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86화 (86/225)

086.

#위험한 임무 (4)

“모두 엎드려!”

엄소백이 외친 바로 그 순간.

콰앙-!

흑괴의 장심에서 쏟아져 나온 파괴적인 힘이 맞은편 산비탈을 움푹 파고 들어갔다.

그곳을 보니 한구석에선 아직 남아 있던 시커먼 기운에 바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흑살마장에 격중 되면 뼈가 녹아내리고 피가 흑수로 흐른다더니, 정말 그러겠군.’

진우선은 얼마 전 심옥당에게 들은 말이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완벽한 사실임을 깨달았다.

“막았다? 하긴, 이 정도가 아니라면 아우가 네게 당했을 리 없지.”

흑괴가 백발을 휘날리며 한쪽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상대, 엄소백은 어느새 도를 뽑아 들어 조금 전의 일격을 쳐낸 상태였다.

“나를 알고 있었군.”

“저번에 얼핏 들었다. 기억할 생각은 없었지만.”

흑괴가 기억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구유칠괴로 함께 지내던 색괴의 목숨을 앗아간 게 엄소백이기 때문이었다.

“고맙군.”

엄소백은 흑괴의 말을 적당히 받아넘겼다. 그러면서 뒤를 흘깃 보았다.

진우선이 엄소백의 시선을 받았다.

엄소백은 우측을 한 번 흘겨보며 눈빛으로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진 소협, 부탁하오.’

끄덕.

진우선이 바로 고갯짓하며 응답했다.

우측에는 운철산이 있었다.

엄소백의 부탁은 운철산을 대신하여 철혈객을 상대해달라는 것이 틀림없었다.

운철산의 상태는 조금 전부터 이상했으니까.

“우인!”

“……정파의 개가 눈도 썩었군.”

“철우인. 나 모르겠냐? 운철산이다. 동성현에서 같이 자랐잖아!”

“나는 철혈객이다. 과거나 이름 따윈 없지. 그저 철혈객일 뿐이다.”

“너……!”

둘은 그렇게 애매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의대원들과 마교도들도 잠시 대치 중이었다.

하지만 잠깐의 어색한 시간은 이제 끝났다.

주변의 대기가 팽팽하게 쪼여오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고오오오-!

철혈객에게서 거대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핏빛 안광이 터졌다.

“크흐흐흐! 모두 죽인다!”

철혈객이 기세를 피워 올리자, 덩달아서 뒤편에 모여 있던 마교도들의 기세도 변하기 시작했다.

“크흐흐!”

“크르르르!”

마교도들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철혈객체럼 핏빛 안광을 뿌리며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사냥감을 물색하듯 무의대원들을 훑고 있었다.

이게 찰나 간에 일어난 일이라니!

흡사 집단 광기의 현장 같았다.

바로 그때 진우선이 외쳤다.

“모두 설산호심공을 놓지 마십시오.”

“진 소협, 우리 걱정은 마시오. 철혈객에게서 아주 짙은 마기독이 느껴지고 있지만, 이번에는 문제 없소.”

진우선이 경황없는 운철산을 대신해 말하니, 무의대 이조장 마일권이 응답했다.

그들은 이미 일 각 전부터 엄소백의 명에 따라 설산호심공 팔호결을 운기해왔다.

그래서 조금 전에 몰아친 철혈객의 기세도 벌써 한 차례 막아낸 상태였다.

게다가 조장인 마일권이 있으니, 무의대원들이 명령체계가 없어 혼란을 겪을 리는 만무했다.

“진 소협, 호심공이라면 나도 익힌 바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염지광 역시 진우선에게 확신을 건네며 마일권에게 다가갔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철산을 제외한 모두가 굳건한 신뢰를 보내주고 있으니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그 순간, 마교도들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짓쳐들었다.

“크아아!”

철혈객을 필두로 모든 마교도들이 한꺼번에 몰아쳐왔다.

쾅-! 콰쾅-!

그와 동시에 한쪽에서 일대를 뒤 흔드는 폭발적인 굉음도 터져 나왔다.

흑괴의 흑살마장이었다.

흑살마장이 주변의 지형지물을 계속 파괴하며 쏘아지는 가운데, 엄소백은 계속 반대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대주님!’

진우선은 단박에 엄소백의 뜻을 알아챘다.

엄소백은 흑괴와 싸우느라 숨 돌릴 틈조차 없을 텐데도, 대원들이 흑살마장에 피해 받지 않게 하려고 유인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때, 한 마교도가 흉흉한 기세로 진우선에게 달려들며 강력한 일 권을 날렸다.

쐐애액!

진우선은 당황하지 않고 섬전 같은 몸놀림으로 마주쳐 나갔다.

