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75화 (75/225)

075.

#인연의 흐름 (1)

명패전이 끝났다.

이로써 십오행도 마쳤다.

열닷새 간 수고했던 일결제자들은 획득한 명패를 제출한 후 모두 숙소로 돌아갔다.

이제 그들은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면 된다. 이미 그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사부들은 그럴 수 없었다.

십오행을 치르며 보고 듣고 겪은 제자들의 모습을 성적으로 산출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다들 호심당주 호연강의 집무실에 모여 있었다.

무사부들 간에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은 호연강이었다. 그를 보좌 하여 회의를 진행하며 기록하는 역할은 석자풍이 맡고 있었다.

“……무사부들께서 이야기 하신 바를 종합해보면, 청화홍화전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순위를 매기는 게 만만치 않다는 말씀 같소. 그건 나도 인정하는 바이며, 전체를 평가할 때 충분히 고려하겠소.”

호연강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 말에 무사부들의 언성이 사그라들었다.

호연강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화홍화전(靑花紅花戰)은 십오행의 전반부 열흘 동안 치른 청화조와 홍화조의 대결을 일컫는 말이었다.

후반 닷새 동안 치른 명패전과 대비되니 이리 부르기 시작했는데, 무사부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이니 자연스레 통용되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청화홍화전에 대해 무사부들이 평가하는 것에 난색을 보였다. 각자의 주장이 상충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있었다.

일결제자들은 처음에 청화조와 홍화조로 반반 나누어 대결했다.

그런데 진우선이라는 압도적인 실력자가 있으니, 시간이 갈수록 힘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진우선 홀로 청화조가 되어, 홍화조가 된 다른 모든 일결제자를 제압했다.

그러니 일등은 진우선이었다.

그건 당연했다. 활약이 압도적이었기에 반론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진우선 때문에 오히려 나머지 일결제자들의 성적을 정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진우선이 모두 제압해 버렸으니 남은 이들의 성과는 별 볼 일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어떻게 성적을 차등하여 매길 수 있단 말인가.

무사부들이 밀착하여 관찰했으나, 이런 일방적인 상황에서는 변별력을 가질 만한 특이점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회의가 말다툼처럼 흘러간 상황이었다.

이에 비하면, 명패전은 판단하기가 너무나 좋았다. 명패의 개수로 공과를 확실히 따질 수 있는 까닭이었다.

획득한 타인의 명패는 그와 싸워 이겼음이니 공이다. 반생소에서 다시 받아간 명패는 한 번 죽었음이니 과이다.

일결제자들은 닷새간 흑당의 고수들과 두루 겨루었으니, 유불리를 따질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호연강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다음 주제를 꺼냈다.

“이제 명패전에 관해 이야기해봅시다. 석 부당주, 일단 누구부터 생각하면 좋겠소?”

“만총의 성과가 단연 돋보입니다. 그는 총 서른 개의 명패를 획득했고, 두 번 목숨을 잃었습니다. 창술의 성취가 높아 실력이 손에 꼽힐 만하고, 명패전을 하는 동안 눈썰미와 상황 파악 등도 좋아 보였습니다. 크게 흠을 잡을 데가 없다고 봅니다.”

석자풍이 만총을 언급했다.

호연강이 무사부들을 보며 물었다.

“만총이 두 번 패했군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아마 첫 번째는 저일 것입니다. 첫째 날 밤 제가 제압했습니다. 우문혁과 함께 머물며 교대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는데, 아직 경계에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위지 사부라면 응당 그럴 만하지요.”

“그래도 둘째 날부터는 꽤 조심스럽게 밤을 경계하고 있어서 더 접근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사부 위지상곤.

그는 경신술의 대가로 잠행술, 은신술 등에도 조예가 있었다.

이번 명패전 동안 밤에 주로 활약했는데, 일결제자들에게 그는 악몽 같았다. 밤중에 조금이라도 경계가 소홀하면 즉시 나타나 목숨을 앗아가기 때문이었다.

무사부들이 연이어 만총을 평했다.

“제가 보니 창술에서는 크게 허점을 찾을 수 없었고…….”

“만총은 지쳐 있는 상태에서도 이성적으로 움직였으며…….”

호연강이 한동안 귀 기울여 듣더니, 그들의 의견을 종합했다.

