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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검전-80화 (80/225)

080.

#무의대 (1)

숭의각(崇義閣)은 의기(義氣)가 충천하기로 정무맹에서 첫 손에 꼽힌다.

정무맹 숭의각의 무인들은 저마다 가슴에 의를 품었으니 기개가 높고, 그 마음가짐으로 무를 단련하니 정의감이 투철했다.

그래서 숭의각은 정무맹의 상징이요, 정무맹을 지탱하는 단단한 힘이었다.

엄소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무맹 숭의각 무의대(戊義隊)의 대주로, 굳건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인망이 두텁고 무공마저 뛰어나니 무의대 쉰 명을 통솔하는 역할에 일말의 부족함도 없었다.

그런 엄소백에게 숭의각에서 내려온 임무는 구유마라종(九幽魔羅宗)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이는 매우 중대한 임무였다.

구유마라종은 강호에 큰 패악을 끼친 천마교의 한 무리로, 근래에 광서성 계림(桂林) 주변에서 정무맹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들은 유독 음험했다.

기본적인 무공 실력이 뛰어난 데다 독과 암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니, 무위가 뛰어나고 정신력이 강한 무인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상대하기가 몹시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장소도 좋지 않았다.

계림은 물길과 산이 겹치니 풍광이 뛰어난데, 여기에 안개가 피어 오르면 가히 장관이었다.

계수나무 또한 만발하여 어디서 든 향기가 그윽하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안개와 향기는 절로 독과 암기를 숨겨주니, 구유마라종이 활개를 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즉, 계림은 구유마라종에게 천혜의 요지나 다름없었다.

정무맹으로선 구유마라종을 상대하기보다 장소를 옮기도록 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계림이 정무맹과 천마교의 중간쯤에 있는 까닭이었다.

광서에서 광동으로 뻗은 십만대산 어딘가에 있다고 알려진 천마교.

계림을 내어주면 천마교에서 호남성 장사의 정무맹까지 마교도들이 길을 쭉 내달릴 수 있었다.

그러니 물러서면 안 되었다.

맞서 싸워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엄소백은 능히 맡은 임무를 잘 수행했다.

구유마라종을 상대하며 절체절명의 위기가 수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기지를 발휘하며 무의대 대원들과 힘을 합쳐 난관을 돌파했다.

개인의 무력도 뛰어났다. 구유마라종의 악명 높은 마인이었던 색괴를 홀로 상대하여 처단한 일은 엄소백의 손꼽히는 업적 중 하나였다.

또한, 숭의각의 다른 대주들과 연계하여 작전을 펼칠 때면, 뛰어난 전술 이해력과 지휘력으로 여럿 가운데 돋보이기도 했다.

그런 엄소백에게 오늘 서찰이 전해졌다.

서찰을 본 엄소백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좋은 소식인 듯했다.

엄소백은 곧장 부대주인 운철산을 찾았다.

“철산아, 희소식이 왔다.”

“희소식? 술과 고기라도 내려왔소? 아니지, 지금 그럴만한 게 없는데.”

칠 척가량 되어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언월도를 내려놓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가 바로 엄소백의 부관이요, 정무맹 숭의각 무의대의 부대주인 운철산이었다.

운철산은 상의를 벗은 채 맨몸으로 수련 중이었는데, 몸에 땀이 흥건하고 김도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아쉽지만 그건 아니야.”

“그렇소? 쩝, 아쉽군. 저번에 잘 싸웠는데.”

“그건 다음을 기약해보자. 눈치를 봐서는 곧 나올 거 같으니까.”

“알겠소. 그럼 희소식은 어떤 거요?”

운철산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만 쩝쩝 다셨다. 그러면서 엄소백에게 물었다.

“저번에 말했던 호심당 제자 있잖아. 이번에 우리에게도 온다는군.”

“호심당 제자? 신의대(辛義隊)에서 사도련 잡배들을 방천화극으로 줄줄이 꿰었다던 그놈 말하는 거요? 심소룡?”

