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74화 (74/225)

074.

#십오행이 가져온 변화 (3)

황백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또 없다!’

이번에도 헛손질이었다.

눈앞의 제자를 분명 눈으로 보고 그 외의 감각으로도 확실히 인식하여 검을 날렸는데, 허공만 베고 말았다.

아무리 초식을 펼쳐도 검에 옷자락 하나 걸리지 않고 있었다.

‘과연! 이 정도로는 역시 안 되는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모자랐다.

지금 펼치는 수준이라면 다른 일결제자들은 감히 맞서지 못할 터였다. 그들이라면 몇 초식 어울리기도 전에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제자는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 달랐다.

다른 일결제자와 비교할 필요조차 없었다. 비교하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이리라.

이런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는 지금도 꽤 여유로워 보였다. 그게 얼굴에서, 움직임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그는 전혀 급하지 않았다. 몸놀림은 가볍고, 숨소리는 평온했다.

그는 황백의 검이 힘을 발휘하는 간격 사이에서 운신이 자유로웠다.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런 식이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를 않았겠구나! 위험한 순간이 거의 없었을 테니까.’

실제로 그는 단 한 번도 죽지 않았기에, 반생소에 들른 적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모든 공격을 막거나 흘리고 피했다. 그래서 피해조차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매섭게 찔러 들어왔다.

너무나 단순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게 유효했다.

흑당의 고수들이 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고의 결과를 내고 있었다. 현재 명패를 가장 많이 모았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흑당의 고수들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이런 단순한 방법 따윈 일격에 깨부술 수 있는 실력자였다.

호심당의 무사부와 내당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제자들은 대등하게 맞서지도 못할 상대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방법으로 답을 찾아낼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황백 자신을 상대하는 것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황백이 또 하나 알아챘다.

‘일각만 버티면 되니까 이런 방법을 택할 수 있었어! 이런 상황은 미처 예상치 못했는데!’

이건 실책이었다.

또한, 소법칙의 맹점이기도 했다.

흑당은 일결제자를 이겨야 승리하지만, 제자는 그저 일각 동안 패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흑당과 백당에게 주어진 승리의 조건이 다른 데에서 이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대로라면 그는 흑당을 이기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었다.

보통의 일결제자들을 위해 만든 소법칙이었는데, 눈앞의 제자처럼 실력을 갖춘 이에게는 역효과만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이야. 그렇기에 허허실실로 싸우는 거였어. 허허허.’

싸워서 이기면 좋고 이기지 않아도 그만인 식이었다. 잘 방어하면서 일각의 시간만 끌어도 명패를 얻을 수 있는 까닭이었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 황백을 비롯한 흑당의 고수들을 상대하면서도 규칙 바깥에 존재할 수 있었다.

왜 무사부들과 내당의 고수들이 그를 가리켜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는지 이제야 완벽히 이해되었다.

‘이래서야 일각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겠구나!’

황백은 깨달았다. 이대로 계속 흘러간다면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으리란 것을.

또한, 상대는 일각을 버려냄으로써 자신의 명패도 획득할 터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일각의 시간은 족쇄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아니었으나, 눈앞의 제자에게만큼은 그랬다.

‘본 실력을 보고 싶은데!’

황백의 마음에 아쉬움이 차올랐다. 제대로 검을 섞고 싶은 까닭이었다.

무사부로서 제자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검을 쓰는 한 명의 무인으로서 상대하고 싶었다.

눈앞의 제자는 그만큼 호승심이 이는 존재였다.

다만, 그의 실력을 다 알아보기에 일각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지금 알아보고 싶다면 얼른 승부수를 던져야 하리라.

그런 생각이 든 순간, 황백은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멈춰 섰다.

검으로 경계하던 태세 또한 내려 버렸다. 여태까지의 싸움 방식이 더는 필요 없었다.

황백이 상대를 똑바로 보았다.

그의 맑고 깊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도 가만히 서서 마주 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나는 황백이다. 호심당의 무사부로서, 검을 가르치고 있지.”

황백의 음성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제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마주 인사를 건넸다.

“황 무사부님, 저는 일결제자 진우선이라고 합니다.”

“전혀 놀라지 않는구나.”

“십오행을 시작할 때, 사흘간 저를 살펴주시고 보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황백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눈앞의 제자, 진우선.

그는 자신을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복면을 쓰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사흘간 쫓아다닌 것밖에 없는데, 그거면 충분했던 모양이다.

