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87화 (87/225)

087.

#위험한 임무 (5)

“……!”

운철산은 놀라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친우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으나, 함께 자라온 철우인은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 정무맹이 누명을 씌우고 철가장을 멸문시켰단 말인가?

자신은 정무맹 숭의각 무의대 소속이다. 하지만 철가장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당장 답을 찾아올 수도 없었다.

“으아아!”

운철산은 속이 갑갑하여 악을 질렀다.

구유마라종을 맹렬히 뒤쫓느라 몇 년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뿐인데, 그사이에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져 있었다.

“크으으…… 귀 아프다.”

철혈객이 신음을 흘렸다.

그의 안색은 이제 매우 파리했다. 정말로 죽음이 코앞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철혈객이 눈알을 굴려 주변을 보았다.

바로 옆에 주저앉은 운철산이 입을 악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새겨졌다.

운철산의 한 걸음 뒤편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는 진우선도 보였다.

태양 앞에서 당당하고 우뚝 서 있는 듯한 그 모습에 괜히 골이 났다.

“나를 이겨놓고 미안해하지 마라. 내가 불쌍해 보이냐?”

“아니요.”

철혈객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흑괴가 접근하고 있었다.

철혈객은 그걸 진우선에게 경고하려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보다 진우선이 더 강하니까.

“크크. 내 모습이 꼴사납군. 마라혈기에 목숨을 걸었는데, 저런 애송이 하나도 못 당해내고.”

철혈객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간 견뎌왔던 원망, 분노, 고통의 순간들이 떠오르고, 천마교에 들어가 인고하며 버텼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참 부질없었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머릿속에 상념이 가득한 철혈객이 다시 진우선에게 말을 걸었다.

“너…….”

“제 이름은 진우선입니다.”

“그래, 진 소협. 부탁 하나 하자. 나를 지켜줘. 그가 내 시체를 가져가거나 없애려 할 거다.”

“알겠습니다.”

“참 쉽게 답하는군.”

철혈객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의 말이 잔뜩 느려져 있었지만, 감정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철산아. 내가 죽거든 황산(黃山)에 묻어줘라. 그리고 북성천강류를 네가 이어줬으면 좋겠다.”

“너!”

운철산이 눈을 화등잔 만하게 떴다.

황산에는 어릴 적에 종종 함께 갔던 추억의 장소가 있었다. 그곳에 가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철우인이 말하는 걸 봐선 아마도 그곳에 북성천강류를 보관해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 가려니, 전혀 내키지 않았다. 너무 답답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불만을 내뱉을 틈도 없었다.

“제길.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철혈객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제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게 확연히 느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네놈이었구나!”

흑괴의 괴성이 귓전을 때렸다.

진우선이 운철산과 철혈객을 뒤로한 채, 다가오는 흑괴를 마주 보며 나아갔다.

출수할 채비는 이미 마친 상태였다.

쿠구궁-!

맹렬한 파공음과 함께 섬뜩한 기운이 쏘아져 왔다.

흑살마장의 공력이 세 사람을 향해, 정확히는 진우선에게로 덮쳐오고 있었다.

“진 소협! 조심하시오!”

엄소백의 외침도 곧장 들려왔다.

저 멀리서 흑괴를 뒤쫓아 오는 엄소백은 꽤 고전한 모습이었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머리는 풀어 헤쳐져 있었다.

찰나 간에 여러 상황이 파악되었다.

어쨌거나 진우선은 이미 검초를 펼치고 있었다.

심혼까지 옥죄어오는 흑살마장에 맞서 광륜의 힘이 맹렬하게 휘돌며 쏘아졌다.

쏴아아-!

새하얀 광륜이 흑살마장의 중심부를 관통했다.

그 순간, 흑살마장이 속에서부터 와해되기 시작했다.

연이어 겉 테두리의 검은 기운마저도 안개가 증발하듯 금세 허공에 산산이 부서졌다.

“……!”

흑괴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전해 들었던 수준이 아니다!’

사실 흑괴는 반년 전쯤에 정무맹의 방해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강력한 항마의 기운을 느꼈다. 마라혈인 철혈객이 그에게 속절없이 당하는 순간에 말이다.

마라혈기의 공능인 마라혈독이 주변을 제대로 장악하지도 못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정무맹의 방해자밖에 없으리라.

그러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연이어 떠올랐다.

약관이 되지 않은 애송이.

강호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특출난 항마공.

마라혈독을 흩어버리며 계획을 크게 방해했다는 사실.

물론 그때의 마라혈독은 예상치 못한 흠이 있어서 미완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위력이 약한 건 아니었으니, 무시 못 할 실력의 방해자가 나타난 건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게 저놈이었으리라.

그래서 흑살마장 중에서도 강력한 초식으로 손꼽히는 흑령마격(黑靈魔擊)을 쏘아냈다.

이리 쉽게 소멸할 줄은 몰랐지만.

‘맞아. 진우선이었어.’

