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인연의 흐름 (4)
검노야는 패왕금룡신공이 왜 진우선에게 이어져 있는지 저절로 알았다.
[패왕금룡신공은 고금에 다시없을 절학으로,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닿아 있지 않으면 입문조차 할 수 없는 무공이니라. 하지만 지금 우선이 너에게 이어져 있구나.]
하늘의 뜻이 사람에 닿았다!
검노야가 진우선에게 처음으로 ‘하늘의 뜻’이라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패왕금룡신공이 선천지기를 연마하는 특별한 무공인 까닭이었다.
선천의 기운, 선천지기(先天之氣)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하늘의 기운으로, 생명의 근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천지기는 삶의 원동력으로서 때로는 잠재력으로 발휘되기도 하고, 때로는 초인적인 힘을 내기도 한다.
사람의 의지를 한없이 북돋고, 두려움에 한 치 물러섬 없이 당당히 맞서며, 능력을 무궁히 발전시키도록 이끄는 것 또한 선천지기가 가진 힘이다.
그밖에도 사람의 삶을 이끌어가는 데 무한한 역할을 하니, 그 능력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무인에게는 어떻겠는가?
무인들은 흔히 내공을 후천지기(後天之氣)라 일컫는다. 태어난 후로 갈고닦아 얻은 내력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천지기는 그 묘용이 선천지기에 비할 수 없다.
선천지기는 순수한 하늘의 기운이고, 인간이 후천적으로 연단한 기운은 그처럼 순수하지 못해 질이 한없이 떨어지는 이치였다.
같은 무공을 펼쳐도 선천지기가 일 푼이라도 섞였을 때의 위력이 훨씬 큰 게 그래서였다.
그러니 무인이라면 선천지기가 많기를 간절히 원한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세상의 탁한 기운을 항상 받아들이니, 선천지기가 혼탁해지고 옅어져 소멸하기만 하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인간은 선천의 기운을 수련할 수도 없고, 깨끗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오직 신선만이 선천지기를 다룰 수 있다고 전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패왕금룡신공은 달랐다.
패왕금룡신공은 선천지기를 연마할 수 있었다.
천하에 내로라하는 신공절학이 상당하지만 이와 같은 무공은 알려진 바 없었다.
검노야가 아는 것도 패왕금룡신공이 유일했다.
그런 패왕금룡신공을 익힐 수 있다면, 하늘의 뜻이 사람에 닿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아-!”
진우선은 검노야의 설명을 들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천의 힘을 다루고, 검노야의 유일한 친우 조문신의 맥을 잇는 귀하디귀한 패왕금룡신공이 자신에게 이어져 있다고 하니, 온 신경을 다 집중해도 모자라리라.
이 순간.
진우선은 그렇게 인식의 한계를 탈피하고 있었다.
[우선이 너는 광영무를 깨달아 정기신이 새로운 지경으로 나아갔으니, 천지간의 이치가 네 안에 있음을 하늘이 보았구나. 그리하여 하늘의 뜻이 이어졌고, 선천의 기운 역시 너와 소통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니라.]
천지간의 오행진기를 깨달아 륜을 이루니, 곧 광륜이었다.
광륜을 통해 진우선의 육체와 혼백은 새롭게 거듭났다.
육신은 불순한 것들을 토해내고 순전해졌으며, 혼백의 문이 열려 천지와 이어지고 함께 호흡하게 되었다.
그래서 혼과 백에 선천지기가 스며들 자리가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때마침 창궁관에 들었고, 패왕금룡신공을 만났다.
마치 누가 계획한 것마냥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정확했다.
그렇기에 검노야가 ‘하늘의 뜻’이라 말했으리라.
[우선아. 주위의 기운을 세밀히 느끼며 네 안으로 받아들여 보겠느냐?]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의 눈빛과 태도에서 검노야를 향한 무한한 존경이 마구 우러나왔다.
지금의 상황 모두 검노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태껏 진우선이 얻어왔고, 지금 전수받는 패왕금룡신공도 모두 검노야 덕분이었다.
지극한 감동이 밀려왔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검노야가 그런 진우선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우선아. 네 마음이 정말 고맙구나. 이제 앉아 보아라.]
