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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검전-88화 (88/225)

088.

#인과 연 (1)

격전 이후, 무의대는 날마다 녹마봉을 탐색했다.

흑괴와 철혈객 무리를 물리친 뒤에는 마주친 마교도가 없었다.

“독지가 모두 다섯 곳이었군. 그곳에서 마라혈인을 만들었다는 거고.”

“맞소. 그리고 진 소협이 마라혈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소. 녹마봉에 남은 건 늪의 독기일 뿐이고.”

엄소백은 집무실에서 운철산과 함께 조사한 내용을 정리 중이었다.

“이제 녹마봉에는 마라혈인이 없을 거라는 말이군. 마라혈기를 연성하는 게 매우 어려운 거 같은데, 그나마 다행이야.”

“그런 것 같소. 철혈객은 자신이 목숨 걸고 마라혈기를 익혔다고 말했는데, 진 소협이 살펴보니 한 곳에서만 독기가 모두 흡수되었다고 했소.”

“그럼 나머지 네 곳의 독기는 심했겠군.”

“그렇소. 마기와 독기가 심해서 나와 진 소협만 다녀왔는데, 온갖 독물이 죽은 흔적도 많고 승화되지 못한 기운 때문에 주변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소.”

엄소백과 운철산은 닷새 만에 녹마봉의 실태를 거의 파악했다.

닷새라면 매우 빠른 속도다. 전적으로 마기와 독기, 그리고 마라혈기 등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진우선 덕분이었다.

“진 소협의 항마공은 정말 보면 볼수록 놀랍군. 천마교의 천적이나 다름이 없어.”

“옆에서 보고 있는데 진짜 너무나 대단해서, 당장이라도 항마공을 익히고 싶을 정도였소.”

“그렇지? 나도 탐날 때가 많았어. 근데 그 정도의 항마공은 거의 찾기 어려울 거야. 애초에 흔치도 않은데, 그 정도의 묘용이라면 신공이라 불릴 게 마땅할 테니까.”

“하긴, 그렇겠지. 천마교를 상대해본 강호인이면 누구라도 욕심내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데, 그게 보통 무공이겠소? 그동안 항마공으로 여래불심항마공의 이름을 많이 들었었는데, 어쩌면 그와 비견될 수도 있겠군.”

“그럴지도…….”

엄소백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래불심항마공과 비견되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진우선의 항마공이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

여래불심항마공은 소문만 무성하여 확신할 수 없으나, 진우선은 흑살마장의 공력을 허공에서 소멸시키지 않았던가.

그동안 보고 들어온 강호의 어떤 항마공도 진우선의 항마공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다.

그때 운철산이 엄소백의 상념을 깼다.

“대주님. 아무튼, 진 소협과 함께 돌아보니, 천혜의 독지여서 없애기가 쉽지 않아 보였소. 거의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늪이라 어찌할 방도가 없소.”

“맞아. 나도 그래서 후에 그들이 다시 사용할 수도 있을 거 같아 걱정이야.”

“일단은 햇볕이 조금이라도 들게 방해물들을 치우긴 했소. 그 이상은 무리였고.”

“잘했어.”

엄소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운철산의 판단에 동의를 표했다. 나머지는 상부에 보고하여 대책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엄소백이 그런 점들을 숭의각주에게 올릴 책자에 상세히 써 내려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웬만큼 한 거 같다.”

잠시 후, 기록을 마친 엄소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운철산에게 말했다.

“철산아. 넌 요즘 어떠냐?”

“하하하. 나는 괜찮소.”

“괜찮기는. 표정이나 숨기고 말해라. 철가장의 비사 때문에 생각이 많지?”

“그게 티가 나오?”

“팍팍 나지. 너랑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내가 너를 모르겠냐.”

엄소백의 말에 운철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그의 거구가 작아 보였다. 엄소백이 운철산의 등을 두드려 격려하며 말을 이었다.

“이참에 휴가 다녀와. 보니까 작년부터 아예 안 갔던데, 한 번 쉬고 올 때가 됐어. 때마침 진 소협과 염 소협이 내일모레 맹으로 복귀할 테니, 그때 너도 함께 가도록 해.”

“그래도 괜찮겠소?”

“괜찮아.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대원들도 다들 다녀오는 건데. 황산까지 다녀올 거지? 보름이면 되겠어?”

“그렇다면…… 그 정도면 될 거 같소.”

운철산의 머릿속에서 보름간의 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장례까지 치르고 오자면 빠듯할 것 같긴 했지만.

