속 생각해볼수록 의문만 깊어졌다.

만약 운철산을 만날 수 있었다면, 진우선은 그 점에 대해 더 물어볼 심산이었다. 그가 아니면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으니까.

하지만 불현듯 꼭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스승님.’

[우선아. 생각이 많은 모양이구나.]

검노야의 인자한 얼굴을 보자 진우선은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진즉에 스승님이 계신 걸 떠올렸어야 했는데.

진우선이 이야기를 꺼냈다.

‘스승님, 임무를 마치고 오면서 의문이 들어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래, 그럴 법도 하지.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하다.]

검노야가 진우선의 고민에 공감하면서 말을 이었다.

[우선이 너도 알겠지만, 철가장이 멸문한 것이 그의 말대로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런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또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사람의 모습…….’

진우선은 검노야의 그 말이 가슴에서 묘하게 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아. 너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 같으냐? 너는 어려서부터 네가 기억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지금도 창밖을 보며 정무맹에 드나드는 이들을 계속 관찰하고 있지.]

진우선이 태화관 삼층 자리에 앉은 게 벌써 한 시진이나 지난 일이었다.

검노야는 진우선이 부르지 않았어도 늘 진우선을 보고 있었다. 진우선이 어떤 마음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검노야는 다 알고 있었다.

[우선아. 네 마음속에 이미 답이 있지 않으냐?]

‘……아!’

진우선이 속으로 짧게 탄식을 흘렸다.

사람은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살며, 욕망은 종종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정무맹의 무인이라 하여도 다 한마음일 리 없었다.

‘그래도 정무맹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짧은 답변이지만, 그 음성에서 또 다른 감정이 묻어나왔다.

그 순간.

‘……!’

어떤 기억 하나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정무맹 초기에 협의지사들은 모두가 힘을 하나로 모아 강호에 드리운 암운을 걷어냈다.

그 후 정무맹을 세워 강호에 평화가 오기 시작하자, 그들은 각자의 뜻대로 행동했다.

이건 창궁관에서 보았던 초대 정무맹주 조문신의 기록이었다.

조문신이 그때 느꼈던 감정을 진우선이 읽었고, 검노야는 가슴에 새겼다.

사람의 모습은 어쩌면 그때와 똑같은 걸지도 몰랐다.

그때, 검노야가 진우선의 과한 생각을 자제시켰다.

[우선아. 일단은 살펴보자꾸나.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맞습니다. 스승님.’

검노야의 말에 진우선의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잠시 후, 차분해진 진우선에게 검노야가 물었다.

[이제 무엇을 할 참이냐?]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구나. 생각이 많으니, 몸을 움직이는 게 좋겠구나. 몸을 많이 움직일수록 상념이 사라지는 법이니.]

‘그렇지요. 그래야겠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노야의 말은 단 한 번도 옳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때, 검노야가 진지하게 말했다.

[우선아. 앞장서거라. 오늘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