‘네.’
진우선이 곧장 가부좌를 틀고 그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감고 의념(意念)에 집중했다.
그러자 황금색 빛무리, 즉 금룡의 기운이 그에 반응하여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휘이-
빛줄기들이 하나둘씩 주위를 맴돌았다.
주변을 감싸듯 느리게 돌며 다가오다가, 곧 빠르게 마구 휘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속도가 붙어 마구 휘몰아쳤다.
휙-휙-휙-
주변에 흐르던 패왕금룡신공의 기운들이 하나로 잔뜩 엉켰다.
빛줄기들의 머리와 꼬리가 이어져 하나하나가 모두 고리처럼 이어졌고, 그게 겹겹이 쌓여 진우선을 감싸고 있었다.
곧, 구 모양의 반투명한 금빛 기막이 형성되었다.
진우선은 그 안에서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었다.
패왕금룡신공이 그를 세상과 격리해 보호하는 것만 같았다.
[패왕금룡신공은 하늘이 네게 주는 보의(寶衣)와 같으니라. 패왕금룡신공은 생명의 의지이며, 수호하는 힘이니. 만유(萬有) 가운데 지극히 정순한 기운이 정기신에 깃들어 육신을 보호하고 마음을 지키며, 나아가서는 그 완성을 도와……]
검노야의 말이 무아지경에 빠진 진우선의 내부에서 울렸다.
패왕금룡신공은 호신공이요, 호심공이었다.
육신을 보호하고 마음을 지키는 무공이었다.
마치 그 능력을 벌써부터 보여주려는 듯, 금빛 구체 모양의 기막이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었다.
이제 밖에서는 진우선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때, 검노야가 말을 멈추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검노야는 기막의 안이 보였다.
탯줄처럼 생긴 빛의 끈이 수없이 많이 진우선과 연결되어 있었다.
[허허허. 패왕금룡신공이 호신강기(護身罡氣)를 이루었구나!]
패왕금룡신공의 첫 단계인 호신공을 이루었다.
사실 패왕금룡신공을 오랫동안 부단히 수련해야만 호신공을 이룰 수 있는데, 진우선은 단번에 그 단계를 성취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호심공의 진의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패왕금룡신공의 두 번째 단계이며, 선천의 기운인 패왕금룡 신공과 진우선이 직접 소통하면서 이루어내야 한다.
이제 검노야는 더 말해줄 것이 없었다. 진우선이 홀로 해내야 한다.
검노야는 진우선이 잘 해낼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검노야의 모습이 슬퍼 보였다.
검노야의 시선이 허공 어딘가를 향했다.
눈동자에 그리움과 아쉬움의 빛이 흐르고, 뒤이어 우려의 빛이 나타났다.
[문신. 네 업이 이어졌구나. 보고 있는가?]
검노야가 혼자 중얼거렸다.
초대 정무맹주 조문신의 업(業)이라면, 강호의 의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선천의 기운을 근간으로 하는 패왕금룡신공은 그 업을 지키고, 그걸 위한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었다.
그게 진우선에게 이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상상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하늘의 뜻을 참으로 알 수가 없구나. 인연이 이리 흐르다니…….]
검노야가 말끝을 흐렸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이해하나, 인과는 도무지 살필 수 없는 까닭이었다.
다만, 추측할 뿐이었다.
[천하가 잔뜩 어지러운 형국인데, 얼마나 어둠이 드리워지려고 이러는지…….]
진우선을 이리 이끄는 것은 그 쓰임이 있기 때문이리라.
사실 검노야는 진우선이 광영무를 완성했을 때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깨달았었다.
진우선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모습은 환영으로 깨어났을 때부터 주어진 역할일 뿐이었다.
진정한 역할은 천하의 올바른 의를 진우선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천기를 살필 수 있었던 것도 그걸 더 명확히 알게 하는 데 있었다.
[우선아.]
천천히 검노야의 시선이 내려와 진우선에게서 멈췄다.
어느새 패왕금룡신공의 기운이 유형화되어 용의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용의 형체는 거대했다.