흑괴가 엄소백의 외침도 연관 지으며, 마침내 그 이름까지 기억해 냈다.

바로 그때!

폐부가 푹 꿰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진우선이 펼치는 건 검법인데, 어느새 한 줄기 빛살이 찔러오고 있었다.

섬찟했다.

검은 저 앞에서 보이건만, 검에 어린 새하얀 기운이 뿜어내는 예기(銳氣)가 육체와 심혼까지 관통했다.

퍼퍼펑-!

흑괴가 내공을 왕창 끌어올리며 손을 마구 쳐냈다.

흑살마장의 잔상이 허공에 계속 찍혀 나가며 일 장 앞에서 겹쳐지더니, 순식간에 수백 개가 하나의 모양을 갖춰갔다.

거대한 손바닥.

키가 백 척(百尺, 약 30m)인 지옥의 신장(神將)이 흑살마장을 펼치면 딱 이럴 듯한 형상이었다.

이게 바로 흑괴의 구명절초 중 하나인 흑마벽(黑魔壁)이었다.

흑마벽의 거대한 손에서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며 괴기하고 음침한 기운을 뿜어댔다.

손바닥이 진우선의 경로를 가로막았다.

흑마벽의 암흑이 빛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진우선을 잡아먹었다.

‘앗!’

그걸 목격한 엄소백은 간이 철렁했다.

사방을 암흑으로 물들이는 거대한 흑마벽 속에서 어찌 빛이 있을 수 있을까.

진우선은 한없이 작아 보이기만 했다.

“아아……!”

뒤편에서 진우선을 바라보던 운철산과 철혈객, 무의대원들도 놀라서 탄식을 흘렸다.

그러면서 심장이 마구 옥죄어왔다. 진우선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한 까닭이었다.

찰나의 순간, 그렇게 절망이 다가왔다.

그때였다.

쏴아아-!

빛이 터졌다.

거대한 흑마벽이 쪼개지며, 사방 팔방으로 빛이 터져 나왔다.

곧 굉음과 함께 손바닥이 도자기 깨지듯 산산이 조각났다.

그와 함께 빛 속에서 진우선이 쏘아져 나왔다.

지켜보던 인물들은 숨이 쉬어지고,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직전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진 소협은 먹힌 게 아니라, 거침 없던 거였어!’

인제 보니 진우선은 멈추지도 않았고 속도를 늦추지도 않았다. 흑마벽을 직선으로 뚫어버렸다.

다들 진우선이 잠시 보이지 않아 착각했을 뿐이었다.

“헛!”

오히려 놀라는 건 흑괴였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잔뜩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파파파팍.

흑괴가 두 팔이 빠질 듯이 초식을 쏟아냈다.

손속이 몹시 어지러웠다. 감히 숨 쉴 틈도 없었다. 내력도 마구 퍼부었다. 진우선의 기세에 모골이 송연한 까닭이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진우선의 검.

처음에는 명확하게 보였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던 검이 한 걸음 앞에서 빠르게 세 차례 찌르는 순간까지도 확연하게 분간했다.

검격은 양팔과 가슴의 요혈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 그대로 대응하려던 순간, 검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아홉이 되었다.

‘……!’

세 개만 막으면 당한다. 느껴지는 아홉을 다 막아야 한다.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미친 듯이 장력을 뿜어 댔다. 급박하여 그 수밖에는 없었다.

‘왜 아홉 개일까?’

우아하게 찔러지는 검초를 따라 빛살이 꽂혔고, 그 뒤를 따라오는 같은 모습의 그림자가 쇄도하는 게 보였다.

그림자.

아홉인 이유는 그림자 때문이다. 그림자에도 빛살만큼이나 강력한 공력이 얹혀 있었다.

알아채지 못했다면 속절없이 당했을 것이다.

‘이런 무공이 있다고?’

언뜻 보면 단순하지만, 실체를 알고 나니 섬뜩했다.

매서운 위력도 숨어 있었다. 압도적인 항마의 힘도 느껴지니, 자신과는 상극이었다.

‘제길!’

흑괴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내공을 더욱 끌어올려 중구난방으로 흑살마장을 뿌렸다.

그때 한 줄기의 장력이 혼절해 쓰러진 마교도에게 닿았다.

치이익.

마교도의 육체가 부글부글 끓으며 뼈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흑수로 녹아내렸다.

“다들 눈을 떼지 말고 조심해라!”

이조장 마일권이 대원들에게 외쳤다.

다들 간담이 서늘해져 있었다.

진우선이 일행을 보호하며 흑살마장의 장력들을 해소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저 꼴을 면치 못했을 테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진우선과 흑괴의 공방은 순식간에 십여 초식이 더 오갔다.

펑! 퍼퍽! 퍽!

흑괴가 내력을 퍼부은 흑살마장의 위력이 항마에 깎여나가고, 빛과 그림자의 신묘한 무공에 꼬여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괴는 어느새 내상을 입었다. 충격을 받아 내부가 진탕된 와중에 급히 내력을 운용하다 보니 온 결과였다.