“그렇지. 기억하고 있었군.”

“당연한 거 아니오? 덩치가 나만 하다는데 까먹었을 리가. 나는 이런 몸뚱아리를 가진 놈들은 죄다 때려눕힐 거요.”

“저번에 말했던 그거지? 체구가 비슷한 자를 쓰러뜨릴 때 큰 희열을 느낀다고 했던 거.”

“맞소. 나는 조무래기들은 영 상대할 맛이 안 나서. 크크크.”

운철산이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건 엄소백이라 생각하며 히죽거렸다.

“그렇다면 아쉽겠군. 심소룡이 아니야.”

“아니오? 아!”

운철산이 짙은 탄식을 흘렸다.

심소룡과 한바탕 싸울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으나, 잠시간의 즐거움일 뿐이었다.

“이름이 진우선과 염지광이라고 쓰여 있어. 그들 두 명이 올 예정이야.”

“둘 다 처음 듣는 이름인 걸 보니, 아무래도 딱히 대단한 실력들은 아닐 거 같소. 에이! 그럼 그렇지. 심소룡이 또 숭의각에 올 리가 없지.”

운철산이 불평했다. 아쉬움이 그만큼 큰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소백의 얼굴은 여전히 밝았다.

그 이유가 있었다.

“네가 바라는 심소룡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엔 괜찮을 거 같다. 둘 다 일결제자이지만, 검을 다루는 실력이 뛰어나다더군. 특히 진우선의 무위는 호심당 제자 가운데 단연 발군이어서 기대를 뛰어 넘을 거라고 하고.”

엄소백은 진우선이 호심당 제자 가운데 단연 발군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이런 표현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었다. 말에는 무게가 있고,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서찰에 썼다는 건, 그 정도로 역량을 높게 평가한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운철산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일결? 진짜 일결제자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소?”

“맞아. 일결제자라고 쓰여 있어. 하지만 직접 그 부분에 대해서 말을 덧붙이셨어. 걱정하지 말라고, 숭의각의 임무를 능히 훌륭하게 수행할 거라고.”

“그런 거짓부렁이 같은 말이 어딨소? 대체 누가 그렇게 말한 거요!”

운철산이 버럭 화를 냈다.

일결제자라니.

수시로 구유마라종과 피 터지는 고전을 치르는 숭의각에, 이결제자도 아니고, 아직 배움과 실력이 부족할 일결제자를 보내다니.

이결제자여도 작년에 기의대(己義隊)에 왔던 햇병아리는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갔다.

괜히 운철산이 심소룡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일결제자라니, 이런 얼토당토않은 처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엄소백이 서찰을 내밀며 나직하게 말했다.

“호심당주 호연강. 그분이 직접 쓰신 서찰이야. 직인도 찍혀 있으니 확인해봐.”

운철산이 서찰을 휙 낚아채서 살폈다.

부드러운 가운데 힘 있는 필체가 눈에 들어왔고, 호심당주의 직인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거짓일 리 없었다.

“제길!”

운철산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상황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욕이라도 확 해버릴 수밖에.

그러다 문득, 엄소백이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대주, 설마 내가 그들을 맡아야 하는 거요?”

“맞아. 그래줬으면 한다. 이틀 후 아침에 흥안에 도착할 거라는데, 대주나 부대주가 와달라더라. 근데 나는 아침에 회의가 있으니, 철산이 네가 그들을 인솔하고 와서 대원들과 인사도 시켜주고 환영해 줘.”

“제길!”

운철산이 성을 냈다.

하지만 엄소백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운철산에게 신뢰 가득한 눈빛만 보낼 뿐.

그 눈빛은 엄소백의 믿음이다. 또한, 운철산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결국, 운철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인솔해오기만 하면 되는 거요? 나는 심보가 되바라져서 환영은 못 하겠소. 괜찮다면 이런 일은 옥당이 맡는 게 제격일 거요.”