창궁관 꼭대기 위로 머리가 솟아올랐고, 일 층 밖으로 꼬리가 잔뜩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창궁관은 부서지지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금룡이 물질적 경계와 상관없이 형상을 일으킨 것이니까.
그리고 오 층에 금빛 구슬이 있었다. 진우선을 품은 구슬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용이 알을 품은 듯했다.
그걸 마주하는 검노야의 눈동자 속 깊은 곳에서 기대하는 빛이 솟아올랐다.
[잘 해낼 거라 믿는다. 우선아.]
이제는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진우선의 몫이니까.
검노야가 그런 마음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책장 통로 쪽에 누군가가 있었다.
사실 검노야는 그의 움직임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오 층에 올라왔었고, 지금은 진우선을 보고 놀란 상태였다.
어찌나 경악했는지 두 눈은 부릅뜬 상태였고, 쩍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창궁관주 하무백이었다.
***
‘아!’
하무백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탓이었다.
그 와중에도 탄성을 삼키며 소리를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작은 호흡 하나로 이 순간을 방해할까 무의식적으로 통제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이리 순전한 기운이라니! 이건 선천지기가 틀림없는데!’
하무백이 즉각 알아챘다. 그의 무위가 지극히 뛰어난 까닭이었다.
실제로 그는 정무맹에서 손에 꼽힐 실력의 무인이었다. 괜히 수석장로를 오랫동안 맡아서 수행해온 게 아니었다.
‘이 아이는 벌써 인연을 만났구나!’
창궁관에 진우선과 만총과 화설옥이 왔을 때, 인연을 말했다.
물론 하무백이 인연을 아는 건 아니었다. 다만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진우선은 이미 인연을 만나고 있었다.
황금빛 기운이 그를 감싸 안았다. 둥글게 피어오른 기운이 점점 짙어지며 유형화되었다.
‘어찌 이리 상서로울까! 호신강기가 일어나서 보호하는 걸 생전에 볼 수 있을 줄이야.’
하무백이 벌어지는 상황을 얼추 파악했다. 그러면서 의문이 들었다.
어떤 무공일까?
그때 문득, 금빛 기운이 일어나 보호하는 전설 같은 무공 하나가 떠올랐다.
‘패왕금룡신공! 설마 무천 조문신의 무공이……?’
하무백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일세영웅이자 대협객이며 초대 정무맹주였던 무천 조문신.
그의 숭고한 의기와 셀 수 없이 많은 업적은 강호에 드높았으나, 안타깝게도 진신무공을 이은 후인이 없었다.
하무백은 물론이거니와 강호인들 모두가 땅을 치며 애석해했던 바였다.
그런데 지금 신묘한 금빛 광채가 진우선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눈앞의 광경은 창궁관을 지은 이래 가장 큰 사건일 게 틀림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네가 이 아이를 보는 마음이 따스하구나.]
‘……!’
누군가의 음성이 마음속에 전해지자, 하무백은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마음에 목소리를 새기다니.
천하에 어찌 이런 기예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심어(心語)!
문득 불문에서 전해지는, 지고한 경지에 이르면 말을 하지 않고도 뜻을 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도 펼쳐낸 적 없기에 전설이지 않았던가.
‘헙!’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무백은 여태껏 공포란 걸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지금은 저도 모르게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심어의 주인이라면 고금에 제일 가는 무인일 테니까. 그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무백이 속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고인(高人)께서 와 계시는지요?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이름을 잊었으니, 알려줄 수 없구나.]
생각하니 답이 왔다.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아내지는 못하고, 심어의 고수인 것만 재확인할 수 있었다.
[너는 우선이에게 패왕금룡신공이 이어진 것을 외부에 알리지 마라. 이는 내 친우가 준 선물이며, 그의 업 또한 전해진 것이니. 인연막측(因緣莫測)이라, 참으로 헤아릴 수 없구나.]
‘……!’
하무백의 심령이 흔들렸다. 그의 위엄에 육신과 심혼이 전율한 까닭이었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의 말에 담긴 자애로움을 느꼈다.
그 순간 하무백의 정신이 잠시 아득해지며 무언가 보였다.
희미한 빛무리 가운데, 탈속한 듯한 풍모의 노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