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인연의 흐름 (2)
창궁관은 멀리서 봐도 웅장했다.
정무맹에 우뚝 솟은 전각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장엄하기로는 창궁관을 따라올 건물이 없었다.
창궁관은 좌우 양 끝을 한눈에 담기가 쉽지 않았고, 그렇게 십 층을 쌓아 올렸다.
컸다. 정말 컸다. 전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성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절로 위엄이 넘쳤다.
압도적이었다.
그런 창궁관에 다가가는 네 사람이 있었다.
창궁관 앞에 넓게 펼쳐진 돌바닥 위에 일렬로 줄지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개미의 행진 같았다.
그들은 호심당주 일행이었다.
호심당주 호연강이 맨 앞에 서서 일결제자인 진우선과 만총, 화설옥을 인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엊그제까지 펼쳐진 십오행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세 사람이었다. 시험 전에 발표했던 대로, 오늘부터 창궁관에서 꼬박 하루씩 보낼 예정이었다.
창궁관이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거대한 그림자로 그들을 감싸 안았다.
잠시 후.
호연강 일행이 커다란 대문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한 사람과 마주했다.
그는 문사풍의 중년인이었는데, 호연강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중년인의 눈이 매우 짙고 검은 게 단연 돋보였다. 윤기 있는 흑발을 질끈 묶은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느낌으로만 보자면, 그는 생각이 깊고 강단이 있으며 대쪽 같은 성품의 소유자일 듯했다.
그가 호연강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호연 당주, 오셨는가?”
“하 노사께 인사드립니다.”
호연강이 극진히 예를 취했다.
노사(老師)라 부르면서.
호연강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노사라고 높여 부를 정도란 말인가?
하지만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랜만이야. 반가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맹이 바쁜데 자네가 애써주니 고맙지.”
둘의 대화가 매우 살가웠다.
“그나저나 연락을 받고 놀랐네. 자네가 큰 결정을 했더군. 창궁관의 권리를 양보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양보랄 게 있겠습니까? 너무 좋은 기회지만 저보다는 제자들에게 더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저는 스승님의 발자취를 좇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런가? 허허허.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군.”
“아직 미흡한 게 많은 탓이지요.”
“허허. 겸손도 그 정도면 되었어. 자네의 참마도법은 상승의 무공 중에서도 일절로 꼽히지 않나. 거기서도 계속 나아가고 있다니, 대단해.”
호연강이 계속 자신을 낮추자, 하노사가 슬쩍 핀잔주듯이 말하며 일단락했다.
그리고 시선을 일결제자들에게로 돌렸다.
“반갑구나. 나는 창궁관주 하무백이라 한다.”
하 노사 하무백.
그는 창궁관주였다.
하무백이 짧게 이름을 말하자, 호연강이 옆에서 그를 설명했다.
“하 노사께서는 삼십 년 전에 내가 정무맹에 몸담을 때 수석장로이셨다. 그 후로도 이십 년 넘게 수석장로로 계셨으니, 정무맹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분이시지. 나를 비롯해 맹의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있고. 그러니 창궁관에 머물 동안 나를 대할 때보다 예를 갖추었으면 좋겠구나.”
호연강의 말에 진우선과 만총, 화설옥이 명심하겠다는 눈빛으로 고갯짓했다.
사실 하무백은 자그마치 삼십 년 동안 정무맹의 수석장로를 맡았었다. 정무맹의 백 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건 모두 하무백이 다방면으로 능력이 출중한 까닭이었다.
그러다 오 년 전에서야 후임을 세우고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때 온 자리가 창궁관주였다. 수석장로에 비하면 한직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일결제자들이 그런 하무백을 보았다.
그들 중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화설옥이 먼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화설옥이라고 합니다.”
“네가 화가장의 아이구나. 반갑다.”
하무백이 화설옥을 반기며 눈을 마주했다.
창궁관에 허락된 제자들에 대해 미리 연락을 받았기에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저는 만총이라고 합니다.”
“탁 장로의 제자라지? 잘 배웠구나.”
하무백이 만총과 시선을 마주치며, 그에게 혼원벽력창을 가르친 탁무위를 언급했다. 하무백은 수석장로로 오래 지냈던 만큼 탁무위와도 친분이 꽤 있었다.
그리고 진우선에게로 왔다.
“저는 진우선이라고 합니다.”
“허허허. 훌륭하구나.”
하무백이 진우선을 보며 말했다.
