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인연의 흐름 (3)
창궁을 그리워한다!
글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창궁관에서 홀연히 뽑아 든 책에 창궁이란 두 글자가 쓰여 있으니, 어찌 이리 공교로울 수 있을까.
‘금빛 용은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진우선은 솟구치는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 얼른 한 장을 더 넘겼다.
힘 있는 서체로 빼곡하게 채워진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는 진우선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
이 책은 예상치 못한 인물에 대한 기록이었다.
게다가 책을 쓴 사람은……
***
……
다섯 달이 지났다.
왕 장로가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를 통해 강호에 새롭게 퍼지고 있는 무신(武神)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여태까지 강호 최고수로 꼽힌 이는 일선일마일황(一仙一魔一皇)의 삼 인이었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이 목격했던 대로 그들 셋은 동수가 아니었고, 오직 검선만이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무공은 제각기 하늘에 닿았는데도, 검선의 실력이 가장 경천동지했다는 뜻이다.
산봉우리가 잘려나가고, 호수가 증발하며, 산천초목은 소멸하여 형체조차 없으니.
아!
검선이 천마와 사황을 제압한 일전을 말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검선이 홀로 빛났으며, 일선일마일황의 시대를 끝냈다.
셋을 하나로 묶는 건 그에 대한 모독이다.
그는 하늘에 닿은 정도가 아니라, 입신지경의 무인이었다.
그래서 강호인들이 그를 기리며 무신(武神)으로 숭상한다고 했다.
또한, 세 사람의 공전절후(空前絶後)한 결전을 신마황전(神魔皇戰)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후후.
나는 애초에 그럴 거로 생각했다.
검선 창궁자.
이제는 무신 창궁자겠지.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내 친우여서가 아니다.
그에게는 절로 압도되는 힘이 있었다. 한 길을 오롯이 나아가 하늘의 이치를 신인(神人)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많은 협의지사들의 지붕이 되어 감싸주었다.
또한, 그는 원래부터 무학(武學)을 즐거워했고, 무공 익히기를 좋아했으며, 날마다 정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실로 모든 강호인의 귀감이요, 강호의 홍복이었다.
강호는 역사에 길이 기록될 정도로 그에게 큰 빚을 졌다.
벌써 그의 명성이 사방천지를 진동시킨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가 없는데.
창궁자는 실종되었다.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으나, 그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어디로 간 것일까?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서 사라졌다는데, 그의 행적을 알 방도가 없다.
너무 슬프다.
……
일 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그가 그립다.
다들 나를 ‘맹주’라 부르며 어려워할 때면, 그가 나를 ‘문신’이라 부르며 편하게 다가오던 순간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 들을 수 없다.
그때 그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아직 그의 마지막 모습을 잊지 못한다.
단 하나뿐이던 친우.
이렇게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결정을 되돌렸을 텐데!
너를 언제 볼 수 있을까.
……
천하의 정세가 안정되었다.
천마교는 지리멸렬되었고, 사황성은 산산이 와해되었다. 이제 눈을 씻고 살펴도 그 잔당들을 볼 수가 없다.
드디어 정무맹의 대업을 이루었다.
이는 나 홀로 이룬 것이 아니다. 협의지사들이 모두 힘을 모아서 성취한 결과이다.
사해의 동도가 모두 기뻐하며 정무맹을 우러르고 있다.
다 그 덕분이다.
그래서 슬프다.
이로써 강호에 평화가 도래했건만, 함께 웃고 싶은 친우는 없다.
창궁자여, 너는 어디 있느뇨!
오늘따라 네가 너무도 보고 싶구나.
……
오 년이 지났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정무맹의 이름이 강호를 울리고, 뭇 강호인들이 나를 무천(武天)이라 부르며 칭송하고 있다.
무천이라니.
나는 하늘이 될 수 없다.
이 별호는 나에게 너무 과하다.
또한, 이래서는 안 된다.
영광과 명예는 모두 창궁자에게 가야 하는데.
천마를 쓰러뜨리고, 사황을 무찌른 창궁자만이 홀로 빛날 자격이 있다. 오직 창궁자만이 무의 하늘이라 불릴 만하다.
그런데 강호의 수많은 동도는 이미 네가 생을 다했다고 여기고 있구나.
오 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해 이토록 애통한데, 다들 무신은 이제 과거의 영광으로만 남아버렸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점점 도를 넘는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외친다. 각자가 허황된 별호를 짓고, 낯부끄럽게 서로를 추켜세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누가 가장 큰 공로자인지.
우리가 끝없이 마교도와 사도(邪道)의 무리를 쓸어버렸지만, 그들은 누가 봐도 구심점을 잃어 힘을 상실한 패잔병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잡아야겠다.
창궁자, 너의 업적을 널리 알려야 한다.
전설이며 신화였던 너를!
……
천하에 광영(光榮)이 가득하다.
예전에 나는 네 무공이 광영무(光影舞)가 아니라, 광영무(光榮舞)일 거라 했었지.
천하를 밝게 비출 게 틀림없다고.
이런 내 보잘것없는 우스갯소리를 받아주던 네 미소가 선하다.
하지만 광영무는 이제 하나의 전설로만 남았구나.
고작 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째서 무신의 신화는 옛이야기로만 여겨지는 걸까.
사람들은 이 중요한 것을 너무나도 빠르고 쉽게 잊어가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궁자야.
종종 너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너는 명예와 권력은 필요 없다고, 다만 천하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너는 큰 꿈을 꾸었고, 그것을 이루어냈다.
나는 그런 너를 기억한다.
그리고 네 바람도 생각해냈다.
너는 흘러가듯이 천하의 모든 책을 다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이제 나는 너를 위해 커다란 장서고를 만들어야겠다.
