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81화 (81/225)

081.

#무의대 (2)

스윽.

발걸음 소리가 나지막하게 귓전으로 들려왔다.

나무와 풀과 바람의 소리가 희미하게 흐르는 가운데, 세 사람이 경공을 펼치며 나아가는 기척만이 주변에 번졌다.

‘음-!’

염지광이 속으로 숨을 깊이 삼켰다.

마음이 불편했다. 묵직한 무언가가 온몸을 짓누르는 것도 같았다. 공기는 마냥 상쾌하기만 한데, 숨을 들이마시면 속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부담감을 느끼고 있구나!’

염지광은 호심당에서 받은 두 번째 임무로 인해 심히 긴장되고 있는 걸 알아챘다.

사실 숭의각의 임무는 일결제자보다는 이결제자에게 적당하다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집단의 특성상 적들과 코앞에서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었다.

호심당에서도 일반적으로 이결제자를 보냈다. 이결제자여도 임무의 성패와 그에 따른 생사를 함부로 장담할 수 없기에 최대한 선별하여 보냈다.

하지만 염지광은 일결제자였고, 그들 중에서 특출나게 뛰어나지도 않았다.

불안감의 원인이 거기에 있었다.

그때, 머릿속에 한 사람의 존재가 떠올랐다.

이번 임무 동안 함께하게 된 일결제자 진우선이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네.’

흘깃 살펴본 진우선의 얼굴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

호흡은 경공을 펼치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니,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긴장조차 안 한 기색이었다.

그때, 시선을 느꼈는지 진우선이 고개를 돌렸다.

염지광이 멀뚱멀뚱 진우선을 쳐다보았다. 별말은 하지 않았다.

진우선이 슬쩍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며 경공에 집중했다.

그 순간, 염지광은 신기하게도 긴장이 풀렸다는 걸 느꼈다.

진우선의 존재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 안에서 우선이에 대한 비중이 이 정도였구나!’

염지광은 이런 자신의 모습 자체에 놀라버렸다.

사실 십오행을 치르며 진우선의 압도적인 실력에 한없는 좌절감과 무력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 후의 행동들을 보며 존경심도 생겼다.

자신을 비롯한 여러 일결제자들이 진우선더러 ‘진 소협’이라 부르는 게 그래서였다.

그런 진우선이 지금 함께 있으니 상상 이상으로 든든하다.

그뿐이랴.

임무를 받고 떠나기 직전, 무사부 황백이 전해준 말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광아. 많이 배우고 오너라. 숭의각에서는 한시도 편하고 쉬운 순간이 없겠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이 네게 피가 되고 살이 될 게 분명할 테지. ……그리고 우선에게서도 많이 배우거라. 스승으로서 이리 말하긴 부끄러우나 우선이가 나보다 나으니, 그의 검을 견식하는 것만으로도 네게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황백의 진심 어린 당부를 생각하자, 다시 한 번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호심당을 떠나올 때 만난 스승의 절절한 말과 눈빛이 가슴에 새겨진 까닭이었다.

‘알겠습니다!’

염지광이 목을 살짝 끄덕였다. 마음을 다잡고 그때의 각오를 되새겼다.

그리고 진우선을 보며 바짝 뒤따르기 시작했다.

***

“무의대에 온 걸 환영한다!”

운철산이 진우선과 염지광을 인솔하여 계림의 한 장원에 도착하자, 엄소백이 환히 웃으며 마중했다.

“나는 대주인 엄소백이네. 자네들은?”

“처음 뵙겠습니다. 호심당 일결제자 진우선입니다.”

“저는 호심당 일결제자 염지광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반갑네.”

엄소백이 진우선과 염지광의 눈을 마주보며 얼굴을 익혔다.

“호심당에서 온 서찰을 보았네. 당주님이 두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크시더군. 잘 부탁하네. 나도 자네들이 좋은 모습 보여주기를 바라네.”

