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79화 (79/225)

079.

#인연의 흐름 (5)

-삼인방이 달라져서 돌아왔다!

호심당의 일결제자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이런 말이 돌았다.

삼인방은 십오행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창궁관에 다녀온 세 명을 일컫는 말로, 진우선과 만총과 화설옥이었다.

사실 그들은 봄에 치러진 비무에서도 우승 및 최고 순위를 차지했었기에, 삼인방이라는 말이 일결제자 중 최고수를 뜻하기도 했다.

마치 이결제자들 사이에서 이름 나 있던 심소룡, 정연서, 천무결과 유사했다.

아무튼, 진우선과 만총과 화설옥 세 명은 다른 일결제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실력이 뛰어나니 장래가 촉망되고, 시험 결과의 보상으로 특별한 지원도 받은 까닭이었다.

또한, 질시의 대상이기도 했다.

확연한 실력 차이를 절감했기에 대놓고 시기하지는 않으나, 너무나 부러워서 괜스레 배알이 뒤틀리는 것이다.

그런 이들이 늘어나면서 삼인방은 일거수일투족을 관찰 당하고, 평범한 행동 하나에도 예기치 못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호심당의 제자라고 해서 실력과 성품 둘 다 뛰어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선망과 시기의 대상 중에서 진 소협이 첫째겠지만, 그래도 딱히 별말은 없소. 사실 진 소협은 그들에게 오르지 못할 나무 아니겠소? 이만큼 함께 지내왔으니 모르면 바보요.”

우문혁이 며칠 만에 만난 진우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창궁관에서 돌아온 진우선과 만총을 바로 찾아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창궁관에서 하루밖에 머물 수 없으니 밤을 꼬박 새워 무언가 익혀 나왔을 테고, 피곤할 게 당연했다.

또한, 새롭고 뛰어난 무공을 접하고 왔을 테니 스스로 생각을 정립할 시간을 주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진우선이 자신을 찾아오자 지난 며칠 간의 분위기를 쏟아내듯 전하고 있었다.

“혁아,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는 별로 신경 안 써. 그리고 목제자라고 불린 것보다는 낫네.”

“뭐, 그건 그렇소.”

진우선은 우문혁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히려 우문혁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혁아. 너는 어때?”

“무얼 말이오?”

우문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우선을 바라보며 되묻더니, 속 뜻을 알아채고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진 소협, 본인은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다 잊기로 했소.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이번에는 내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소.”

말은 가볍게 하지만, 음성에서 허탈하고 씁쓸한 마음이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그때, 진우선이 품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어 우문혁에게로 내밀었다.

“받아. 이걸 본 순간 네가 생각나더라. 혁이 네가 보면 도움이 되겠다 싶었어.”

“……!”

우문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옥기(冥玉氣)」

처음 접하는 이름이었다.

표지에는 이름을 쓴 게 얼마 되지 않았는지 먹빛에 아직도 윤기가 돌았고, 책을 휘리릭 넘기며 살피니 필체는 간결하고 담백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딱 진우선의 필적이었다.

창궁관에서는 외부로 한 권을 필사해 나갈 수 있는데, 진우선이 이걸 가지고 나온 게 틀림없었다.

“아니, 이걸 왜?”

우문혁이 곧바로 거절하며, 책을 도로 진우선에게 내밀었다.

“진 소협! 본인은 절대 받을 수 없소. 이건 진 소협의 것이오.”

“난 괜찮아. 그리고 이건 네게 딱 맞을 거야!”

“아니요. 진 소협. 무슨 이유로도 본인은 이 비급을 받을 수 없소. 다만 이리 배려해 준 마음만 받겠소. 그걸로 충분하오. 정말 고맙소.”

우문혁의 태도가 완강했다.

창궁관에서 얻은 무공은 당연히 진우선의 몫이었다.

물론 진우선이 이미 일결제자 중에 견줄 사람이 없으니 이럴 수 있다지만, 상승무공이란 게 어디 흔하겠는가.

그 가치를 알기에 우문혁은 명옥기를 받을 수 없었다. 거기에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우문혁은 스스로 무공을 이뤄내고 싶었다. 자신의 성취로 일어서는 게 아니라면, 어디서도 당당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진심이었다.

“혁아.”

우문혁의 눈빛 속에서 그의 단단한 의지가 보였다. 그건 삶의 목표이며, 인생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었다.

진우선은 그걸 무시하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돕고 싶을 뿐이었다.

그 마음을 그대로 전했다.