퍼퍼퍼엉-!

철혈객이 눈 깜짝할 사이에 권격을 잔뜩 쏟아냈다.

이에 대응하여 운철산이 재빠르게 공력을 뿌리며 뒷걸음질 쳤다.

“우인! 정신 차려!”

운철산이 피하는 와중에 다급하게 외쳤다.

마기독을 해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철혈객의 권법이 너무나 위협적이라, 몸을 쉬이 가눌 틈조차 없음에도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철혈객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쐐애액!

곧장 철혈객의 삼연격이 운철산의 두 어깻죽지와 허리를 관통하려는 듯이 동시에 쏟아졌다.

운철산은 두 주먹을 마구 휘두르며 여섯 갈래로 공력을 내뿜어 응대했다.

철혈객의 삼연격은 한꺼번에 몰아치는 듯 보였지만, 미세하게 순서가 있었다.

운철산은 그걸 알았다. 왜냐하면, 익숙한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북성천강류(北星天罡流).

바로 안휘성 동성현 철가장의 비전절기로, 철가장의 직계만 익힐 수 있는 강력한 무공이었다.

콰콰쾅!

서로의 공력이 둘 사이에서 충돌했다.

반탄력이 큰지라 운철산과 철혈객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큭!”

운철산이 신음을 삼켰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입안에서 쌉싸름한 피 맛이 느껴졌다.

이제 고작 열 초식 부딪쳤을 뿐인데, 벌써 내상을 입을 줄이야.

철혈객이 어떻게 들어올지 알고서 맞상대하는 것임에도, 그 위력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다.

사실 부딪친 것도 아니었다. 운철산은 옛 친우의 이름을 부르며 일방적으로 수비만 하고 있었으니까.

‘벅차군.’

철혈객으로 변해버린 친우, 철우인의 무공은 너무나 강했다. 예전과 무공의 형은 같지만, 위력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아마도 삼사 년 전에 운철산이 철가장에 들렀을 때, 한 수 지도해 주셨던 장주님과 비슷한 듯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운철산이 전심으로 부정했다.

지금 철우인이 펼친 북성천강류가 위력은 대단할지 모르나, 이전처럼 올곧은 느낌은 전해지지 않았다.

아마 무공을 지탱하는 내력이 달라져서 완전히 새로운 무공처럼 여겨지는 게 틀림없었다.

‘마기 때문이야!’

철우인은 내력을 끌어올렸을 때부터 핏빛 안광을 뿌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마기독을 품었거나, 자유자재로 그 상태가 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왜 그랬냐!’

절로 타박하는 마음이 들었다.

운철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찰나 간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미워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그건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순간의 상념을 마무리하던 순간.

“크르르!”

철혈객에게서 짐승의 싸늘한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운철산이 주먹을 말아 쥐면서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동자로 철혈객을 마주 보았다.

바로 그때, 진우선이 운철산의 앞쪽으로 비스듬히 나서며 뜻을 건넸다.

“부대주님, 철혈객은 제가 제압하겠습니다. 저자가 마기독을 다루고 있으니 아마도 저와는 상극일 겁니다. 부대주님은 대신 다른 대원들을 도와주십시오.”

진우선은 이미 마교도 셋을 쓰러뜨리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운철산이 그런 정황을 눈치채고는 복잡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제압해주길 부탁하네.”

“네, 그러겠습니다.”

진우선은 운철산의 부탁에 담긴 ‘죽이지 말라’는 뜻을 알아챘다.

그리고 철혈객을 마주 보았다.

“크르르르!”

철혈객이 종전보다 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핏빛 안광도 더욱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진우선의 검을 들어 올리며 철혈객에게 달려들었다.

화아-!

지금까지와 다른 기운이 전장에 어리기 시작했다. 광륜의 오행진기를 머금은 광륜검에서 광영무가 피어나는 까닭이었다.

“크아아!”

철혈객이 진우선에게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두려우니까.

하지만 진우선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광영무를 담아내는 검이 허공을 가르니, 기운이 잔상으로 남아서 쨍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순백의 힘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빼곡하여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철혈객의 핏빛 안광이 폭발했다.

파앗!

순백과 확연히 대비되는 핏빛 기운이 마구 힘을 내뿜으며 사방을 강탈했다.

수백의 권과 장도 한꺼번에 쏟아졌다. 두개골을 단숨에 짓이겨 골수만 흐르게 할 무시무시한 압력을 품은 공격이었다.

수백의 권과 장이 모여 도도하게 흐르니, 강(罡)이라 할만했다.

강기(罡氣)가 범람하고 있었다.

‘은하천강!’

십 장 밖에서 적을 상대하던 운철산이 경악을 터트렸다.