“네, 알겠습니다.”

진우선과 염지광이 짧게 대답했다.

엄소백은 따뜻한 사람 같았다. 어쩌면 평범한 인사일 수도 있지만, 대화를 나누어 보니 따스함이 전해졌다.

체격이 건장하고 외모가 날렵하여 천생 무인다웠는데, 말과 표정이 이처럼 부드러우니 절로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소백이 말을 이었다.

“오전에 회의가 있었는데, 내일까지는 특별한 일이 없을 거 같더군. 그러니 두 사람은 일단 긴장을 풀고서 이곳에 잘 적응해주게.”

내일까지.

엄소백이 말을 전하며 다소 강조한 부분이었다.

진우선이 그 점을 기억했다.

하루 이틀마다 상황이 변하는 최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무의대에 왔다는 게 여실히 체감되었다.

그러면서 의문이 들기 시작한 진우선이 곧장 물었다.

“대주님, 실례지만 적들은 누구입니까?”

“아! 그건 듣지 못했나 보군. 우리는 지금 천마교의 구유마라종을 주시하고 있다네. 마교도 중에서도 음험하고 잔악하기로 악명 높은 마귀들이지.”

엄소백이 서늘한 예기(銳氣)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지금 계림에서 무언가 획책하는 중이라 보고 있네. 마주칠 때마다 죽이고 있는데도, 반년이 지나도록 마교도는 줄지 않고 계속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세. 그런 까닭에 우리는 기의대와 협력하여 꾸준히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 구유마라종의 인적, 물적 지원을 방해하며 계략을 파헤치고 있다네.”

진우선과 염지광이 진지한 눈빛으로 경청했다.

반년째 서로 접전을 치르면서 대치하고 있다면, 이는 특별한 상황이었다.

구유마라종이 이곳에서 물러설 수 없고, 그러한 사정을 숭의각이 알아챈 게 틀림없었다.

‘이건 막중한 임무다!’

지난번에 광명칠대에서 수행했던 호위 임무도 중요했지만, 임무가 가지는 의미와 위험도를 생각하면 지금이 훨씬 더 막중했다.

“그러니 자네 두 사람도 구유마라종을 상대하는 데 힘을 보태주게. 능력을 십분 발휘해주면 고맙겠어.”

“네, 알겠습니다.”

엄소백의 말에 진우선과 염지광이 전심으로 대답했다.

“옥당.”

“네, 대주님.”

옥당이라 불린 무사, 심옥당이 재빨리 달려 나와 엄소백의 앞에 서며 절도 있게 대답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옥당이 자네들과 함께하며 적응하는 걸 도와줄 걸세. 중요한 바가 있을 땐 언제든 나와 대화하면 좋겠지만, 회의나 작전 등이 급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거든.”

그러면서 엄소백이 진우선과 염지광에게 심옥당을 소개했다.

“옥당은 우리 중에 가장 젊고 성격도 밝지. 자네들과 어울리기 어렵지 않을 거야. 서로 인사들 나누게.”

“심옥당입니다.”

“진우선입니다.”

“염지광입니다.”

세 사람이 서로 포권하며 인사를 나눴다.

“옥당, 진 소협과 염 소협에게 이곳을 안내해주겠나?”

“알겠습니다. 대주님.”

엄소백이 심옥당에게 안내를 맡겼다.

“그럼 또 보세나.”

“네, 알겠습니다.”

엄소백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심옥당이 진우선과 염지광을 이끌고 무의대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

심옥당은 진우선과 염지광을 이끌고 이 각(약 30분) 정도 만에 무의대가 머무는 장원을 한 바퀴 돌았다.

이 각 중에서 장소를 안내하는 건 잠시였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 후, 세 사람은 대원들이 머무는 전각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빈방이 있었다.

“여기가 오늘부터 두 분께서 머무실 곳입니다. 지내는 데 불편함이 있으면 제게 바로 알려주세요. 저는 옆방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진우선과 염지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옥당의 안내가 워낙 친절하고 명료하니 금세 이해되고 있었다.