‘내가 밀린다니…….’

자괴감을 느낀 흑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무언가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의 두 손에서 장력이 폭발하듯이 분출되었다.

그와 동시에 진우선의 움직임을 보지도 않고, 반탄력을 이용해 빠르게 뒤로 튕겨 나갔다.

그러면서 흑괴가 비스듬히 몸을 젖히며 옆을 향해 흑살마장을 뿌렸다.

쐐애액!

섬뜩한 기운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엄소백에게로 쏘아졌다.

큰일이었다. 흑괴의 흑살마장에 엄소백은 전면이 열려 있는 형국이었으니까.

엄소백은 열심히 달려온지라 흑괴의 뒤쪽에 거의 근접해 있었는데, 갑자기 튕겨 나오며 몸을 젖힌 흑괴에 제대로 반응할 틈이 없었다.

“대주님!”

부지불식간에 진우선이 외쳤다.

급박한 상황이었다.

슈악!

엄소백이 도를 그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펼친 벼락같은 일격이었다.

그 한 수로 흑살마장을 빗겨 쳐 냈다.

흑살마장과 충돌하며 도신이 뒤로 팍 젖혀졌다.

“큭!”

엄소백이 신음을 흘렸다.

반동이 너무 강해 도를 쥔 손목 전체가 밀리고 강렬한 통증마저 느껴졌다.

그 틈을 타서 흑괴가 재빠르게 반 바퀴 돌아 엄소백의 뒤편으로 섰다.

그리고 재차 두 손으로 장력을 뿜었다.

엄소백이 급히 돌아서며 초식을 전개했지만, 흑살마장의 가공할 위력에 참혼십팔도의 묵직한 힘이 채 발휘되지도 못하고 뒤로 마구 밀려났다.

진우선이 빠르게 날려 오는 엄소백을 온몸으로 받았다.

바로 그 순간, 흑괴가 뒤로 몸을 내뺐다.

그는 이번에도 반동력을 이용하여 몸을 물리더니, 귀신같은 몸놀림을 보이며 저 멀리로 쏘아져 나갔다.

“앗!”

흑괴의 수에 당해버린 엄소백이 안타까움에 탄성을 흘렸다.

흑괴는 도망칠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걸 위해 엄소백을 공격하여 진우선이 앞서지 못하게 했다. 상대하기 어려운 진우선의 걸음을 잠시만이라도 붙잡아두려는 속셈이었다.

그러고는 바람 같은 경공술로 휘익 날아가 버렸다.

정말 약삭빨랐다.

“영악하군요.”

“하아. 진 소협, 혹시 따라갈 수 있겠나?”

엄소백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꽤 빠릅니다. 따라갈 수는 있겠지만, 붙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할 수 없지. 사실 나도 시종일관 계속 끌려다녔다네. 노괴의 경공이 이렇게 빠를 줄이야.”

엄소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흑괴와 상대하는 게 버거웠던 까닭이다.

“대주님은 괜찮으십니까?”

진우선이 물었다.

엄소백의 손은 아직도 잘게 떨련고, 손아귀도 찢어져 핏물이 배어 나왔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에는 타들어 간 흔적도 있었다.

“흑살마장의 가공할 위력도 위력이지만, 닿는 것마다 녹여버리니 스쳐도 안 되는지라 적극적으로 상대할 수 없더군.”

“맞습니다. 바위나 나무는 물론이고 사람조차도 녹아내리더군요. 독성이 지독했습니다.”

진우선도 흑괴를 상대하면서 어려움이 많았다. 광영무로 흑살마장을 소멸시킬 수 없었더라면 매우 애먹었을 터였다.

“그런 면에서 진 소협 자네의 활약이야말로 매우 인상적이었네. 흑괴에게 공세를 점하는 것도 모자라, 패퇴시키기까지. 특히나 마공을 그렇게 흩어낼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저도 참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익힌 무공이 마공과 상극인 모양이더군요.”

“그래 보이더군. 덕분에 큰 힘이 되었어. 정말 고마워.”

엄소백이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진우선 없이 흑괴와 철혈객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위험했을지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했다.

흑괴가 도망간 이유도 진우선이 두려웠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렇게 몇 차례 계속 감탄을 전한 후, 엄소백이 무의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일단 돌아가서 좀 추스르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무의대원들이 서로를 챙기면서 격전의 흔적을 수습한 후, 돌아가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행렬.

무리의 맨 뒤에서 운철산이 친우 철우인의 주검을 안은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운철산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념이 교차했다.

친우를 적으로 만났고, 만나자마자 생사가 갈렸으며, 지금은 그의 시신을 챙기고 있었다.

세상이 참으로 야속했다.

천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여전히 푸르기만 한데.

그런 운철산의 가슴에 철우인의 마지막 음성이 계속 맴돌았다.

-철산아. 그래도 네가 있어서 마지막은 외롭지 않구나……

운철산의 걸음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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