아마 애초에 만났을 때 바로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복면 따위는 진우선에게 장애가 아닐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황백이 자신의 본심을 꺼냈다.

“우선아. 십오행 동안 네가 검을 쓰는 걸 볼 때마다 참으로 신묘하더구나. 너무 놀라웠지.”

“감사합니다.”

“나는 지난봄에 네가 비무에서 우승할 때, 그 무공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한데 너는 그걸 펼치지 않는구나. 물론 애써 검공을 펼칠 필요가 없으니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진우선의 검은 참으로 범상치 않았다.

그의 검은 빠르지 않으면서도 쾌(快)를 제압하고, 가벼운 일검에도 중(重)을 누르며, 미동 없이 단순하게 직선으로 찌르는데 환(幻)을 깨트렸다.

십오행이 진행되는 내내, 진우선은 이런 식으로 그저 검을 쓰는 묘리만 펼쳐서 적을 상대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일결제자는 진우선이 검을 간단히 펼쳐내는 것조차도 막아내기에 급급했고, 흑당의 고수들은 일각 안에 승부를 가르기 어려웠으니까.

즉, 진우선은 하나의 법(法)에 이른 것들은 전혀 펼치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지금 황백의 마음을 안달 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번 보고 싶구나. 진심으로 나를 상대해줄 수 있겠느냐?”

황백의 눈빛이 간절해 보였다.

진우선이 그 간절함을 보더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고맙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찰나의 차이지만, 먼저는 진우선이었다.

화아아-!

빛이 일었다.

진우선의 목검이 스스로 발광하 듯이 빛을 내뿜었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아니, 다시 보니 전신에서 환한 빛이 뿌려지는 듯했다.

착각일까?

아니다. 착각은 아니다.

기운을 끌어올리던 황백이 진우선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검을 비스듬히 세워 들었다.

그 순간, 황백의 몸이 검 뒤로 완전히 가려졌다.

오직 검만 보였다.

검과 내가 하나가 되면 이런 모습이리라.

이것은 바로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였다.

신검합일은 검의 길을 걷는 데 있어서, 상승의 경지로 나아가는 데 꼭 깨달아야만 하는 심오한 이치였다.

한데 이러한 신검합일이 칠절검세(七絶劍勢)에서는 기본이었다. 검법의 위력이 너무도 강하기에, 신검합일이 시작부터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게 황백이 강호일절로 손꼽히는 자신의 성명절기(盛名色技)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진우선에게 진심을 부탁했을 때, 그 자신도 다짐한 바였다. 그게 예의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 진우선의 검에서 쏘아지는 기세를 보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허-! 칠절검세가 아니면 당해내지 못했겠구나! 기세만으로도 이 정도일 줄이야!’

파르르-!

진우선의 주위로 대기가 몸을 떨었다.

황백이 기감으로 그것을 알아챘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일렁거리는 느낌도 받았다.

진우선에게 어린 빛이 물결 번지듯 잔잔하게 파형을 그려낼 때마다 공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사방이 공명한다.’

천지의 기운이 진우선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황백은 문득 깨달은 그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섬뜩함이 심혼을 관통했다.

눈앞의 광경은 극히 신비롭고 아름답건만, 전신의 감각은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 직감한 것이다.

위압감이 상당했다.

이건…… 생각 이상이었다.

뛰어나리라는 예상은 했으나, 그 범주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좋다.

피가 끓었다.

맥박이 마구 고동쳤다.

황백은 솟구치는 투지를 감추지 않고 마구 드러냈다.

자신이 무사부고, 진우선이 일결제자면 어떠랴.

체면 따윈 상관없었다.

지금 황백의 머릿속엔 희열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한 명의 무인으로서, 한 명의 검객으로서, 전력을 다하고픈 상대를 만난 건 행운이니까.

바로 그때!

끄덕하고 진우선이 고갯짓했다.

공격하겠다는 신호였다.

황백은 검을 더 꽉 말아 쥐는 것으로 답했다.

이 순간, 둘 사이에 대화는 필요 없었다.

화악-!

빛무리가 황백을 덮쳐왔다.

진우선의 신형이 날아들었다.

투투퉁-.

둔탁한 소리가 마구 터져 나왔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건만, 충돌음은 묵직하기 짝이 없었다.

검은 본디 칼날이 딱히 두껍지 않은데 신기할 정도로 둔중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두 검에 실린 기운이 엄청나다는 뜻이리라.

‘무슨 검이 이리……!’