“경계 임무는 저와 함께 배정되실 거라 들었습니다. 외부순찰 임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항상 같이 움직이면 될 겁니다. 이와 별개로 마교도와 마주치면 무의대 전체가 동원되는데, 특별한 명령이 없다면 그때도 함께 움직이면 될 겁니다.”

정리하자면 경계와 외부순찰은 기본 임무요, 마교도와의 조우는 특별 상황이었다.

“일단 알려드릴 사항은 다 전한 거 같은데…… 혹시 더 궁금하신 점 있으십니까?”

“잘 알려주셔서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행입니다. 임무로 오신 동안 함께할 텐데,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심옥당이 먼저 대답한 염지광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함께 대답하지 않은 진우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진 소협은 혹시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심옥당이 무언가 눈치챘는지 대뜸 물었다.

그러자 진우선이 조심스럽게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을 꺼냈다.

“심 대원님, 혹시 임무에 대해서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네, 물어보십시오.”

“심 대원님을 비롯한 무의대는 이곳에서 구유마라종을 상대한다고 들었는데, 저희는 구유마라종을 잘 모릅니다. 알려주시겠습니까?”

“아! 당연히 알려드려야지요.”

심옥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과 염지광의 입장을 새삼 이해한 까닭이었다.

“아까 대주님께 물어보신 것도 그렇고, 구유마라종을 처음 들으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처음입니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염지광이 진우선을 뒤따라 대답했다. 사실 염지광은 구유마라종에 대해 대충 주워들은 게 있었지만, 여기서는 알아야 할 게 많을 것 같았다.

둘의 반응을 보며 심옥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유마라종은 일단 다양합니다. 제가 겪어보니 다른 마교도들과 달리 사용하는 무공이나 성향 등이 매우 광범위했습니다. 마공(魔功)뿐만이 아니라 독공(毒功), 음공(音功)을 주력으로 쓰기도 하거니와, 전투에 미친 놈이 있고, 음적(淫賊)도 있고, 시체를 파헤치는 놈도 있어 종잡을 수가 없더군요.”

“그들이 꾸미는 흉계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에 그런 이유도 있었겠군요.”

“그렇습니다.”

구유마라종에 온갖 부류의 마교도가 다 모여 있으니, 그들의 저의를 파악하기 더 어려운 모양이었다. 다들 쉽지 않은 임무라 말하는 데에 달리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그때, 염지광이 한 마디를 불쑥 던졌다.

“그런데 구유마라종이면 구유칠괴의 악명이 높지 않습니까? 반년이나 지속한 거라면, 그들이 다녀갔을 만하지 않나요?”

“아! 맞습니다.”

구유칠괴.

구유마라종의 종주 아래에서 실질적으로 활약하는 일곱 대마두의 통칭이었다.

그들의 행적을 구유마라종에서 빼먹고 갈 수 없었다.

심옥당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한 달 전, 구유오괴 중 하나인 흑괴가 휩쓸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사상 자만 많이 나고 종적을 놓쳤지요. 그런데 흑괴는 아시다시피 흑살마장(黑熱魔掌)으로 유명한데, 손속이 잔악하여 저희도 그때 피해를 꽤 입었습니다.”

“흑괴요? 그중에서도 하필 흑괴라니…… 흑살마장에 격중되면 뼈가 녹아내리며 피가 흑수로 녹아 내린다던데요.”

“그렇지요.”

염지광이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때 진우선이 물었다.

“그런데 구유칠괴가 아니라 구유오괴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둘이 죽어 오괴가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처음 들으시나 보군요. 색괴는 우리 대주님이 처단하셨는데.”

“아!”

진우선과 염지광이 탄성을 흘렸다.

무의대주 엄소백.

머릿속에 그려진 그의 모습에 후광이 어렸다. 그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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