“괜찮아.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나는 창궁관에서 큰 걸 얻었으니까. 결코, 내 몫을 안 챙기고 이러는 건 아니야.”

진우선이 단호한 어조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내 것을 얻고서 창궁관을 더 살펴볼 시간이 반 시진 정도 더 있었어. 그때 이걸 보게 되었고, 네가 생각났지. 그래서 가져온 거야. 나를 통해 네게 중요한 인연이 이어질 거 같아서.”

진우선이 거짓 하나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패왕금룡신공을 완전히 갈무리했을 때, 창궁관에서의 시간이 반 시진 정도 남아 있었다.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기 아까워 여기저기 살피다가 명옥기를 발견했고, 때마침 우문혁이 떠올랐다.

진우선으로선 인연이라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우문혁이 다른 의문을 던졌다.

“진 소협의 말은 잘 알겠소. 그런데 이게 어찌 본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오?”

“혁아. 너…… 명옥기 모르는구나.”

“그렇소. 지금 처음 보오.”

“그럼 서문을 한 번 살펴봐. 보고 나면 생각이 바뀔 테니까.”

“아니요. 괜찮소. 보지 않겠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슬쩍이라도 보고 나면 기억에 남을 것이오. 진 소협이 허투루 가져왔을 리 없으니 명옥기는 분명 신공절학일 텐데, 그렇다고 해서 염왕신권과 완벽히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긴 어렵지 않겠소?”

우문혁이 타당한 이유를 밝히며 말을 이었다. 최대한 예를 갖춰서 공손히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니 부디 진 소협께서 본인의 입장을 헤아려 주시오. 자칫하여 연공 중에 일부라도 섞여서 상충하기라도 한다면 안 본 것만 못할 것 같고, 이 순간을 영원히 후회할지도 모르오.”

한 글자도 읽지 않으려는 이유.

그건 각고의 노력으로 염왕신권의 칠 성을 열었을 때, 주먹이 다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었던 경험에서 기인했다.

당연히 상통하리라 생각했던 가문의 상승 내공심법조차 염왕신권의 힘을 육 성까지밖에 버텨내지 못했으니까.

한데 지금 처음 보는 명옥기가 그보다 적합할 리 만무했다.

진우선이 직접 챙겨와서 줄 정도면 신공절학이 분명하겠지만, 실제로 명옥기가 염왕신권과 어떤 조화를 일으킬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자칫 염왕신권을 영영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 우문혁으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북명천문(北冥天門)의 무학은 현음공(玄陰功)으로 시작하여 염왕공(閻王功)으로 귀결되나, 근본은 오직 하나이니, 명옥기이다. 그 이치가 깊어 단계를 두었음이다.”

“……!”

우문혁이 눈을 부릅떴다.

북명천문.

염왕공.

이는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염왕신권의 서두에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현재는 우문세가에서도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소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진우선이 그걸 언급했다.

“설마?”

명옥기가 정말 북명천문의 무공이란 말인가.

하지만 진우선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말을 이을 뿐이다.

“염왕공의 힘은 능히 놀라워 태산을 쓰러뜨리고 대해를 갈라버리니, 이를 감당할 적이 없도다. 북명의 시린 바람으로 한없이 단련하여 옥(玉)을 품으라. 그리하면 북명의 무학을 깊이 맛볼 것이니.”

“진 소협!”

우문혁이 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쳤다.

이건 진짜다.

그 생각에 벼락 맞은 것처럼 전율이 흘렀다. 상상도 못 한 일이 닥쳤으니까.

게다가 명옥기는 상당히 자세한 듯했다.

단순히 염왕심법을 대체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겠으나 그런 예감이 들었다.

우문혁의 눈동자가 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책에서 시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때, 진우선이 서책을 우문혁의 손에 쥐여주었다.

“혁아, 이 다음은 네가 직접 살펴봐.”

‘명옥기’ 세 글자가 우문혁의 눈동자에 깊이 새겨졌다. 시선만으로 책을 뚫어버릴 듯했다.

“고, 고맙소. 진 소협!”

우문혁이 진우선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말하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문혁은 급히 책을 넘겼다.

첫 장이 펼쳐진 순간,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것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그 시각.

정무맹의 다른 곳에선, 하무백이 책들을 두루 살피며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었다.

“흐음.”

하무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도 잔뜩 찌푸린 게 왠지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일선일마일황은 분명 정무맹이 세워지기 바로 직전의 절대무인이었는데, 왜 나는 그들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거의 없는 걸까?”

