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십오행이 가져온 변화 (2)
해가 중천에 올랐다.
부우우-! 부우우-!
산 아래에서부터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무곡 전체를 가득 울리고, 메아리쳐서 다시 한 번 귀청을 후벼 댔다.
“이제 시작이군.”
묵직한 목소리가 좌중에 내려앉았다.
임중산의 음성이었다.
임중산은 일결제자 중 가장 체구가 큰 사람이었는데, 커다란 몸집에서 흘러나온 육성이라 그런지 제법 무겁고 진한 울림이 있었다.
그 말과 함께 부담스러운 긴장감이 일결제자들의 마음속을 쿵 찧었다. 보이지 않는 압박이 온몸을 짓누르고 심장을 옥죄어왔다.
그러나 내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십오행을 치르며 달려온 지난 열흘간, 그런 감정에 꽤 익숙해진 까닭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태연하게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
조금 전, 뿔피리 소리에 한마디 중얼거렸던 임중산도 마찬가지였다.
“진 공자, 고마웠소. 시간이 아쉬울 정도요. 십오행이 끝나고, 이렇게 또 이야기할 시간이 생겼으면 좋겠소.”
“별말씀을요. 저 역시 즐겁고 유익했습니다.”
임중산이 진우선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손중보의 모습을 보고 뒤를 이어 진우선에게 찾아와 여러 가지로 대화를 나누었다.
임중산은 언월도를 다루는 게 능숙했는데, 원래부터 덩치가 있고 손이 커서 제법 실력이 좋았다.
거기다가 올해 호심당에 온 뒤로 키가 한 척(尺, 약 30cm)이나 더 자랐다. 힘도 더 세졌다.
이제 체격으로는 일결제자 중에서 견줄 사람이 없었다. 기골이 장대하기로 유명한 이결제자 심소룡만이 호심당에서 비견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든 그런 임중산도 진우선의 몇 수를 받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언월도를 쥐었던 손이 찢어지고 말았다.
진우선의 검에 실린 내력이 어마어마하여 그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임중산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대화를 나누었고, 진우선의 조언에 크게 감탄했다.
단숨에 매료된 모양인지, 다른 사람이 찾아올 때도 곁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제야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진 공자. 나도 고마워요. 좋은 시간이었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친해질 걸 그랬네요. 앞으로는 그러기로 해요.”
“네. 이런 이야기는 언제든 괜찮습니다.”
은지약도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임중산과 동갑이며 서로 친한지라 그를 뒤이어 진우선에게 찾아왔었다.
임중산이 진중했던 것과 달리, 은지약은 상대를 편안하게 해줄 줄 알았다. 그래서 진우선은 그녀가 두 살 많았음에도 임중산보다 편하게 의견을 나눴다.
은지약도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진신무공인 금나수법의 몇 동작을 직접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튼, 그렇게 두 사람이 감사를 전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진 공자. 나도 고맙네. 덕분에 놓치고 있던 걸 깨달아 머리가 맑아졌어. 역시 날마다 승리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과찬이십니다.”
“진 소협. 어진 마음으로 맞아주어 고맙소. 긴장되는 와중에 이렇게 함께 이야기하니 한결 편안해진 느낌이오. 나는 이만 가보겠소. 건승하시길 빌겠소.”
“그럼 다행이지요. 건승하십시오.”
“진 공자. 참으로 의지가 되는 시간이었소…….”
주변에 다가왔었던 이들도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고 떠나갔다.
그렇게 아침부터 몰려들었던 일결제자 예닐곱 명이 멀어져갔다.
십오행의 마지막을 위해서였다.
이제 골짜기 안쪽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진우선과 우문혁, 그리고 만총이었다.
만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겠네.”
“진 소협, 무운을 비오.”
만총과 우문혁이 통보하듯이 진우선에게 말했다. 둘은 같이 움직일 심산이었다.
“나도 너희의 무운을 빌게. 죽지 말고.”
“그럴 리 없지. 걱정하지 마. 나랑 혁이, 우리 둘이면 충분할 테니까.”
“진 소협도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 하아-! 명패전의 규칙이 너무나 아쉽소.”
우문혁의 아쉬움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의 바람은 셋이 함께 명패전을 치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명패전(名牌戰).
십오행의 마지막 순서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적의 명패를 빼앗는 전투였다.
방식은 간단했다.
명패는 나도 하나, 적도 하나.
명패를 빼앗기면 그 즉시 목숨을 잃는다. 적의 명패를 많이 모을수록 승리한다.
닷새간에 지켜야 할 대법칙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규칙이 너무도 간단하여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이미 알려졌다시피 무사부들이 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일결제자들을 직접 지도하고, 장단점을 모두 알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일결제자들은 그런 이들과 싸우고 이겨서 명패를 빼앗아야 했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니, 이란투석(以卵投石)이란 말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법칙이 두 가지 덧붙여졌다.