천하를 위해 네가 나섰으니, 너를 위해 내가 나서고 싶다.
……
십 년이 지났다.
그의 이름이 잊혀간다.
살아남은 이들은 끝없이 동도들 사이에서 회자하여 명성이 높아져 가건만, 정작 가장 큰 일을 이루어 낸 사람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다.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강호를 거니는 사람들도 다 변해 버렸다.
대의를 외치며 모였던 협의지사들은 상당수가 어느새 자신의 이름에 취하고, 오직 존경받기만을 바라며 각자 무리 짓고 있다.
서로 나에게 일가친지를 보내 후인으로 삼으라고 하는 꼴이 역겨울 정도구나.
삼십 년 전에는 다들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모였거늘, 이제는 무인의 기개를 잊고 권력에만 심취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던 평화로운 강호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창궁자야.
보고 있는가?
우리의 결의를 기억할 때면, 나는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구나.
너는 무공 말고는 자신 없다 했고, 그 무공으로 천하를 화평케 했다.
그러면서 나더러 사람들을 이끌라 했지. 사람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하지만 나는 네가 온몸을 바쳐 이루어낸 화평을 십 년도 채 지켜내지 못했다.
창궁자야. 오늘따라 네가 정말 그립다.
너와 함께라면 저잣거리 화주 한 모금에도 천하의 근심을 털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무얼 마셔도 취하지를 않는구나.
……
이십 년이 지났다.
드디어 십 년에 걸친 과업이 끝나고, 장서고가 완성되었다.
나는 그곳을 창궁관(蒼穹館)이라 이름 붙이기로 했다.
창궁자(蒼穹子)야.
이제 정무맹이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한, 네 이름이 귀히 불릴 것이다.
천하의 모든 책이 이곳에 있음이니, 모두가 창궁관을 우러를 것이다.
강호의 동도들이 무신 창궁자를 기억할까마는, 그래도 내가 유일한 친우인 너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지 않을 수 없지.
후후후.
요즘은 정말 사람이 가증스럽고 세상이 환멸스럽다.
하지만 창궁관이 있어 내 마음을 뉘일 수 있겠구나.
훗날 누군가가 여기서 네 이름을 찾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쁠 것 같다.
창궁자야.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이곳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만.
내 하나뿐인 친우, 창궁자.
나는 그때 왜 자네를 보냈을까?
우리가 함께 놀던 그때가 그립구나.
추억이 서린 곳들에, 너는 아직 살아있을 것만 같다.
이제 목표했던 과업이 끝났으니, 그곳으로 돌아가야겠다.
곧 보자꾸나.
창궁자.
***
진우선이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일기처럼 쓰여 있는 내용이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 생각들은 끝나지 않았다.
‘스승님이다!’
검선이었고 무신이라 불린 이는 검노야가 분명했다.
검노야의 광영무가 자신에게 이어지지 않았는가. 이는 서책 속 검선 창궁자의 기록이 실제라는 뜻이었다.
이 놀라운 사실에 진우선은 이미 호흡이 가빠져 있었고, 심장도 쿵쾅쿵쾅 세차게 뛰었다.
처음 잡화점에서 검노야의 인형을 봤을 때 검선을 닮았다 여겼었는데, 그게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진짜였다니.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바로 그때,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진우선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여전히 찬란한 황금빛의 검노야가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검노야는 하나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진우선의 손에 들린 서책만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더니 공허한 눈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문신. 네 잘못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검노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음성에서 아련한 슬픔이 묻어 나왔다.
무천 조문신.
단 하나뿐이었던 친우.
그는 천마교와 사황성에 맞서서 정무맹을 일으켜 강호의 겁란을 종식한 일세의 영웅이건만, 날마다 대의를 잊고 변해가는 협의지사들을 보며 가슴 아파했던 슬픈 무인이었다.
검노야는 그런 조문신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친우는 이제 없으나, 그가 남긴 마음만은 절절히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진우선은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검노야의 눈물에 담긴 의미와 감정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책의 내용을 알기에 분위기에 동조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우선은 어느새 차분해진 마음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검노야가 진우선을 불렀다. 그의 모습은 어느새 평소처럼 되돌아와 있었다.
[우선아.]
‘네, 스승님.’
검노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변에 황금 광채가 가득하구나. 우선이 네가 말하던 금빛이 이것이겠지?]
‘스승님도 보이십니까?’
[그래, 보이는구나.]
주변을 돌아보니 금빛 광휘가 가득했다.
또한, 그 가운데 굵직한 빛줄기 여러 가닥이 휘휘 돌고 있었다.
[이건 패왕금룡신공(覇王金龍神功)이다. 문신의 무공이지. 그가 창궁관에 자신의 모든 마음을 남겨두었었구나. 허허허.]
‘아-!’
무천 조문신, 그는 창궁관에 자신의 심혼을 다 쏟았던 모양이었다.
친우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검노야는 당연하게도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문신은 그게 창궁자에게 전해질 거라고 일말의 생각조차 못 했겠지만 말이다.
긴 시간을 넘어 불가사의한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불가해한 신비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우선아. 정신을 집중하여 기운을 살피고 들이마셔 보아라.]
‘이걸…… 들이마실 수 있습니까?’
진우선이 당황하여 물었다.
검노야가 말하는 기운은 주변에 가득한 황금 광채이며, 실상은 패왕금룡신공이지 않은가.
검노야는 지금 그걸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었다.
[들이마실 수 있다. 문신이 그렇게 안배해놓았구나. 아마도 후일을 생각하고서 한 행동은 아니겠지만, 우선이 네가 그의 후인이 되었다. 패왕금룡신공이 너에게 이어져 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