하지만 운철산은 곧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각주님께 이 책자를 드리고 나서부터 보름이야. 필요하면 열흘쯤 더 있다가 와도 된다. 아니다. 아예 한 달로 하자. 이 년 만에 가는 거니까, 그 정도는 다녀와야지.”

엄소백이 통 크게 결정을 내렸다.

“대주님?”

“철산아. 나한테는 네가 정말 소중하다. 그러니 잘 다녀와.”

“……고맙소.”

운철산은 가슴이 뭉클한 걸 느끼며 희미하게 웃었다.

***

다음 날.

장원 내의 어느 작은 연무장에서 단단한 기합성이 들려왔다.

그곳에는 하루 내내 잠시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른 사람들이 있었다.

“심 대원님. 수고하셨습니다. 조금 전의 움직임이 좋았습니다. 그 감각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홍검법은 초식의 움직임이 커서 다수를 상대하기 좋습니다. 절대로 움츠러들지 않으셔야 해요.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후우… 후우웁…… 알겠습니다.”

심옥당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얼굴에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릴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색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그토록 원하던 가르침을 한없이 받고 있는 까닭이었다.

진우선이 내일 떠난다는 게 너무나 아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지금은 진우선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겨두는 게 중요했다.

“초식이 크니 내공 소모도 많으셨을 겁니다. 고생하셨어요.”

“그렇더라고요. 심법 수련을 쉼 없이 해야겠습니다.”

심옥당의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심우선이 호흡을 고르길 기다렸다가 지도하면서 쓰던 목검을 들어 올렸다.

“심 대원님. 이제 제가 비홍검법을 다르게 한 번 펼쳐 보이려고 합니다. 익숙하겠지만 조금 다를 수 있는데, 잘 기억해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심옥당이 준비를 마치자, 진우선의 검에서 비홍검법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보폭을 넓게 펼친 진우선이 연무장을 마구 누비니, 검이 허공을 확확 베어냈다. 비홍검법의 영역이 연무장 전체를 뒤덮었다.

진우선의 말마따나 동작이 큼직큼직해서 다수를 상대할 때 이만큼 유용한 무공도 없을 듯했다.

심옥당은 운철산이 왜 비홍검법을 전해줬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진우선의 검이 변화했다.

휘휘휙-!

초식이 크게 펼쳐지는데, 속도도 매우 빨랐다. 비홍검법의 묵직한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쾌검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도 한 호흡에?’

심옥당이 속으로 놀람을 삼켰다.

이미 익숙한 비홍검법이고 며칠간 고되게 수련했기에 세밀한 부분도 알아챌 수 있었는데, 진우선은 지금 한 호흡 안에서 비홍검법의 정수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

결국 심옥당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진우선의 검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여태껏 계속 속으로 감탄을 삼켜왔으나, 지금 보여주는 신위에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비홍검법(飛鴻劍法).

큰 기러기가 하늘을 누빈다.

한 자루 검에 기운이 어리니, 기러기의 힘찬 날갯짓이 천공을 진동시켰다.

그동안 꿈꿔왔던 비홍검법의 진면목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게 상승의 경지구나.’

심옥당이 홀린 듯이 진우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초라한 마음이 들었다. 이에 비하면 자신이 펼치는 비홍검법은 참새의 날갯짓에 불과할 뿐이니까.

하지만 진우선이 이렇게 대단한 시범을 보여주는 이유는 그게 아닐 것이다.

‘꾸준히 수련해서 나도 해보라는 뜻이야!’

심옥당은 진우선이 직접 비홍검법의 목표점을 세워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진우선의 미세한 움직임은 물론,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심옥당의 마음에는 진우선에 대해 존경을 넘어서서 경외가 깃들기 시작했다.

염지광도 진우선의 검무를 보고 있었다.

그도 심옥당처럼 진우선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기에, 연무장을 함께 쓰는 중이었다.

‘대단해!’

염지광은 지금 진우선의 비홍검법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임무로 수련을 못 했던 날을 제외하면, 진우선이 비홍검법을 살펴볼 수 있었던 날은 며칠 되지도 않았다.

대략 다섯 날쯤 되었을까.

그마저도 하루에 한두 사진이 전부였고.

하지만 진우선은 이미 비홍검법을 통달하여 상승의 무리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마치 몇 년을 수련해서 대성한 것처럼 능숙하고 완벽했다.

‘놓치면 안 돼!’