“그럼 그렇게 해. 인솔 이후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맡긴다고 했으니까.”

“알겠수다.”

운철산이 결론을 냈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해 보였다. 그래서 돌아가는 엄소백에게 한 마디를 더 쏟아냈다.

“대주. 미리 말해두겠는데, 애송이들 뒤치다꺼리 따위는 하지 않을 거요.”

***

광서성 흥안 외곽에 한 장원이 있었다.

이곳은 계림에서 천마교와 첨예하게 대립 중인 맹의 무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거점이었다.

장원에서 계림에 있는 숭의각 무의대와 기의대까지는 이백 리 길이었다. 무인에게는 하룻길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즉, 이곳은 언제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최전선이었다.

그래서인지 장원에 드나드는 무인이나 맹도들, 상인들의 분위기가 장사와는 사뭇 달랐다.

이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예리하고 몸놀림이 민첩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데서 오는 모습이리라.

그렇게 이른 새벽부터 묵직한 공기가 장원에 흐르고 있을 때.

한 무인이 두 청년에게 무뚝뚝한 말투로 통보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인솔자가 이제 곧 올 거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소.”

그는 무성의하게 인사를 건네더니, 바삐 걸음을 옮겨 자리를 떴다.

두 청년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주위를 살피며 작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도착하여 이미 분위기를 경험했고 적응한 까닭이었다.

“진 소협, 아침부터 안개가 껴 있는데, 무겁게 느껴지지 않소? 실상은 이런 날이 더 뜨거울 텐데.”

“염 형이 어제 말한 대로, 이곳이 천마교와 접전지이기 때문이겠죠. 지난 달포 사이에 예닐곱 번을 부딪쳤다고도 했고요.”

진우선이 염지광에게 대답했다.

둘은 호심당의 일결제자로, 이번에 숭의각의 임무를 함께 받은 동기였다.

사실 진우선과 염지광은 같은 일결제자이면서도 개별적인 친분이 전혀 없었다. 강론을 들으며 얼굴 몇 번 본 사이에 불과했다.

진우선은 홀로 수련하기를 좋아하며 선뜻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염지광 또한 말수가 적고 사람됨이 진중하여 사교적이지 못했다. 그저 무사부 황백을 스승으로 모시고 꾸준히 검을 휘두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임무를 받은 후에야 통성명을 한 상황이었다.

다행인 건 흥안에 오면서 서로 대화를 텄다는 점이었다. 말문을 튼 계기는 무사부 황백이었고.

어쨌든, 진우선과 염지광은 장원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한두 마디씩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칠 척 거구의 한 사내가 둘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얼굴이 험상궂었는데 표정마저 차가우니 선뜻 말을 걸기 어려울 사람이었다.

“딱 봐도 너희들이 호심당 제자겠군.”

거구 사내가 둘을 단번에 알아보며 말을 툭 내뱉었다.

그러더니 품에서 서찰을 꺼내어 펴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서찰을 훑었다.

……염지광은 귀주검호 황백으로부터 검을 배워 그 실력이 뛰어나며……

……진우선은 무사부가 없으나, 그 실력이 호심당 제자 가운데 단연 발군이니……

거구 사내가 두 사람의 이름을 찾아냈다. 다른 부분은 더 살피지도 않았다.

서찰에는 호심당주의 직인과 함께 제자들의 이름과 내력이 적혀 있었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둘의 이름뿐이었다.

“진우선, 염지광. 맞나?”

“맞습니다.”

“나는 숭의각 무의대 부대주 운철산이라고 한다. 너희들은 누가 누구지?”

“제가 염지광입니다.”

“저는 진우선입니다.”

대화가 무뚝뚝하게 흘렀다.

진우선과 염지광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칠 척 거구의 사내 운철산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럼 이제 무의대로 가자. 둘 다 나를 따라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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