북성천강류의 은하천강(銀河天罡)은 펼치기가 지극히 어려우나, 그 대신 위력도 지극히 강해 천하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절초였다.

그런 은하천강을 펼쳐내다니.

친우는 도대체 마기를 접하고서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진 소협!’

운철산의 머릿속이 진우선의 목숨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찼다.

‘무공의 현기는 감탄할 정도지만 아직 은하천강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일 텐데!’

하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아아-!

진우선의 검이 철혈객의 은하천강을 갈랐다.

검의 궤적 그대로 은하천강의 초식이 쩍쩍 갈라졌다. 함께 쏟아지던 강기와 숨 막히던 풍압은 소멸해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우선의 공격은 아직 끝 난 게 아니었다.

파앗-!

진우선이 강력한 일 장을 철혈객의 가슴팍에 꽂았다.

철혈객은 은하천강이 갈라지면서 받은 충격의 여파로 핏빛 안광이 꺼질 듯이 점멸하고 있었는데, 진우선의 일장은 마지막 기운마저 몰아냈다.

“크윽…….”

철혈객이 신음과 함께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모습은 만신창이였다. 코와 입으로 검게 죽은피가 흘러내리고, 광영무에 직격한 육체는 피투성이였다.

숨이 붙어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우인!”

그때, 운철산이 다가와 철혈객을 끌어안았다.

“마기가 특히나 강해서 단박에 날려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은 상했으나 숨을 쉬는 것엔 지장 없을 겁니다.”

“진 소협, 고맙소.”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의 모습을 뒤로하고서 주변을 살폈다.

철혈객이 쓰러짐으로써 마교도들에게 씌워졌던 마기독은 사라진 상태였다.

‘이번에는 전과 다르군.’

형산파 사태 때와는 다른 양상에 놀라며 둘러보니, 일반 마교도들은 무의대원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을 도우러 가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다시 시선을 철혈객에게로 돌렸다.

“하…… 하하…….”

철혈객이 힘없이 웃다가 피를 쿨럭 토했다.

“우인…….”

“제길…… 어떻게 얻은 힘인데…….”

철혈객은 운철산이 부르거나 말거나, 공허한 눈빛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인. 허탈해하지 마.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거니까.”

“정상? 아니야. 다 끝났어.”

“마기독을 네가 어떻게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진 소협이 소멸시켰다. 그러니 다행이야.”

철혈객이 비관하여 말을 흘리자 운철산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마기독? 쿨럭. 마라혈기를 말하나 보군. 크큭. 이름이 어쭙잖지만 재밌어.”

하지만 철혈객은 여전히 냉소적이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마라혈기가 사라진 순간, 나는 죽은 거야. 원기(元氣)가 없으니까.”

“설마!”

원기는 생명의 힘으로, 사람의 본질적인 기운인 본원진기(本元眞氣)였다.

원기가 있어 생명이 움직인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철혈객은 반대 상황이니 죽음을 코앞에 둔 입장이라고 봐야 했다.

운철산이 탄식하는 게 그래서였다.

하지만 철혈객은 여전히 속상할 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마라혈기를 익혔는데…… 제길.”

“…….”

운철산은 이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본원진기를 끌어내어 마라혈기를 익혔으니 내력이 폭발적으로 늘었겠지만, 인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운철산은 허망한 눈으로 친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진우선이 다가오며 물었다.

“저는 당신이 마기독의 근원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라혈기를 익혀서 그런 거였군요. 그렇다면 마라혈기를 익히면 마기독을 뿌릴 수 있는 겁니까?”

“크크. 내가 왜 알려줘야 하지?”

철혈객의 자조적인 목소리에서 깊은 절망감이 묻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씁쓸한 웃음을 흘리는 건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너는 정말 강하더군.”

“…….”

“그리고 나는 철혈객이다. 마라혈인이지.”

진우선이 묵묵히 듣고 있자, 철혈객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마라혈인이 마라혈기를 일으키면, 자연스레 공중에 마라혈독이 퍼진다. 천혜의 독지에서 연성했으니까.”

천혜의 독지라면, 하늘이 내린 독지라는 뜻인가. 참으로 섬뜩한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녹마봉에?”

“맞아.”

“우인! 대체 왜…….”

운철산이 말끝을 흐리며 통탄한 마음을 삼켰다.

하지만 철혈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물음에 답했다.

“철가장이 멸문했다. 나만 도망쳐 나왔고. ……철산, 넌 아마 몰랐겠지. 그 후로 나는 태양 아래에서 마음 편히 숨 쉴 곳조차 없었다. 천마교와 결탁했다는 누명을 썼거든. 정무맹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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