염지광은 진우선에게 끊임없이 감탄하면서도 사부인 황백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심옥당처럼 진우선의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뚫어지게 바라보며 모두 머릿속에 넣으려고 노력했다.

굳이 비홍검법을 익히지 않더라도, 이렇게 고수의 검을 견식하고 나면 어느 날 많은 걸 얻게 되는 까닭이었다.

잠시 후, 진우선의 시범이 끝났다.

염지광은 그 순간까지 몰입하여 바라보면서, 진우선의 검무를 마음에 아로새겼다.

곧 진우선이 심옥당과 대화를 마치고 염지광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염지광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감정을 쏟아냈다.

“진 소협! 조금 전의 검무는 정말로 엄청났소. 과연 천재는 다르구나 싶었소.”

“천재라니요.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훌륭하신 스승님을 만나서 배운 덕분입니다.”

진우선이 가볍게 손사래 쳤다.

검노야 덕분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지, 본인이 천재일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 염 형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좋았소. 특히나 내력이 검에서 유형화되었을 때부터 패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소. 비홍검법의 움직임이 크니, 위압감도 있었고.”

“그렇죠. 만약 심 대원님이 비홍검법을 대성한다면 대장군 같은 기세가 뿜어질 것 같습니다. 검법에 힘이 있거든요.”

“대장군이라…… 정말 그렇겠군.”

염지광의 말에서 선망하는 느낌이 듬뿍 담겨 있음을 알아챈 진우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염 형의 비응삼십이검(飛鷹三十二劍)이 어떤 면에서 보면 비홍검법과 비슷할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염 형은 쾌(快)에 훨씬 중점을 두셔야 검법의 힘이 배가되고…….”

진우선이 비응삼십이검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염지광이 주의 깊게 들었다.

이제 그의 차례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수련이 이어졌다.

수련의 끝은 저녁 무렵에 찾아왔다. 한 사람이 연무장을 찾아온 까닭이었다.

“진 소협. 수련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한데, 언제까지 하실 참이오?”

“마 조장님.”

이조장 마일권이 얼굴에 한가득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묻고 있었다.

그러자 심옥당이 재빨리 용건을 물었다.

“마 조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일 있지. 해가 저물어가고 있으니 저녁을 먹어야 하는 중요한 일! 진 소협과 염 소협이 내일이면 이곳을 떠날 텐데, 다 같이 푸짐하게 한 끼 먹어야지 않겠어?”

“아!”

심옥당이 탄성을 흘리더니,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딱 마치려던 참이었습니다. 바로 먹을 수 있으면 감사하지요.”

“감사는 무슨. 그래도 준비 많이 했으니 부족하진 않을 거요. 하하하.”

마일권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진우선과 염지광, 심옥당을 데리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날도 장원에는 밤이 내렸다.

하지만 이 밤은 화목한 밤이었다.

무의대 사람들이 넓은 마당의 한쪽에 장작불을 피워놓고서 고기를 먹으며 회포를 풀고 있었고, 진우선과 염지광도 스스럼없이 함께 어울렸다.

[좋구나.]

검노야가 삼층 전각 지붕에 앉아 멀찌감치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우선아. 좋아졌구나. 이제는 혼자서도 잘하고 있어.]

혼잣말 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칭찬하고 있으나 어딘가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그건 검노야가 지난 시간을 되새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최근 며칠, 진우선은 스스로 무공을 펼치며 상황을 풀어나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순간순간마다 능동적으로 잘 헤쳐 나갔다.

처음 만났을 땐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많았는데, 이제는 옛 모습을 벗고서 당당한 대장부가 되어 있었다.

[뜻깊은 시간이었어.]

진우선과 알고 지내온 시간을 생각하니 새삼 뿌듯해졌다.

상념이 많았는데, 진우선을 보고 있노라면 미소가 그려졌다.

[인연이겠지. 인연이야…….]

상념은 ‘인연’이라는 단어에서 시작했다.

진우선과 만나고 지내오면서, 친우 조문신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걸 계기로 세상의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생각해보았다.

이전은 차치하고서라도, 진우선과 무의대는 서로 만나서 열흘가량 함께 지내며 친해졌고, 이제 헤어짐을 앞두고 있었다.

심옥당은 짧은 시간이지만 큰 배움의 인연을 만났다.

운철산은 죽마고우였던 철우인을 적으로 만나고 떠나보냈다.

어디 이뿐일까.

[허허. 세상천지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거늘…….]

검노야는 말을 흐리며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무엇이 남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하늘의 뜻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이 걱정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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