이에 반해 정무맹이 천마교와 사황성에 맞서 활약하고 승리한 이야기는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특히 무천 조문신 대협이 협의지사들과 함께 악전고투 끝에 숭고한 뜻으로 강호에 평화를 가져온 것은 너무나도 유명했다.

지금도 그때부터 이어져 온 정의와 평화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신마황전도 그렇고, 일선일마일황은 전설과도 같아서 결코 잊힐 분들이 아니다!”

오래된 기록들을 살피니 드러나지 않은 역사가 보였다.

분명 알려져 있기로는 무천 조문신 대협이 천마교와 사황성을 무너뜨린 무인인데, 신마황전의 영웅은 따로 있었다.

검선이었으며, 무신이 된 자.

바로 그였다.

“한데 무신의 존재는 도통 보이질 않아. 불과 오 년도 안 되어 기록상에서 사라졌단 말인데…… 어찌 이럴 수가!”

무신은 위대한 업적을 쌓았고, 천하에 둘도 없을 무인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이토록 남지 않았다는 건,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와 살펴보는 하무백조차 비통할 지경이었다.

그는 무신에 대해 알아갈수록 강호사에 무언가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데, 하무백이 왜 이리 무신에 대해 살피는 걸까.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분명 무신이었다! 조문신 대협에게 친우라 할 만한 분은 오직 검선뿐이셨어.”

창궁관에서 본 누군가의 환영 때문이었다.

하무백은 그 환영에게서 심혼이 압도되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사실 하무백은 한평생 무공에 정진하여 뛰어난 고수로 이름 날리며, 정무맹의 든든한 기둥으로 살아왔다.

지금 당장 정무맹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절대고수였다.

하지만 환영 앞에서는 압도되기만 한 약자일 뿐이었다.

그게 하무백의 호승심과 궁금증을 자극했다.

그래서 초대 정무맹주 무천 조문신을 ‘내 친우’라고 부르는 사람을 찾아냈다.

환영은 신마황전 이후 무신이라 불렸던, 검선 창궁자였다.

‘어쩌면 일부러 그분의 흔적을 지웠을지도 모른다!’

하무백이 정무맹을 이끌어온 선대의 인물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일부러 신마황전에 관한 이야기를 축소했다. 그러면 후에는 그 업적과 이름이 가벼워지고, 잊힐 테니까.

반면에 무천 조문신 대협과 협의지사들의 숭고한 일대기는 두고두고 기리며, 주된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협의지사들만이 회자되었을 터였다.

“허어- 참으로 모르겠구나.”

하무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래전 정무맹이 세워지던 때의 기록들만 찾아 살피니 진실이 조금씩 보였다.

또한, 정무맹의 역사는 그 언급을 꺼렸다는 것도 느꼈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며,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이 원래 그럴진대, 지나온 역사가 거짓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변함없는 사실이 있었다.

“무신께서는 진정 친우를 아끼셨구나. 아직도 이 정무맹을 살피고 계셨으니.”

무신 창궁자는 친우의 무공인 패왕금룡신공이 후예에게 이어지는 걸 주관했다.

그의 마음은 백 년 전과 변함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창궁관에서 굽어살피시는 것인가?”

창궁관.

창궁자.

하무백은 창궁관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이미 알아챘다.

오히려 창궁자를 창궁관에서 만난 게 그 인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뵈면 좋을 텐데.”

다시 만난다면 꼭 전하고 싶은 말들이 있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때였다.

방 밖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전해졌다.

하무백이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

쥐 상의 중년인이 뜰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만상각주 공야청이었다.

“노사를 뵙습니다.”

“만상각주께서 직접 오셨구려. 무슨 일이오?”

“맹주님께서 긴히 상의할 게 있으니 천도관으로 와달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무슨 일로?”

“이번에 호심당에서 안건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일결제자인 진우선이 이미 훌륭하여, 이결제자와 함께 호심당을 마치게 하겠다더군요.”

“허허. 호심당주가 올렸소?”

“그렇습니다. 호심당주를 만나보니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데, 너무 호의적이어서 당황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노사님의 말씀도 여쭙고자 찾아왔습니다.”

“얼마 전 창궁관에 들었으니까?”

“그렇습니다.”

“알겠소. 내가 가서 그 이야기를 해드리리다.”

하무백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러면서 돌연 공야청에게 물었다.

“한데, 왜 만상각주가 직접 오셨소? 바쁘실 텐데, 이런 일은 사람을 보내지 되지 않소?”

“하하하.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너무 궁금한 걸 어찌합니까? 그러니 저한테는 먼저 알려주십시오. 노사께서 보시기에 진우선이란 아이는 어땠습니까?”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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