첫째로, 접전이 일각(一刻, 15분) 이상 이어지면, 그 대결은 일결제자의 승리라는 점이었다.
무사부와 일결제자의 실력 차이를 십분 고려한 대책이었다.
일결제자들이 무사부들과 맞붙어 일각 이상 생존한다면, 그것으로도 일결제자의 실력은 충분히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둘째로, 누구든 셋 이상은 함께 다닐 수 없다는 점이었다.
무사부든 일결제자든 예외가 없었다. 모두가 혼자나 둘이서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한쪽도 머릿수로 승리를 가져가지 못하게 할 의도였다. 첫 번째 소법칙을 악용하면 한 사람에게 여럿이 달려들 게 분명하니까.
이 규칙으로 인해 진우선과 만총, 우문혁은 함께할 수 없었다. 그들이 모이면 셋이 되는 까닭이었다.
“언제는 내가 없는 게 낫다며?”
진우선이 피식 웃으며 우문혁에게 대꾸했다.
어젯밤에 의논할 때만 해도, 둘이서 함께하기로 뜻을 모았었다. 진우선을 제외하고 만총과 우문혁 둘이서만.
진우선과 함께 다니게 되면, 주변 사람의 실력은 가려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특히나 지난 열흘간 진우선이 홀로 두각을 드러냈으니, 만총과 우문혁은 자신들의 성적을 위해서라도 진우선과 따로 다닐 심산이었다.
그들은 창궁관에 가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 상을 받을 합당한 자격이 있음을 실력으로 보여야 했다.
그걸 위해 진우선과 따로 떨어져서 행동하는 건 너무나도 타당한 선택이었다.
“진 소협, 본인의 선택을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오.”
“나무라지 않아. 그런 생각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와.”
“알겠소. 진 소협.”
우문혁이 눈을 빛내며 각오를 다졌다.
만총은 덤덤하게 한마디 툭 뱉었다.
“그럼 다녀올게.”
“그래, 수고해. 닷새 후에 웃으며 보자.”
진우선이 만총과 우문혁을 보냈다.
***
“헉……. 헉…….”
숨이 가쁘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
정신이 혼미했다.
전력을 다해 쉼 없이 달린 까닭이었다.
“일단 추격은 따돌린 거 같아.”
“그래?”
일남일녀가 수도 없이 뒤를 살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밤이 깊었고 이제 새벽이 가까워져 오지만, 아직 어두운지라 계속 주변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바윗덩이들 뒤로 숨어, 쫓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조심히 숨을 골랐다.
“여기서 잠시 숨 좀 돌리자.”
“그래.”
“하아-. 죽겠군.”
“진짜 너무 힘들어 죽겠어.”
“그나저나 말도 안 되지 않아?”
“뭐가?”
“사흘째 잠시 눈 붙일 새를 안 주잖아. 지독할 정도로.”
“무사부들이 언제는 안 지독했어?”
“지독했지. 그랬어.”
그 말이 표독스러우나 옳았다.
은지약의 말은 항상 그랬다.
임중산이 보기에 은지약은 다소 냉소적이나, 그래서 감정에 잘 치우치지 않고 냉철하게 상황판단을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명패전을 시작하는 날 아침에 진우선과 친분을 쌓자고 말했던 것도 은지약이었다. 그것도 참 잘한 일이었다.
“근데! 아무리 지독하다고 해도, 어떻게 잠깐 눈만 붙이려 하면 그 순간을 바로 알아차리고 찾아오는 걸까?”
“야! 그거 다 네 몸뚱이가 너무 커서 그렇잖아! 어디 숨기도 어렵고, 움직임 자체도 크고.”
“아……!”
“아는 무슨!”
능청스럽게 놀라는 척하는 임중산을 보며 은지약이 눈을 흘겼다. 저건 임중산이 미안해서 하는 시늉인 걸 아는 까닭이다.
사실 임중산과 은지약은 열여덟 살로 동갑이었다. 일결제자 중에서는 최연장자인데, 그게 둘밖에 없었다.
게다가 원래부터 친한 사이였다. 둘은 백홍무관에서 함께 수학하며 이름을 날린 기재로, 티격태격하면서도 같이 호심당에 온 상황이었다.
서로를 상당히 잘 알 수밖에 없었다.
“한 시진! 아니, 딱 반 시진만이라도 편히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꿈 깨. 불가능하니까.”
“왜?”
“적은 무사부들만이 아니잖아. 내당의 고수들도 가세했으니까. 다 복면을 써서 몰라본 거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이렇게 행적이 바로 발각되는 거야. 아마 다 합치면 우리의 두 배쯤 될걸?”