그 순간 호연강은 하무백의 목소리가 약간 달라진 걸 느꼈다.
조금 전 화설옥, 만총에게 말할 때와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허탈한 듯도 하고, 기쁜 듯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도 했다.
이건 흡사…… 감탄한 것을 감추는 모습이지 않은가.
‘하 노사께서 진우선의 진면모를 알아보셨구나!’
호연강은 하무백이 감탄했다는 사실에 놀랍고,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다.
그러면서 진우선을 슬쩍 보았다.
진우선은 지금 태연했다.
곁눈질하여 살펴보니 화설옥과 만총은 하무백의 기세에 눌려 잠시 숨이 흐트러졌건만. 진우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과연 우선이구나. 대단해!’
호연강이 흐뭇하여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진우선이 하무백의 새까만 동공을 마주했을 때, 하무백의 눈이 검게 빛나고 있었다.
검은빛을 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 눈빛 속에 담긴 의지를 읽었다.
그와 동시에 담담히 그 눈빛을 살폈다.
눈빛은 단조로웠다. 비어 있었다.
또한, 자유로웠다. 거칠 게 없었다.
비어 있음은 채움으로 나아가니, 그의 눈빛은 곧 심혼까지 살피려 하고 있었다.
즉, 하무백의 눈빛은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자가 관조하며 내려다보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하무백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심령을 바라보고 놀란 빛이 역력했다. 화설옥이나 만총을 볼 땐 미동조차 없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진우선의 심혼에 깃든 거대하고 광활한 대자연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무백의 눈빛은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걸 담아낼 수가 없었다.
다만…… 보고 느낄 뿐이었다.
그리하여 하무백이 허허 웃으며 훌륭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 모든 게 찰나 간의 일이었다.
어쨌거나 하무백은 일결제자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그는 아무런 내색 없이 다음 대화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눈빛들이 참 맑구나. 좋은 아이들이 귀한 기회를 받았어.”
“감사합니다.”
일결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하무백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들어가서 살펴보도록 하지. 세 사람은 나를 따라오게. 진법과 기관진식이 어우러져 있으니, 내 뒤를 잘 따라와야 하네.”
“네, 알겠습니다.”
일결제자들의 대답을 뒤로하고, 하무백이 호연강에게도 말을 건넸다.
“호연 당주는 이만 돌아가도 괜찮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정오에 오겠습니다.”
“그러시게.”
대화를 마친 하무백이 창궁관의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결제자 세 사람, 진우선과 만총과 화설옥이 그 뒤를 따랐다.
호심당주 호연강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잠시 후.
창궁관의 금색 현판이 은연중에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용사비등의 세 글자 ‘창궁관(蒼穹館)’이 맹렬히 타올랐다.
그러더니!
현판에서 글씨가 튀어나오듯 금빛 형체의 무언가가 쏘아져 나왔다.
휙-
그 금빛 형체가 긴 꼬리를 그리며 허공을 마구 휘돌았다. 그 몸집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창궁관을 덮을 만큼 불어났다.
번쩍!
섬광이 터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그리고 다시 보니 금빛 형체가 하나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금룡(金龍).
그 길고 위협적인 형상 가운데 두 눈이 특별했다.
한쪽 눈은 패도적인 기세를 세차게 내뿜고, 다른 쪽 눈은 관조적인 빛을 차분히 내뿜는 까닭이었다.
금룡이 창궁관을 내려다보더니 확 쏘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형체가 창궁관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작아지더니, 창궁관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본 이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어도 볼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단 한 사람만 빼고는.
***
대문을 들어서서 계속 걸어 세 번째 큰 문을 지났다.
그제야 하무백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잘 들어왔구나. 여기부터가 진짜 창궁관이다. 창궁관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진우선과 만총, 화설옥이 뒤따라 들어와서 하무백 앞에 섰다.
하무백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창궁관의 구조를 설명했다.
“지금 보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왼편에는 계단이 있고, 내 뒤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책장들이 늘어서 있지. 오른편으로 가면 간단히 허기를 채울 수 있고, 집중해서 책을 보거나 혼자 연무할 공간이 있다. 창궁관은 이렇게 생겼으니, 어려운 구조는 아니지.”
이어서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제 정오이니 너희들은 내일 정오까지 창궁관 안에서 머물게 될 것이며…….”
창궁관 내에서는 책을 몇 권이든 제한 없이 자유롭게 살펴도 되나, 외부로는 단 한 권만 필사하여서 나갈 수 있었다.