“만총에 대해서는 대부분 호평하시는구려. 잘 알겠소이다.”

그러자 석자풍이 다음 제자를 언급했다.

“다음은 화설옥과 노종해, 우문혁입니다. 이 세 사람이 관건인데, 각기 명패를 스물네 개, 스물세 개, 스물한 개 얻었고, 앞의 두 사람은 세 번씩 목숨을 잃었고, 우문혁은 두 번입니다.”

“석 부당주가 한꺼번에 세 사람을 언급한 걸 보니, 아무래도 이번 십오행에서 세 사람의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운 거 같소. 무사부들께서 한 번 더 도와주시오.”

청화홍화전처럼 자유롭게 주장을 펼쳐달라는 이야기였다.

호연강의 요청에 따라, 무사부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실력을 체감해보니 세 사람은 막상막하였다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화설옥이 다른 두 사람보다 담대하여…….”

“노종해의 검이 공수에 두루 능통하여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무당파에서 기본을 탄탄히 쌓은 것에 그 장점이 있어…….”

“제 의견은 좀 다릅니다. 검으로 비교하자면 노종해보다 화설옥이 낫다고 보입니다. 조화로움이 무당파의 상징이라고는 하나, 대신 매섭지 못하지요. 반면에 화설옥의 검은 냉정함을 엿볼 수 있고, 군더더기가 거의 없어…….”

“둘의 실력은 참 엇비슷한데, 그렇다면 저는 협의(俠義)를 지닌 노종해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정무맹의 기치가 무엇입니까? 애초에 그 아이가 무당파를 내려온 것도…….”

“화설옥은 한마디로 냉정한 검수라 할 수 있지요. 다들 아시겠지만, 이결제자 중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천무결을 닮았다고 볼 수 있는데, 화설옥의 성취는 그보다 빠르니…….”

장내의 열기가 뜨거워졌다.

다들 화설옥과 노종해를 두고 누가 나은지 갑론을박했다.

특히 화설옥의 무사부인 등원영이 목청을 높였다.

그녀는 호심당에 몇 없는 여고수로서, 화설옥의 무재와 싹싹한 성품에 반해 애정으로 열심히 지도하고 있었다.

천무결의 이름을 언급한 것도 등원영 그녀였다. 화설옥의 검술이 가진 장점이 천무결과 비슷했는데, 천무결은 이결제자 중 세 번째로 손꼽히기도 했다.

즉, 등원영의 발언에는 사적인 목적이 다분했다.

노종해를 가르치는 추량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협의를 들어 자신이 맡은 제자를 옹호하고 있었다.

어차피 진우선과 만총의 기량은 쉽게 따라가기 어렵고, 논쟁거리로 삼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등원영과 추량은 세 번째 순위를 두고 은연중에 자신의 제자를 부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무사부 없이 수련해온 우문혁은 어느 순간부터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호연강이 슬쩍 언급했다.

“우문혁에 대해서는 다들 말이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의 성취가 지난봄보다 훨씬 눈부시나, 아직 화설옥과 노종해에 비할 바는 아닌 듯합니다.”

“이건 저 역시 같은 생각이에요.”

추량과 등원영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에 호연강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렇군. 일단 알겠소.”

그러자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호연강이 충분히 귀 기울여 들었다고 말한 것이니까.

“그럼 다음으로는…….”

그렇게 회의가 계속 진행되었다.

다른 일결제자들에 관한 회의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가만히 있던 황백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작 명패전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보인 진우선에 관해서는 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겁니까?”

“허허. 황 사부.”

호연강이 웃음을 흘렸다. 의논만 오가는 와중에 처음으로 마음 편한 미소를 보였다.

“진우선은 명표를 쉰 개 얻었고, 단 한 번도 죽지 않았으니, 다른 제자들에 비해 압도적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언급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애초에 논의할 게 없습니다.”

석자풍의 말에 이어, 다른 무사부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진우선이 아니면 누가 일등이겠소?”

“떼어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지요.”

“실력을 우리가 다 보았소이다. 따로 말하면 입만 아프오.”

모든 무사부가 입을 모았다.

진우선의 성적에 대해서는 이견조차 없었다.

“아! 그런 거였군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혹시나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었습니다.”