적들은 모두가 코와 입을 가리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 더러는 온통 흑의를 입기도 했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적이 누구인지. 그리고 몇 명인지.
그 허점을 파고들어 무사부만이 아니라 내당의 고수도 가세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너무 많잖아!”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쫓기는 거고.”
“막막하네.”
“그렇지. 그러니 지금 쉬어. 이렇게 시비 걸 시간이면 쉬는 게 나으니까.”
은지약의 설명에 임중산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수마(睡魔)를 이겨낼 방도가 없는데, 전혀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문득 임중산은 의문이 들었다.
“근데 넌 그런 걸 어디서 알았어?”
“어휴! 보아하니, 반생소를 헛 다녀왔네. 거기서 좀 물어보면 되는 걸, 도대체 뭘 한 거야! 두 번이나 갔다 왔으면서! 넌 정말 덩치만 컸지 멍청하기 짝이 없다니까, 진짜!”
반생소(反生所)는 명패전을 치르다 죽었을 때, 명패를 다시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면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대신 하루에 한 번만 가능하며 평가에 큰 악영향이 있었다.
임중산과 은지약은 지난 사흘간 두 번씩 다녀온 상태였다. 딱히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근데 내당에서도 왔을 정도면, 아무래도 부당주님은 일결제자들의 피를 싹 말려버리려는 속셈인 거겠지? 우리가 이럴 정도면 다들 말이 아닐 텐데.”
“허-.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거야? 제일 말이 아닌 건 우리라고.”
“아니야, 그래도 우리가 중간 정도는 하고 있을걸? 어쨌든 잘 버려서 얻은 명패가 더 많잖아.”
임중산의 말이 맞았다.
언월도를 휘두르는 임중산은 몸이 거대해지면서 신체적으로도 매우 발달했다. 그 덕택에 무사부의 공격을 일각 정도는 충분히 견뎌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임중산이 홀로 버텨서 얻은 명패가 사흘간 다섯 개나 되었다.
은지약은 그런 임중산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듣자 하니 만총은 이틀간 열네 개로 제일 많이 얻었다더라. 우문혁이 열 개고.”
“헉! 엄청 많네? 그럼 진 공자는?”
“그건 모르지. 반생소에 아예 오지를 않았다고 하니까.”
“오! 역시 진 공자야! 기대되는군.”
“감탄이 나와? 그게 어제 오전에 들은 거니, 오늘은 더 넘었을 텐데? 오히려 우리가 적은 걸 걱정해야 한다고.”
“그럼 좀 더 분발해야겠네. 오늘은 더 모아보자!”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그때, 동편 산등성이 너머로 어슴푸레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오! 저기 봐. 해 뜬다.”
임중산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은지약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일출이 보였다.
“이제 정확히 사흘이 지났네. 나흘째가 됐어.”
“이틀밖에 안 남았군. 곧 끝나겠어.”
“이틀씩이나 남은 거지. 죽겠는데.”
그때였다.
사삭-!
미세한 소리가 났다.
“……!”
그 즉시, 임중산이 몸을 숙였다.
넓적한 손으로 은지약도 몸을 숙이게 했다.
은지약이 눈짓했다.
임중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척하면 척이다. 누군가가 근처에 왔음을 알아채고 서로 눈빛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격전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타타탕-!
퍼퍽!
파팟-!
무기 소리, 박투(鬪)로 싸우는 소리, 달아나는 소리 등이 연거푸 들렸다.
동시다발적으로 결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임중산과 은지약은 바위 뒤에서 잔뜩 몸을 낮춘 채 소리만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소리만 듣고 있는 게 고역이라 느껴질 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해가 뜨자마자 죽다니…….”
“쉬지도 못했는데, 인정사정없네.”
여기저기서 잔뜩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미 결정 난 승패가 뒤바뀔 일은 없었다.
어쨌든 패한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가서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임중산과 은지약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한참 멀리에서 일결제자 셋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패잔병 같은 그들의 뒷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만 봐. 저 모습이 우리 모습인데. 좋지도 않은 걸 계속 보네.”
은지약은 씁쓸한 마음이 들어 임중산을 쏘아붙였다.
그러자 임중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쪽 보는 거 아니야. 잠깐만 저쪽 봐봐.”
“저쪽은 왜? 뭐 있어?”
“어! 있어. 저기에!”
임중산이 손가락으로 골짜기 아래쪽을 가리켰다.
은지약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저건…… 진 공자?”
“어, 조금 전에 해가 떠오를 때 마주쳤나봐.”
진우선의 모습이 보였다.
임중산과 은지약은 그 상태로 진우선을 계속 살펴보았다.
꿀꺽. 목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장난…… 아니구나.”