황백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그는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손과 팔이 쩌릿쩌릿했다. 휘몰아치는 기운은 서로 맞댄 검을 넘어서서 온몸을 거칠게 할퀴었다.

검을 막으면, 기운이 몰아치고.

기운을 막으면, 검이 빈틈을 파고든다.

숨 막힐 정도였다.

그리고 끊이지 않았다.

진우선의 검은 단순히 빛이 번쩍번쩍하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의 검에선 빛이 있고, 그림자가 있었다.

빛은 환하니 압도적인 힘이 마구 뻗쳐 나왔다. 빛 뒤의 그림자는 길고 어두웠는데, 뭔가 진창에 빠진 것처럼 엉켜서 검초를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초식마다 빛과 어둠이 연이어 짓쳐들었다.

빛을 감당하면, 어둠의 수렁에 빠지고.

어둠에서 헤어 나오면, 빛이 단숨에 온몸을 쪼갤 듯이 쏘아져 왔다.

그러고 보니 진우선의 검은 하나이되 둘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건 하나인데, 느껴지는 위력은 둘이었다.

형(形)이 있고, 기(氣)가 있었다.

명(明)이 있고, 암(暗)이 있었다.

이게 그의 검공(劍功)이었다.

‘천하에 이런 검이 있었구나!’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모른다.

얼마나 감탄이 나오는지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감상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황백이 쉼 없이 손을 놀렸다. 그의 손에서 칠절검세의 절초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황백은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지만, 그의 검은 여전히 단단했다. 벽처럼 느껴졌다. 마치 기운으로 벽을 만든 듯한 잔상마저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건 황백이 의도한 게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절초들을 이리 쏟아내지 않으면, 즉 칠절검세를 멈추면, 곧장 빛에 꿰뚫릴 터였다.

진우선의 검초를 막을 때마다 충격이 전해져 팔이 후들거리고 있음에도, 절초를 이어나가야만 한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관통될 것만 같은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벽을 안 쌓을 수 있을까.

황백의 검에서 초식이 끝없이 이어졌다.

팔이 떨리고, 숨이 더 가빠왔다.

정신없었다.

그 와중에 느껴지는 건 단 하나였다.

‘진정 강하구나!’

하지만 감탄과 체감은 별개다.

이제 황백은 진우선의 검에 담긴 위력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버거웠다.

얼마 만이던가. 이토록 사나우면서도 진득한 정종무공의 힘에 압도되었던 적이.

그렇기에 황백은 기뻤다. 지금 짓눌리고 있지만, 고통 속에서도 희열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제자에게 호락호락 당할 순 없지.’

황백이 반전의 수를 꾀했다.

여태까지 수세였다.

손속을 섞어보니, 어쩌면 객관적으로 진우선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주저앉는 건 칠절검세의 힘이, 귀주검호의 명성이 용납지 않았다.

칠절검세에는 이런 상황에 걸맞은 최고의 초식, 검환폭풍세(劍環暴風勢)가 있었다.

황백이 온몸의 내기를 단숨에 폭발시키며 검을 뿌렸다.

검에서 표출된 기운이 커다란 둥근 막을 만들었다.

검환이라는 이름대로였다.

거기에 담긴 기세는 거칠었다.

사방을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온몸을 짓눌러 내장마저 터트릴 것이다.

그 순간!

진우선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에 더 많은, 더 강한, 더 센 빛이 어렸다.

그 검이 황백에게로 짓쳐 들었다.

콰콰쾅-!

둘의 기운이 충돌하며 마구 쪼개져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

조용했다.

싸움이 멎었다.

기운의 여파가 서서히 가시고, 그 후에 먼지가 가라앉았다.

그제야 상황이 보였다.

황백이 검을 떨어뜨린 채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서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칠절검세로 만들었던 벽이 균열로 쪼개진 것만 같았다.

진우선이 그런 황백에게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괜찮다.”

황백은 패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검이 좋더구나. 내 평생 이런 검은 처음이었어. 혹시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나?”

“감사합니다. 광영무였습니다.”

“광영무라……. 허허-! 좋구나.”

황백이 후련하다는 듯이 웃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 걸까.

어쨌든, 황백이 품에서 명패 하나를 꺼내주었다.

진우선이 황백의 명패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산등성이 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바위 뒤로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임중산과 은지약이었다.

그들의 휘둥그레진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지켜보고 있다가 놀란 모양이었다.

한데, 임중산과 은지약 두 사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 많았다. 일결제자와 흑당의 고수들 나눌 것 없이 두루 많았다.

그들 모두가 이 대결을 목격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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