일 층에서부터 오 층까지는 무공서가 분류되어 있으며, 육 층부터 십 층까지는 무공비급을 제외한 천문, 지리, 병법, 진법 등의 책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책 수에 비하면, 하루라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짧은 시간이구나. 하지만 또 하루가 그리 짧지만은 않지. 비록 하루지만, 무엇을 접하는 소홀히 하지만 않는다면 인연은 반드시 있을 것이야. 창궁관에는 그런 인연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 있거든.”
하루, 열두 시진.
촌각으로 시간을 따지면, 책을 몇 권이나 볼 수 있을까.
시간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창궁관의 책을 모두 보고 살피는 건 요원한 일이다.
이미 존재하는 책의 권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며, 지금도 계속 증가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하무백은 인연을 말했다.
인연이 있다면 한 권만으로도 만날 것이요, 인연이 없다면 만 권을 살피고도 그저 스쳐 지나갈 테니까.
하무백은 창궁관이라는 무한한 인연의 보고(寶庫)에 들어온 일결제자들이 진정한 인연을 놓치지 않았으면 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게 말하거라. 나 역시 이곳의 모든 책을 다 살펴본 건 아니지만, 아는 한에서는 최대한 도와줄 테니.”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내가 할 말은 다 끝났구나. 편히 책을 찾아보거라. 부디 좋은 인연을 만나기 바란다.”
하무백이 말을 마치고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입구가 보였다. 문짝이 없어 그 뒤로 책장들이 쭈욱 늘어서 있는 모습이 바로 보였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진우선과 만총, 화설옥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잠시 모였다.
셋은 말이 없었다.
진우선이 만총과 화설옥을 보았다. 그들의 눈에서 열망의 빛을 보았다.
그러면서 무언가 기다리는 것 같았다.
“각자 보고 싶은 걸 편히 보자.”
진우선이 한마디 했다.
“그래. 그럼.”
“고마워요. 진 공자.”
만총과 화설옥이 즉각 대답하더니, 곧장 정면의 책장들 사이로 득달같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이미 마음이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서 들어서자마자 자신들이 찾는 게 어디에 있을지 무엇이 좋을지 파악하기 위해, 책장의 분류와 책의 이름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반면 진우선은 두 사람과 달리 좌측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생각에 잠겼다.
‘인연이란 게…… 있는 걸까?’
하무백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인연.
창궁관에 모여 있는 인연.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금빛 기운이 진우선을 감싸고 지나갔으니까.
‘금빛…… 용!’
온통 황금빛 광채를 휘감고 있는 금룡이었다.
금룡이 진우선의 온몸을 감싸 안은 뒤 앞으로 스르륵 날아갔다.
금룡은 꼬리를 흘려서 긴 흔적을 남겼다.
그게 아지랑이처럼 남아서 일렁이고 있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사실 금빛은 요 며칠간 익숙했다.
창궁관을 보면서 황금빛 후광을 보았다.
검노야는 볼 수 없었으나, 진우선은 그의 환영에도 금빛이 어려 있던 걸 분명히 보았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의심하지 않았다.
금룡은 무언가 의도하는 바가 있을 터였다.
그래서 진우선은 지금 그걸 따라가고 있었다.
계단을 계속 오르니, 오 층이었다.
이제 금빛 아지랑이는 책장 사이로 쭈욱 이어져 있었다.
진우선이 그리로 따라갔다.
창궁관 오 층은 여느 층과 마찬가지로 밝지 않았다. 그렇다고 흐리지도 않았다.
빛이 어디선가 들어오긴 하는데, 직접 보이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피부에 서늘함이 와서 닿았다. 동시에 짙은 책 냄새와 은은한 나무 향기가 전해져왔다.
바람이 느껴지지는 않는데, 공기는 흐르고 있는 듯했다.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진우선은 죽 늘어선 책장들을 계속 지나치며 금빛 연기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장 모퉁이를 돌았다.
저 앞에 금빛 광채가 짙은 빛을 발하는 곳이 보였다.
한참 구석진 위치였다.
그곳에 다가갔다.
서가의 맨 위 칸, 손이 닿기 힘든 위치에서 한 책이 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얼른 뽑아 들었다.
겉표지를 확인했더니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름 없는 서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왜 강렬하게 빛나고 있을까?
얼른 한 장을 넘겼다.
그러자 아래쪽에 작게 쓰여 있는 글귀 하나가 보였다.
-창궁을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