황백은 자신의 언행이 멋쩍은지 어색한 웃음만 슬며시 흘렸다.

“허허. 황 사부께서 우선이에게 관심이 많으셨구려. 듣자 하니 직접 자웅을 겨루었다고 들었소. 어떠셨소?”

호연강이 물었다.

무사부들은 암묵적으로 일결제자들에게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명패전은 생사를 건 싸움이 아닌 까닭이었다.

그들의 실력이 애초에 제자들보다 뛰어나거니와, 실력을 평가하는 자리이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무사부들은 일결제자들이 강한 적을 만났을 때 어찌하는지 보고 싶을 뿐이었다. 목적이 거기에 있다고 봐도 좋으리라.

그런데 황백은 전력을 다해 승부를 내었다. 다른 무사부들과 다른, 황백의 독자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승자는 진우선이었다.

그 점에 대해 황백은 미안한 기색을 먼저 드러냈다.

“무사부로서의 명예를 떨어뜨려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소. 강 대협께서 일찍이 말씀해주셨소이다. 황 사부가 진우선을 호적수로 느꼈다고. 또 검을 섞다 보면 이번처럼 실력을 겨루고 싶을 수도 있지요. 강 대협께서도 그 점을 생각하시어, 급한 상황이 생기면 책임지겠다고 하셨소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폐를 많이 끼쳤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황백이 호연강과 강무옥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마음을 전했다.

호연강은 그 상황을 이해해주었고, 강무옥은 그 상황에서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호연강과 강무옥이 황백의 인사를 받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호연강이 화제를 돌렸다.

“원래는 이따가 따로 논의하려고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소. 명패를 확인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진우선 그 아이가 얻은 쉰 개의 명패에는 같은 표식이 하나도 없더이다.”

“……!”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하는 의문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그는 모든 상대에게서 명패를 얻은 것이오. 흑당의 고수가 쉰 명인 줄은 어찌 또 알고. 허허허.”

호연강이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그건 확신의 웃음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지만, 정말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건 진우선의 의도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무사부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흑당의 고수들이 복면을 쓰고 움직였지만, 진우선은 애초에 다 파악하고서 한 명씩 모두 마주친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떤 능력을 가졌기에…….

그때, 호연강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실 강 대협과 의논한 바가 있었소. 그건 일단 이번 시험과는 조금 궤가 다른 의논이라 마지막 안건으로 이야기할 예정이오. 황 사부의 평가는 그때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 한마디 해주시겠소?”

좌중의 시선이 황백에게로 쏠렸다.

황백이 엷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경험한 바, 우선이는 이미 절정의 고수라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패배를 인정합니다.”

“아니요. 황 사부께서 열정적으로 십오행에 임해주시느라, 당시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따름이오.”

호연강은 황백이 민망할까봐 얼른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느새 황백에게로 다가온 강무옥은 작게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렇게 그날 밤 회의가 계속 이어졌다.

***

십오행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일 위는 진우선이요.

이 위는 만총이며.

삼 위는 화설옥이었다.

노종해와 우문혁은 그다음 순위였다.

창궁관에 하루씩 다녀올 수 있는 자격이 삼 위까지이니, 노종해와 우문혁은 불가능했다.

그래서일까. 우문혁의 어깨가 평소답지 않게 축 처져 있었다.

“진 소협. 수고 많으셨소.”

“총이 너도 고생했어.”

우문혁의 목소리 역시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행동에서, 음성에서, 눈빛에서 깊은 아쉬움이 절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진우선과 만총은 우문혁이 얼마나 창궁관을 염원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건네는 인사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혁아, 다녀올게.”

“내가 다녀오면, 춘추관도 같이 한 번 돌아보자. 거기에 도움이 될 게 있을지도 몰라.”

“그래. 알았어. 고마워.”

우문혁이 억지로 웃으며 둘을 보냈다.

진우선이 그런 우문혁의 시선을 피해 창궁관을 바라보았다.

금빛으로 물든 창궁관이 보였다.

절로 광채를 뿜어내고 있으니,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스승님도 못 알아보셨는데.’

검노야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검노야도 금빛 광채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창궁관의 황금 광채처럼 검노야의 환영이 빛났다.

그리고 진우선은 이제 그런 창궁관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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